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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201화 (201/249)

#201화

정장을 차려입은 범준이 망연히 통유리 밖을 바라봤다.

범준의 앞에는 여자 한 명이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하, 인생 참 고달프다.”

“....”

앞에서 자신을 멕이는 범준의 말에도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여자의 이름은 함초아, GBC방송국의 함규명 국장의 딸이자 범준과 약혼을 한 사이였다.

초아는 이 자리에 나오기 전에 규명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신분 상승의 기회다. 네가 집안을 일으키는 거야.’

초아에겐 그런 거창한 목표 의식 따위 없었지만 아버지의 말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얼굴도 보지 않은 채 약혼을 진행하고, 결혼식까지 잡히고 난 지금에야 범준과 처음 얼굴을 맞대었다.

여전히 자신에게 고개를 돌린 채 궁시렁거리고 있는 범준도 자신에게 관심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너, 이름은 뭐냐?”

심지어 자신의 이름까지 모른다는 사실에 초아는 모멸감에 몸을 떨었다.

“함초아예요....”

“어휴, 이름이 이쁘면 뭐 하냐. 상판이 그 모양인데.”

“...네?”

“내가 누군지는 알지?”

“...태선전자서비스 사장이시라고 들었어요.”

“하!”

범준이 인상을 와락 구기고는 말을 이었다.

“고작 그거 하나로 내가 설명이 돼?”

“그럼 뭐라고…?”

“우리 아버지가 태선전자 주인이고, 곧 회장이 될 텐데, 그럼 나는 뭐겠어?”

“아….”

“쯧. 방송국 나부랭이가 뭐 볼 게 있다고 결혼까지 하라는 건지. 서강빈 그 새끼만 안 나댔어도.”

그 뒤로도 범준은 서강빈 욕과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을 계속 이어갔다.

초아는 당장이라도 범준의 뺨을 날리고 싶었지만, 범준의 말마따나 그의 아버지는 태선그룹의 회장이 될 사람이었다.

치가 떨리는 것을 겨우 참아가며 초아는 범준의 말을 들었다.

그러나 범준의 말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 그리고 집은 두 채로 할 거야. 본관과 별채로. 네가 지낼 곳은 어딘지 알겠지?”

“네?”

“네에? 출신이 천해서 그런가 머리도 잘 안 돌아가? 별관에 지내면서 허튼짓할 생각하지 마. 내가 사는 곳에 기어 올 생각도 하지 말고. 내가 하는 짓에도 간섭할 생각도 하지 마.”

“저기, 범준 씨. 그래도 저희 결혼할 사이인데…”

범준의 휴대폰이 큰 소리로 울리기 시작했다.

“난 이제 가봐야겠다. 네 아버지한테는 알아서 잘 말해. 괜한 소리 안 나오게. 오케이?“

“후….”

“오케이.”

이제 초아도 인상을 찡그리며 불편함을 티 냈지만, 범준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너도 나 같은 놈 만나서 억울하겠지만 어쩌겠냐. 어쨌든 결혼만 하면 너도 태선가 안주인 되는 거야. 더러워도 참고 버텨야지. 응?”

초아는 입술을 깨문 채 범준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범준은 그 모습을 보며 실웃음을 지었다.

그러고는 레스토랑 별실의 문을 열고 휴대폰을 받았다.

“응, 오빠 이제 나가. 어, 거기에 있…”

탁.

별실의 문이 닫히고 통화내용이 중간에 끊겼지만, 어떤 내용일지 초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초아, 자신도 억지로 나온 자리이긴 하지만 이런 식의 푸대접을 받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도대체 재벌기업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하길래 저딴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규명에게 말한다 한들, 태선의 안주인이란 자리에 눈이 뒤집혀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초아는 수첩을 꺼내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방송국을 놀이터처럼 오갔던 그녀이다.

이대로 지옥 같은 결혼생활이 펼쳐지게 둘 생각은 없었다.

