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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02화 (202/249)

#202화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은 진태, 아니 이제 순례의 저택이었다.

진태가 죽은 이후에 한 번도 찾지 않았던 이곳을 다시 찾은 이유는 순례가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장례식을 끝낸 뒤 순례는 곧바로 몽골로 여행을 떠났고, 그 뒤로는 모든 연락을 끊어 태선가의 그 누구도 소식을 알지 못했다.

그것을 보며 진태와 순례 사이에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는 몰라도, 배우자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오랜 여행 끝에 한국에 돌아온 것이다.

다른 태선가의 사람들은 모두 방문했다고 하는데 나는 늦은 감이 있었다.

늘 익숙했던 정문이 조금 낯설었다.

저택 앞에 서 있던 경비원이 나를 보고 자연스럽게 고개를 숙이곤 문을 열어주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처음 이곳에 왔을 때 느꼈던 것들이 되살아났다.

넓은 잔디밭과 호수, 진태의 개인 창고까지, 베벌리힐스에서 봤던 미혜의 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웅장했다.

이런 집에 순례 혼자 남아있는 것이다.

그녀와 마주한 적은 거의 없었지만,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이유 때문에 이곳을 찾은 건 아니었다.

진태는 이전에 말했던 것보다 더 많은 양의 지분을 순례의 이름으로 증여했다.

내 예상이지만, 전생과 달리 동만과 정순이 태선가에서 퇴출되고, 영만은 능력을 인정받지 못해 소량의 지분만 증여받아서 지분의 여유가 꽤 있었던 것 같다.

준만이나 재만도 예상보다 더 많은 양의 지분을 받았었고.

나는 순례가 받은 지분이 경영권 싸움에 이용되지 않았으면 했다.

진태가 떠나기 전, 순례를 부탁한다는 말을 듣기도 했고 늦은 나이에 자식들 간의 싸움에 끼어야 되는 것도 영 보기 싫었다.

예전 같았으면 문 앞에 경비원이 서 있을 텐데, 오늘은 없었다.

진태는 늘 경호에 대해 신경 썼기 때문에, 곳곳에 경비원을 배치했지만, 순례는 그 정도의 경비는 원치 않은 모양인 것 같다.

태선가를 떠나 통역사 겸 집사 한 명만 데리고 세계여행을 떠날 정도이니, 얼마나 자유로운 사람인가.

거실에 들어가자 순례와 한심한 놈이 함께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오래오래 살아야 돼요. 아셨죠?”

범준은 한심하도록 뻔한 말을 뱉으며 순례의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선의에 차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닐 테고,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뻔히 보였다.

그곳으로 다가가자 먼저 내 기척을 느낀 것은 순례였다.

“아이고, 우리 새끼 왔네. 어째 얼굴이 더 핼쑥해진 것 같아.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니?”

“네. 삼시세끼 다 잘 챙겨 먹고 있어요. 오랜만입니다.”

순례가 범준이 앉아 있는 반대편을 두드리며 말했다.

범준은 대놓고 경멸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어여 앉거라. 우리 손주 얼굴 좀 가까이서 보자꾸나.”

나는 소파로 몸을 옮기며 말했다.

“몽골은 어떠셨어요? 음식은 잘 맞으셨구요?”

아주 예전 새해 조찬 때, 순례가 주도해 먹었던 음식들이 기억났다.

하나같이 정성이 들어가 있었고 맛이 훌륭한 음식들이었다.

그런 순례였기에, 해외의 음식들이 입에 잘 맞을지 의문이었다.

“음… 몽골은 한 달 정도 있었는데 하필 겨울에 가는 바람에 한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춥더구나. 다행히 좋더라고, 몽골에 가끔 불어오는 한파가 있는데 그건 피했다고 하더구나. 요리는 아주 느끼했어. 그래도 겨울을 나기 위해선 먹어야 한다길래 꾹 참고 먹었지.”

범준이 끼어들어 물었다.

“기후는 춥고 음식들도 별로인 것 같은데 몽골에는 왜 가신 거예요?”

