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전생에서 증권가에는 전설이 된 인물이 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큰돈을 벌었던 헤지펀드 매니저 아담 무이스.
그는 240억 달러 규모의 헤지펀드를 운용하며 주택시장의 버블이 꺼질 것을 예측했다.
서브프라임 대출담보 증권의 하락에 베팅한 것이다.
그가 다니던 펀드에 한 해 만에 160억 달러의 수익을 안겼고, 무이스는 17억 달러, 한화 약 2조 원의 프리미엄을 받으며 은퇴한다.
그리고 나는 그보다 더 많은 수익을 벌어들이기로 결정했다.
우선 준희와 에릭에게 지시해 골드만삭스, 모건스탠리, 뱅크오브아메리카와 같은 거대은행부터 시작해 미국 전역의 은행들에 신용파산스왑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국제금융위기가 닥쳤을 때 지급불능 상태가 되지 않은 은행들에 한해서였다.
늘 성공만 해온 GB인베스트먼트가 투자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느낀 은행들도 있고, 실제로 계약 거부까지 한 곳도 있었다.
그래도 앞서 언급한 세 거대은행부터 시작해 대부분의 은행들은 부동산 특수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계약을 받아들였다.
이로써 미국에서 하고자 했던 일들은 모두 성황리에 마쳤다.
그리고 내가 향한 곳은 타히티섬이었다.
돈을 쏟아붓자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대저택 지어졌기 때문이다.
타히티의 중심도시인 파페에테에 도착한 뒤, 내가 매입한 무인도까지 다시 헬기를 타고 이동했다.
헬기 아래로 보이는 타히티 섬의 풍경은 최고의 지상낙원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았다.
수많은 산호초들로 인해 바다는 에메랄드빛으로 빛났고, 육지는 녹색 나무로 뒤덮여 있었다.
타히티 최고의 여행지라는 보라보라섬을 지나고 얼마 안 있어 내가 매입한 섬이 보이기 시작했다.
황실장에게 듣기로 무인도의 이름은 ‘포에라바’로 타히티어로 검은 진주를 뜻한다고 했다.
예전에 검은 진주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라던가.
현지 건설사에 의뢰해 지은 대저택이 먼저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 헬기 착륙장이 나타났다.
헬기가 착륙하자 준만과 영혜가 미리 마중 나와 있었다.
준만은 하와이안 셔츠에 반바지를 입고 있었고, 영혜는 반팔에 멜빵바지를 입고 있었다.
“강빈아!”
헬기가 내는 굉음 사이로 준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싱긋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태닝을 했는지, 피부색이 훨씬 어두웠다.
“다들 잘 지내고 계셨나 보네요.”
준만이 영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래. 지상낙원이 따로 없더라.”
“이이가 제일 신났어. 피부 태우자고 한 것도 네 아버지가 제안한 거라니까?”
“하하. 은근 어울리세요. 두 분 다.”
준만이 턱짓으로 옆에 있는 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타라. 내가 수준급 운전을 보여줄게.”
바퀴가 두껍고 큰 오프로드용 차였다.
아무래도 나름 길을 다져놓긴 했어도, 비포장도로다 보니 오프로드용 차가 필요했다.
“저택이 바로 옆에 있는데 어디에 가길래 차를 타는 겁니까?”
“태선레저도 네 계열사 아니냐? 레저 몰라, 레저?”
“오프로드에는 취미 없습니다만….”
“신세계를 보여주마. 타라.”
준만이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자 어쩔 수 없이 차에 탔다.
한 번도 오프로드용 차를 탄 적은 없었지만 별일이야 있겠는가.
10분이 지난 뒤 나는 올라오는 구역질을 겨우 참으며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동산을 타고 올라가는 차는 엄청나게 덜컹거리고 있었다.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나를 보며 준만과 영혜는 웃고 있었다.
“어머, 강빈이가 멀미에 약한 타입이었구나.”
“그러게. 흐흐. 저 녀석이 약할 때도 있었어.”
“아버지, 윽, 어머니…. 윽, 괜찮으십니까?”
나도 가끔 멀미를 느낄 때가 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심했다.
세상이 흔들리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였으니까.
“엄마는 너무 재밌는데? 네 아빠 운전 너무 잘하지 않니?”
“그럼그럼. 내가 이쪽으로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지.”
“....”
그렇게 한참을 돌아다니고 나서야 차는 저택에 도착했다.
“우윽….”
“괜찮니…?”
“이제 와서요?”
영혜가 짓궂게 웃으며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준만이 내 옆에 스윽 오더니 말했다.
“다음은 저거다.”
준만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타히티 주민으로 보이는 사람이 말을 끌고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뭡니까, 저건?”
“말이지, 뭐긴 뭐냐. 말 타고 시원하게 고원을 가로지를 거다. 오프로드보다 좋아하는 거니 기대해도 좋아. 승마 먼저 하고 서핑도 알려줄게. 아, 처음엔 어려워도 금방 탈 수 있을 게다. 좋은 선생을 고용했거든.”
“....”
준만이 내 등을 팡팡 치고는 손을 잡고 끌고 갔다.
말을 타고 포에라바의 고원을 달렸다.
승마용 헬멧에 눌려 머리가 엉망이 되었고, 안장에 닿는 근육이 고통을 호소했다.
그 모습을 보며 영혜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대며 웃었다.
말을 탄 뒤에는 바다로 나가 서핑을 했다.
처음에는 보드 위에 서 있는 것조차 힘들었지만, 강사의 도움을 받아 아주 잠깐은 서 있는 상태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 뒤에는 타히티의 전통적인 카누를 타고 바다를 누볐고, 모래사장에 놓인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잤다.
잠에서 깼을 때는 석양이 질 무렵이었다.