초아의 수첩에 아까 범준이 욕하던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편 별실을 나온 범준은 들뜬 마음으로 자신의 스포츠카에 올라탔다.

오늘 만나기로 한 여자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TT가 최근 밀고 있는 여배우였다.

방금 전까지 만났던 초아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미인.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하기 직전에 휴대폰이 울렸다.

범준은 발신자를 확인도 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오빠 이제…”

“나다.”

“아, 아버지!”

범준은 순간 떨어뜨릴 뻔한 휴대폰을 겨우 잡았다.

“너 설마 며느리 혼자 식당에 버려두고 여자 만나러 가는 거 아니지?”

“예, 예. 그럼요. 아버지. 초아한테 전화가 온 줄 알았어요.”

“그래? 하긴 요새 진도가 빠르다고들 하더라. 벌써부터 편하게 부르는 걸 보니 너도 썩 마음에 들었나 보네.”

재만의 말에 범준이 운전대를 꽉 잡았다.

재만은 형식상의 결혼이지만, 규명과 소원하지 않게 순탄한 결혼생활을 하라고 언질했었다.

물론 결혼을 하더라도 초아와는 떨어져 지낼 생각이었지만, 재만 앞에서는 다정한 부부인 양 행세할 계획이었다.

“예. 오늘 처음 만났지만, 사람이 참 착한 것 같습니다.”

“장하다. 범준아. 네가 노력하는 거 알고 있어. 다음 주 주말에 상견례 자리도 잡을 테니 알고 있거라.”

“알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벌써부터 다른 여자 만나고 다니지 마라. 만나려거든 결혼부터 하고 만나. 함국장이 터트린 스캔들 기사만 수십 개는 되는 거 알지? 네 뒤를 캘 일은 없겠지만… 조신하게 다니고 있거라.”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전화를 끊은 범준은 김새는 느낌에 시동을 다시 껐다.

원하지도 않는 결혼은 둘째치더라도, 이제 사생활까지 간섭당하다니,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

한국으로 돌아온 뒤 내가 가장 먼저 찾아간 곳은 남순의 집무실이었다.

미국에서 미혜에게 안부를 전해달라는 말을 듣기도 했고, 남순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포근해지는 것이 있었다.

집무실에 앉아 있는 남순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고모 괜찮으세요?”

“응. 강빈이 왔구나. 노크 소리도 못 들었네.”

남순이 쓴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보니 확실히 일이 있긴 한 모양이었다.

“혹시 백부님께서 또 찾아오신 겁니까?”

“너 귀신이라도 씐 거 아니니? 어떻게 알았어.”

“백화점도 잘 나가고, 다른 업체들도 순항 중인데 고모가 힘들 거리가 있으면 뻔하죠. 이번엔 무슨 궤변을 늘어놓은 겁니까?”

“음… 범준이가 결혼하는 이유?”

그리고 남순은 나에게 범준이 왜 GBC방송국의 국장과 결혼을 하는지 재만이 말한 그대로 설명했다.

요약하자면 GBC방송국의 지분을 탐낸 것이 아니라, 함규명 국장이 언론사에 갖고 있는 힘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에 결혼을 진행했다는 것, 그리고 그게 태선을 지키기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고모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겁니까?”

“믿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니. 설마 지분 때문에 결혼시킨 것도 아닐 테고. 태선을 위해서 그런다는데 아무 말도 못 하겠더라.”

이 사람은 너무 순수해서 탈이다.

사업에 대해서라면 몰라도 집안 문제가 끼어들면 이성이 마비되는 모양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언론 개혁을 외친 건 맞죠. 그에 따른 변화도 당연히 있을 거고요. 그런데 언론과 정부의 대척이 태선에게 손해가 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오히려 양쪽에서 저희의 도움을 받기 위해 유리한 상황이 되겠죠. 전쟁이 나면 가장 이득을 보는 건 승전국이 아니라, 중간에 끼어서 군수 물자 장사를 하는 나라인 것처럼요.”

