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남순의 딸 홍미혜는 재작년, 코네티컷주에 있는 예일대 경영대학원 박사 과정을 끝낸 뒤 곧장 결혼을 한 뒤 아직까지 신혼생활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미혜는 지금 캘리포니아주에 속하면서 로스앤젤레스에 둘러싸인 베벌리힐스에서 지내고 있다.
베벌리힐스는 미국에서 손꼽히는 고급 주택가로, 대저택들이 늘어선 곳이다.
할리우드와도 맞닿아 있어 미국의 유명 연예인들도 많이 사는 곳으로 알고 있다.
백화점과 명품관들도 있어서 호화 관광지로도 유명하다.
구글에서의 미팅이 끝나고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하자 도시 저편에서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도착한 것이다.
삭막한 공항 앞에는 화려한 로스앤젤레스의 풍경이 빛을 내고 있었다.
실리콘밸리에 도착하고 먼저 출발한 영균은 그새 차를 빌려와 공항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이라 해도 영균의 덩치가 크다 보니 사람들이 힐끔거리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묵직하게 고개를 숙이는 영균을 보며 나도 살짝 고개를 까닥였다.
“고생했어. 저녁은?”
“기다리는 동안 공항 식당에서 해결했습니다. 부회장님께선 식사하셨습니까?”
“호텔에서 해결하지. 비행기를 하루에 두 번 탔더니 속이 안 좋네.”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호텔로 모시겠습니다.”
영균이 열어준 문으로 들어가고 준희는 얼른 반대편으로 뛰어가 차에 탔다.
포시즌호텔로 가는 길은 흔들리는 야자수가 즐비한 도로였다.
멍하니 스쳐 가는 거리를 보고 있는데 준희가 말을 걸었다.
“그분은 태선가시면서 왜 한국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까요?”
“미혜 누나는 지친 것 같아. 끊임없이 평가받고 경쟁하는 게.”
“의외네요. 왠지 태선가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대단하고 자리를 이어받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거든요. 대표님밖에 뵌 적이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요.”
“다 똑같은 사람인 거지.”
범준처럼 승계를 위해 사람까지 죽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미혜처럼 이 경쟁에 지쳐 쉬고 싶은 사람도 있는 것이다.
미혜는 원래 태선백화점의 후계자로서, 경영 능력을 키우기 위해 예일대 경영대학원까지 진학했다.
유학생활이 길어져서일까, 미혜는 대학 생활 중 만났던 밴드 가수와 결혼하고 남순의 뒤를 잇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
미혜가 독녀라고는 해도, 남순의 성격상 흔쾌히 수락한 모양이고.
전생에서도 별반 다를 것 없었는지, 미혜에 대해선 아는 정보가 없었다.
호텔에 도착하자 어느새 해가 지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지나온 로스앤젤레스의 화려한 거리와 달리 호텔은 적막한 곳에 위치했다.
체크인을 하고 VIP들만 머문다는 최상층에 도착했다.
객실에 들어가기 전에 준희가 말했다.
“대표님 덕분에 이런 호사도 누리네요. 마카오 갔을 때도 생각나구요.”
“그래. 앞으로도 호사란 호사는 다 누리게 해줄게.”
“하하. 충성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피곤하실 텐데 들어가서 쉬세요.”
“맞다, 내일은 같이 움직일 필요 없어. 어차피 미혜 누나만 보고 돌아갈 거고, 너도 이제 바쁠 텐데, 푹 쉬어야지.”
“앗, 그래도 되겠습니까?”
“응. 미팅은 모레부터 잡혀 있다고 했지?”
“넵. 호프뱅크랑 잡혀 있습니다. 그다음 날은 PCB랑 잡혀 있구요.”
준희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따로 할 일이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은행들을 상대로 CDS(credit dejault swap), 신용파산스왑을 체결하는 것이다.