“다른 이유가 있겠니. 그냥 떠나고 싶으니 떠나는 거지. 너희들도 그런 마음이 들면 꼭 어디든 떠나보렴.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아름다운 것들이 많단다. 그렇지 않아도 다음 달부터 다시 여행을 떠나볼까 해. 이 넓은 집에 혼자 있으려니 무척 쓸쓸하구나.”

그러자 범준이 순례의 손을 다급하게 잡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다른 나라에 가서 몹쓸 병이라도 걸리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그냥 한국에 계세요. 제가 잘해드릴게요.”

퍽이나,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순례도 같이 있는 자리를 훈계하는 자리로 만들 수는 없으니까.

그보다 순례가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나로서도 나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것을 뺏기 위해 득달같이 달려들 태선가 사람들로부터 지킬 필요가 없어지니까.

그리고 순례도 자신이 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기 전에 백신도 철저하게 맞고, 몸 관리도 잘하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단다. 요 귀여운 녀석아.”

순례가 범준의 볼을 잡고 흔들자 범준의 표정이 싸하게 굳었다.

“혼자 떠나면 외롭잖아요. 한국에는 저도 있고요. 앞으로 더 자주 찾아올 테니까 가신다는 말씀 마세요.”

순례는 눈치채지 못한 듯 말을 이었다.

“외롭기는. 여행을 떠나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데. 어떨 때는 나보다도 늙은 노인과 친구가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꼬마 아가씨랑 친구가 되기도 한단다. 사람이 아니어도 길거리의 고양이, 아니면 꽃같은 것들이 친구가 되기도 해.”

순례가 꽤나 낭만적인 말들을 해댈 때마다 범준이 움켜쥔 손은 더 하얗게 변해갔다.

“할머니. 그럼 갖고 계신 것들은 그냥 두시려고요? 태선가 경영에 꼭 필요한 그 지분들 말이에요. 할머니는 여행 가시느라 경영에 아예 손을 떼셨잖아요. 차라리 저희 아버지께…”

“범준아.”

범준이 선을 넘어 내가 제지하려는데, 순례가 먼저 나섰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너희들에게, 내 자식들에게 모두 공평하게 나눠줄 거야. 이미 채규 실장 통해서 어떻게 나눌지도 얘기 끝냈고.”

범준이 벌떡 일어나고는 흥분해서 말했다.

“이, 이채규 그 사람이 지금 누구하고 일하는지는 알고 하는 말씀이세요?”

“이채규 부회장님.”

그리고 나는 범준의 잘못을 지적했다.

“뭐?”

“이채규 부회장님이라고. 할머니는 몰라도 형이 함부로 말할 사람은 아니야.”

계열이 다르고, 진태의 혈육이 아니라 해도 채규는 이제 태선그룹의 기둥 중 하나인 태선물산의 부회장이다.

그동안의 관계를 떠나서라도 직급상 범준의 한참 위에 있는 것이다.

“아무리 사석이라지만 경솔한 발언은 결국 형만 깎아내릴 뿐이야. 형은 한마디를 뱉더라도 충분히 곱씹을 필요가 있겠어.”

“이….”

범준이 욕지거리를 뱉기 위해 입을 벌렸다가 결국 닫았다.

순례가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애들아. 그만해라.”

“죄송합니다.”

즉시 사과한 나와 달리 범준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더니, 소파에 걸쳐져 있던 자신의 자켓을 들었다.

“할머니가 여행 가신 동안 강빈이, 저놈이 어떤 짓을 하셨는지 알아야 해요. 둘째 큰아버지나, 큰고모가 이 집에서 쫓겨난 게 누구 때문인데요. 그리고 이채규… 부회장님도 저놈 혓바닥에 넘어갔고요. 할머니도 속지 않게 조심하라는 겁니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동만과 정순이 태선가에서 쫓겨난 것도 내 역할이 컸고, 채규도 이제 내 사람이 된 것도 맞았으니까.

말투 때문에 내용이 왜곡되어 보이긴 하지만 억울할 것도 없었다.

순례는 부드럽게, 하지만 단호한 어투로 말했다.