“...그럼 네 큰아버지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아니겠습니까. 태선을 지키기 위해서다, 이런 대의명분이 있어야 고모가 움직일 거라고 생각한 거죠.”

“음… 네 말도 일리가 있지만 설마 재만 오빠가 그렇게까지 했다는 생각은 안 들어. 그래도 충분히 고민해볼게.”

답답한 마음이 들었지만 여기서 더 따져 말한다면 오히려 반발심을 키울 뿐이다.

어차피 차분하게 이성적으로만 생각해도 누구의 말이 맞는지 알 수 있다.

“그보다 따님 생각은 안 나세요? 저희가 이번에 만났다는 거 들으셨을 텐데.”

“아, 참! 내 정신 좀 봐. 물어본다는 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미혜는 어때 보여? 전화 통화는 하지만 얼굴은 통 못 봤네.”

남편에게 안겨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미혜가 떠올랐다.

나는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었지만, 만약 내게 아내가 생긴다면 나에게 그런 표정을 지어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척…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어요. 아마 꿈같은 일상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요.”

남순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 놓여 있는 미혜의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걱정할 필요 없겠네.”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미국 출장 갈 때마다 들를게요.”

“고마워. 어린 시절 그렇게 치고받더니 이제 다들 커버렸네. 호호.”

미혜는 우리의 과거를 이쁘게 포장했지만, 어른의 시점으로는 많이 다툰 모양이었다.

“아, 참. 준만이한테 들었어. 선물로 섬을 줬다며? 처음에 듣고는 장난인 줄 알았다니까.”

“사진 보실래요?”

“좋지. 한 번 봐봐.”

나는 지갑을 꺼내 안에 있는 사진을 남순에게 보여주었다.

나와 준만이 팔짱을 끼고 가운데 영혜가 있는 사진이었다.

뒤에는 영혜와 준만, 둘이 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대저택이 보였고, 왼쪽에는 타히티의 에메랄드빛 바다가 얼핏 보였다.

“너무 보기 좋네. 어머, 올케는 더 이뻐졌어. 준만이는 태닝하니까 인물이 훨씬 살고. 정말 잘했다 강빈아.”

“고모도 꼭 한 번 놀러 오세요. 손님방도 많아서 고모부랑 미혜 누나 부부 데리고 가도 충분할 거예요.”

“그럼 나야 좋지. 좋아! 다음 달에 휴가 한 번 내지, 뭐. 괜찮지?”

“언제든지 환영입니다. 하하.”

이미 휴가를 가기로 마음먹었는지 남순이 해맑게 웃었다.

“아, 그리고 미혜 누나가 저한테 지분을 양보했어요.”

“응. 들었어. 네가 웃돈까지 얹어서 줬다던데?”

미혜가 갖고 있는 지분은 유통 계열에 몰려 있었다.

태선백화점 지분만 약 7프로에 다른 계열사들까지 합치면 결코 적지 않았다.

나는 주가에 프리미엄을 얹어서 미혜에게 주었고.

나에게 호의를 표시했던 그녀이기 때문에,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보다 내가 걱정했던 것은 남순이었다.

어떻게 보면 그녀의 것을 뺏은 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고모는 괜찮으세요? 원래 제가 갖고 있던 유통 계열 지분에 미혜 누나가 저한테 준 지분을 합치고 주주총회를 열면 고모의 경영권을 흔들 수도 있어요.”

“그럼 내 능력 부족인데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나는 미혜의 결정을 존중해. 내가 볼 때 누구보다 현명한 아이거든.”

남순은 일말의 의심도 품고 있지 않은 듯했다.

물론 나도 미혜의 지분으로 남순의 자릴 뺏을 생각도 없었고.

남순에게는 고마운 일이 참 많았다.

“고모 자리는 제가 지켜줄게요.”

“그래? 말만으로 든든하네.”

태선의 모든 계열사를 내가 갖게 될 때, 태선백화점의 자리는 남순을 위해 남겨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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