쉽게 설명해 기업이 부도가 난다는 것에 배팅하는 것인데, 나는 미국 주택시장의 붕괴를 대상으로 계약을 진행할 생각이었다.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미국의 자본 규모가 큰 은행들을 상대로 최대한 많이 진행할 생각이었다.
에릭은 이미 뉴욕 증권가로 출장을 간 상태였다.
“그럼 너도 푹 쉬어라. 시애틀에서 보자.”
“네. 좋은 밤 되세요.”
준희를 먼저 방으로 보내고 바로 옆에 있는 내가 머물 객실에 들어왔다.
VIP실에는 객실마다 개인 루프탑이 있었는데, 저 멀리 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아까 준희에게 말했던 것을 되새김질했다.
미혜 누나는 지친 것 같아. 끊임없이 평가받고 경쟁하는 게.
나는 지금껏 태선을 거머쥐기 위해 한시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한때는 범준에 대한 복수심으로, 지금은 진태의 뜻을 잇기 위해, 그리고 태선을 갖는 게 내 목표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고 아득하게만 보였던 그 목표는 어느새 내 눈앞에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나는 지치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
영균이 모는 차를 타고 베벌리힐스에 도착했다.
미혜의 신혼집 입구에 도착하자 경비원 중 한 명이 나타나 신원을 물었다.
나는 차창을 살짝 내리고 말했다.
“오늘 만나기로 한 서강빈입니다.”
“네.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그럼 좋은 하루 되십시오.”
경비원은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입구를 개방했다.
오솔길을 따라 아주 잠깐 올라가니 마치 귀족이 사는 성처럼 생긴 중세풍의 대저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택 앞에 널따란 잔디밭에는 캠핑도구와 벤치가 있었고, 곳곳에 가로등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혜는 벤치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포근해 보이는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잠옷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녀에게 다가갔다.
“누나.”
“강빈아!”
미혜가 일어나 나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내 기억에는 없는 일이지만, 원래 서강빈과 미혜는 어릴 때부터 자주 어울려 놀았다고 한다.
아마 집안에서 배척받는 준만이었지만, 남순이 안쓰럽게 여겨 교류를 했던 것 같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하하. 애 좀 봐. 저번에도 그러더니 말은 갑자기 왜 높이고 그래? 누나랑 선 긋는 거야?”
하긴, 서강빈 성격에 어렸을 때부터 동고동락한 누나에게 말을 높였을 것 같진 않다.
“그럼 편하게 할게.”
“응응. 그보다 연락받고 너무 반갑더라. 나 미국 가고는 개인적으로 본 일이 아예 없었잖아. 새해 조찬 때도 나는 가지 않았고.”
“그러게. 미국에 회사가 있는데도 너무 바빴어.”
“맞아. 너 뉴스에도 나오더라? 내가 남편이랑 뉴스보다가 네 얼굴 나온 거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하하. 그랬어?”
미국 언론사에서 인터뷰 외에도 몇 번이나 나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었다.
나는 별로 관심이 없어서 보지 않았지만.
우리는 벤치에 앉아 근황을 나누기 시작했다.
“결혼식 때 청첩장은 왜 안 준 거야? 아무리 바빠도 누나 결혼식이면 꼭 왔을 텐데.”
“어머, 내가 말을 안 했나? 양가 부모님만 모시고 여기서 조촐하게 했어. 결혼식이라고 하기도 애매하긴 하지만.”
“할아버지 성격에 성대하게 해줬을 것 같은데 굳이?”
“그러니까 문제인 거지. 조용하게 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결혼한다고 온갖 정재계 인사들 다 몰려들 거 아니야. 당연히 기사에도 실릴 거고. 이제 그런 건 질색이야.”
미혜는 상상만으로도 질색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하긴. 이런 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면 정말 행복하겠다.”
“응. 최고지.”
“매형은 어떤 사람이야?”
미혜가 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엄청 자유로운 사람. 그 사람이 아니었으면 이제 한국 돌아가서 백화점 일 배우고 있을걸. 내가 많이 배웠지.”