언제 준비된 건지, 선베드 옆에는 바베큐 장비가 설치되어 있었다.
요리사 복장을 한 사내가 장작에 불을 지피고 있었고, 준만과 영혜는 캠핑용 의자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선베드에서 일어나 그들에게 다가갔다.
준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말했다.
“코까지 골며 자더구나.”
“예… 정신없는 하루였거든요.”
“그래도 재밌지 않았냐?”
“....”
당시에는 모르고 있었지만, 나는 오늘 했던 모든 레저 활동을 진심으로 즐겼다.
녹초가 될 때까지 몸을 움직였고, 낮잠을 잔 것도 대체 얼마 만인 건지 모르겠다.
내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예. 재밌었습니다.”
준만이 피식 웃으며 영혜를 가볍게 툭 치고 말했다.
“이거 봐. 내가 강빈이도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으휴, 남자들은 커서도 애라더니 똑같네, 똑같아.”
두 사람이 아웅다웅 다투는 게 보기 좋았다.
나는 접혀 있는 캠핑용 의자를 펴고는 그들 앞에 앉았다.
“아버지 빠르게 은퇴하시고 후회하면 어쩌나 고민했는데 그럴 필요도 없었네요.”
“그럼. 이제 앞으로 쭉 휴가 보내는데 후회할 턱이 있겠냐.”
준만이 어린아이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내가 걱정할까 싶어 과장되게 행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도 고마워요.”
준만과 영혜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만이 말했다.
“이 섬은 우리를 위해서 네가 준비한 거지만, 너의 휴양지도 되었으면 좋겠다. 힘들면 언제든지 같이 오자.”
“예. 아버지.”
이제 준만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때, 요리사가 그릴 위에 고기를 올렸다.
불이 한 번 거세지고는 연기와 함께 숯불 향이 퍼졌다.
원래 오늘 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조금은 더 쉬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저번 주주총회 이후에 재만은 하루도 마음 편히 숙면하지 못했다.
어찌 된 영문인지 자신을 지지하기로 했던 임원들 중 몇몇이 강빈을 지지했고, 강빈은 공격적으로 지분들을 매수하기 시작했다.
재만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판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후….”
한숨을 내쉰 재만의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은 남순이었다.
남순은 피곤한 듯 눈을 비비다가 말했다.
“무슨 일로 온 거야?”
“일이 있어야 너를 보러 오는 건 아니야.”
“그러지 않은 적이 없어서 그렇지.”
가족이라면 누구든 반겼던 남순이었지만, 근 1년 동안 재만이 찾아온 이유는 하나였다.
자신에게 우호 지분이 되어달라는 것.
처음엔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니 지친 것이다.
“누누이 말했듯 나는 아직 어느 한 편에 설 생각 없어. 솔직히 관심도 없고 욕심도 없다는 거 잘 알잖아. 나는 내가 가진 걸로 충분히 만족해.”
“오늘은 다른 얘기를 하러 왔어.”
“다른 일?”
“그래. 범준이 결혼 날짜 잡혔다.
“... 오빠.”
주주총회 이전에 범준과 GBC방송국장의 딸이 약혼했다는 건 이미 태선가에서 저명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결혼의 목적이 GBC방송국이 갖고 있는 태선그룹 지분이라는 것도.
“범준이는 그 결혼 원해?”
재만이 고개를 끄덕이곤 말했다.
“범준이도 태선그룹에 진심이다. GBC방송국이 갖고 있는 지분 때문이 아니더라도 얼마나 태선을 위했는지 너도 알잖아.”
“아버지가 광고를 몇 개를 던져줬는데 당연한 거지. 그리고 호의 표시를 하는데 자식을 내준다고?”
“GBC가 아니더라도 함규명 국장이 방송계에서 얼마나 입지가 단단한지 알잖아. 아버지가 만들어준 권력이긴 하지만, 앞으로도 태선그룹 이미지 관리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다.”
남순이 어울리지 않게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빠. 어른들 일은 어른들끼리 해결해야지. 아버지 돌아가셨다 해서 언론이 우리한테 등 돌릴 것도 아니고 뭐가 그리 급해?”
“남순아. 그러니까 네가 철이 없다는 거다.”
재만이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지금 정권 잡은 노무현이 의원 시절 그렇게 언론개혁 외쳤던 거 기억 안 나냐? 언론은 흔들릴 거고 지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포섭해야 될 거다. 그리고 나는 그중 가장 확실한 방법을 선택한 거고.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언제 언론이 우리에게 칼 꽂을지 모르는 거야.”
노무현 정부의 언론 조정 신청 건수가 벌써 200건을 넘어섰다.
여타 어느 정권과 비교하더라도 이례적인 수치였다.
“언론을 잡는 게 여론을 잡는다. 나는 확실한 방법을 선택했을 뿐이야. 그게 내 자식이라 할지라도 나는 태선을 위해서라면 더한 것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태선그룹의 임원들은 이런 내 결정을 존중해줄 의무가 있어. 너도 마찬가지고.”
재만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남순에게 고개를 가까이 대며 말을 이었다.
“절대 네 태선백화점을 욕심내지 않을 거다. 그저 네가 나를 지지한다고, 그 한마디가 필요할 뿐이야. 그리고 나는 무엇보다 태선을 지키기 위해서 내 힘을 다할 거야. 강빈이는, 그 애송이가 태선을 위해서 한 게 뭐가 있지? 네 말대로 어른들 싸움이 되려면 강빈이가 아니라 준만이가 나섰어야 됐다. 과연 누가 태선을 위해 필요한 사람인지, 진심으로 고민해봐.”
재만은 GBC가 갖고 있는 지분 때문에 범준을 결혼시키는 것이 아니라, 태선을 위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재만이 나가고 남순은 제 머리를 감싼 채 깊은 고민에 잠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