“범준이는 감정을 조금 식히고 다시 찾아오렴. 그럼 어제처럼 할머니가 따뜻한 밥을 해줄게.”

범준이 오늘 처음 순례를 찾아온 것은 아닐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불과 어제도 이곳을 찾아온 모양이었다.

범준은 고개를 살짝 까딱이고는 그대로 집을 나갔다.

범준이 떠나자 순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강아지, 범준이 말은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자기가 받은 상처를 어디에 표출해야 할지 몰라서 그런 거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보다 못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죄송해요.”

“너는 속이 참 깊은 아이구나.”

“할머니를 닮아서 그런가 봐요.”

내 말에 순례는 실웃음을 터트렸다.

“동만이랑 정순이, 네 할애비는 끝까지 말을 안 해주었지만… 남순이한테 다 들었다. 참 못된 짓을 저질렀더구나.”

“고모가요?”

“그래. 애들을 못 본 지 꽤 돼서 직접 찾아간다고 하니 말하더구나. 말하면서 저가 미안하다고 어찌나 울어대는지.”

“... 할머니는 괜찮으십니까?”

동만과 정순이 순례가 낳은 자식들이 아니라 해도, 순례는 모두를 공평하게 아껴주었다고 들었다.

배다른 자식들마저 감싸 안을 순례의 성정에 제 아빠와 조카를 죽이려 했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할미는 괜찮다.”

“....”

“처음에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던 게, 그런 것들이 싫었기 때문이거든. 내 눈에 똑같이 예쁜 아이들이 싸우는 게 싫었고, 네 할애비가 그렇게 만든 것도 싫었단다. 내가 그렇게 말려도 네 할애비 성격에 설득이 되겠니? 다 내려놓고 여행을 떠나기 시작하고는 괜찮아지더구나.”

순례는 마지막 한 마디를 뱉을 때 목소리를 떨었다.

그녀가 벅찬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해 여행을 떠났던 것처럼, 괜찮다는 말도 비슷한 이치가 아닐까.

순례는 태선가에 있기에 너무나도 유약한 사람이었다.

원래의 목적도 순례가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었지만, 그 목표가 더 공고해졌다.

“할머니. 저는 할머니가 여행 떠나는 게 참 좋습니다.”

“응? 범준이랑은 반대되는 말을 하는구나.”

“태선가를 떠나서,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는 사람이 있다는 게 저한테는 위로가 됩니다. 저도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할머니처럼 세계여행을 떠나려고요.”

“후후. 그럼 이 할미가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줘야 되겠구나.”

“미리 알아둘까요? 말씀해주세요.”

“그래. 우선 여행을 떠나기 전에 확인해야 될 거는…”

순례는 오늘 어느 때보다 신이 난 얼굴을 하고서 여행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여권은 분실할 때를 대비해 사본까지 만들어야 된다거나, 공항에 환전소가 있는지 꼭 확인하라는 것, 오지를 갈 때는 수분을 잃지 않는 게 가장 중요하니 물을 넉넉히 챙기라는 것….

그 외에도 티베트를 여행할 때, 인도를 여행할 때, 러시아를 여행할 때 등 나라마다 필요한 것들에 대해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얘기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할 때, 더 절실하게 원하게 된다.

“아가. 내 얘기가 지루하진 않니?”

“전혀요. 너무 재미있습니다. 계속 얘기해주세요.”

“그래. 이제 어느 나라에 대해 얘기를 해줄까….”

“아직 가보지 못했지만 가고 싶은 곳도 얘기해주세요. 지금 당장 떠난다면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이탈리아에 베니스라고, 운하의 도시라고도 불리는 곳이 있단다. 유명한 곳이지만 한 번도 가보질 못했어. 그만큼 세계에는 가볼 만한 곳들이 많거든.”

순례의 시선은 이미 그곳에 가 있는 듯 망연했다.

“그럼 짐 싸세요. 할머니.”

“응?”

“제가 전용기로 모셔다 드릴게요.”

순례가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도록, 나는 열렬히 도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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