“누나 표정 보니까 좋은 사람이라는 건 확실해 보인다.”
“응. 내 인생에서 지금이 가장 행복해.”
“지금은 어디 가셨어?”
“공연! 금요일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공연을 해. 나도 그때마다 꼭 가는데, 오늘은 너 온다고 패스했지.”
“내가 방해한 건 아니지?”
“전혀. 너랑 이렇게 시간 보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우리 어릴 때 놀이동산 하나를 대관해서 놀았던 거 기억나? 영빈이는 무섭다고 안 타던 롤러코스터를 우리 둘이 주구장창 탔잖아. 그리고…”
미혜는 내가 살지 않았던 유년 시절에 대해 얘기했다.
놀이동산 대여부터 시작해 진태 명의의 무인도에 별장을 지어 아지트라고 부르기도 하는 등 역시 태선가답게 일반적인 애들 놀이와는 스케일이 달랐다.
미혜와 얘기하는 것은 즐거웠다.
늘 치열하게 살아왔던 나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미혜의 얘기는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재밌었다.
미혜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온 목적도 잊을 만큼 우리는 많은 얘기를 나눴다.
그렇게 한참을 얘기하는 동안 주변은 오렌지색으로 물들고 있었다.
“강빈아.”
“응?”
“어머니한테 얘기 들었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회장 자리가 비어 있다고. 그리고 유력한 후보 중 한 명이 너라고 말이야.”
미혜가 먼저 얘기를 꺼내자 오히려 내가 당황스러웠다.
미혜는 보조개가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아직 고민이 많은 것 같지만, 나는 네 힘이 되고 싶어.”
“누나….”
“알다시피 나는 형제자매가 없잖아. 그래서 어릴 때 같이 놀았던 너랑 영빈이가 내 친동생 같고 그래.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받은 내 지분. 네가 써줄래?”
내가 이곳을 찾아올 때부터 미혜는 내 목적을 알고 있던 것이다.
서강빈이 머리 굵고 나서는 사고 치기 바빴지만, 어릴 때는 꽤 이쁜 짓을 하던 놈 같고.
한 번도 고마운 적 없었던 ‘서강빈’에게 문득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응. 내가 쓸게.”
“후아.”
미혜는 상쾌하다는 듯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잘됐다. 이제 큰외삼촌이나 범준 오빠한테 연락 올 일도 없을 거 아니야.”
“응? 백부님이랑 범준이 형이 그동안 연락했어?”
“응.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로 미치기 직전이었다니까.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도 사업하는 사람이 뭐가 이쁘다고 내 지분을 주겠니? 범준 오빠는… 이유는 모르겠는데 왠지 모르게 싫단 말이지.”
장례식장에서 불쾌감을 느낀 것은 나 뿐만이 아니었다.
미혜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걸어갔다.
지금 보니, 신발도 신지 않은 채 맨발이었다.
미혜는 그렇게 하늘하늘 걸어가다가 고개만 돌려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가볍게 결정한 건 아니다? 네가 그동안 어머니 사업 도와주고, 기부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는 거 들었어. 나는 너 같은 사람이 태선을 이끌어야 된다고 생각해. 뭐, 작은 지분 주면서 생색내는 것 같지만 말이야.”
“전혀 작지 않아.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미혜는 말없이 입꼬리를 늘어뜨리며 웃었다.
남순이 저 나이 때 꼭 저런 모습이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하던 일 멈추고 달려갈게.”
“됐네요. 누나가 괜히 누나겠니? 그리고 나는 아무 문제 없이 늘 잘살고 있을 거야. 너도 쉬고 싶을 땐 언제라도 찾아와. 어? 허니!”
영화에 나올 것 같이 생긴 백인 남자 한 명이 마당 앞에 꽃다발을 든 채 서 있었다.
미혜는 맨발로 빠르게 달려가 그에게 안겼다.
태선가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미혜가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