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화
시간이 순탄하게 흘러가고 2005년이 되었다.
태선그룹 주주총회 이후 지분 매수와 투자는 꾸준히 진행 중에 있었다.
준만이 갖고 있던 비리 장부는 채규에게 넘어갔고, 이제 내 지지율은 재만을 넘어섰을 것이다.
지금 주주총회를 다시 연다면 내가 회장에 오르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지율을 위해 범준까지 결혼시킨 재만이 어떤 일을 벌일지도 몰랐고, 아직도 재만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이 남아있다.
회장에 취임한다 한들, 나를 반발하는 세력이 크다면 반쪽짜리나 다름없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재만의 지분과 세력을 대부분 내 쪽으로 돌리고 나면, 그때 나는 태선그룹의 회장 자리에 오를 것이다.
구글은 작년, 나스닥에 상장한 이후 고공행진하고 있었다.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구글의 수익지분 20프로에 약속했던 추가 투자를 통해 나는 구글의 지분 약 22프로를 가진 최대 주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는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하는 시기를 앞당길 계획이었다.
처음엔 따로 유튜브를 인수할까 고민했지만, 구글이 만든 비즈니스 모델이 유튜브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포기했다.
결국 유튜브가 거액의 수익을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구글의 애드센스와 연동하는 시스템이 크기 때문이다.
새해 첫 업무로 디지털사운드의 조상민 대표를 호출했다.
몇 년 전 내가 매도했다가 다시 매수한 애플은 아이팟을 출시하며 기업가치를 올리고 있는 반면, 디지털사운드가 만든 MP3의 매출은 연일 하락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상민이 얼마나 MP3에 애착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에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상민이 들어왔다.
최근 고민이 많은지 얼굴이 어두웠다.
“왜 그리 풀이 죽어 계십니까.”
“부회장님을 볼 낯이 없습니다. 경영까지 저에게 맡겨 주셨는데… 죄송합니다.”
“그게 대표님 잘못은 아니지 않습니까. 우선 앉으시죠.”
자리에 앉을 때, 마침 황실장이 따뜻한 차를 내왔다.
상민은 목이 타는지 차를 먼저 마시고는 입을 열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저도 디지털사운드가 현재 어떤 상황인지는 얼추 알고 있습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상민은 고개를 숙였다.
머리를 위로 반듯이 올렸기 때문에 우울한 표정이 그대로 노출되었다.
허벅지에 두 손을 올려놓고,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그동안 개발에 아낌없이 투자를 해왔고, 그럴 생각입니다만… 2001년부터 아이팟이 새롭게 출시될 때마다 매출이 급감했습니다. 작년 7월에 출시된 아이팟은 가히 혁신적이더군요.”
작년에 새롭게 출시된 아이팟은 40GB의 용량으로 출시되었으며, 배터리 수명도 음악 재생 기준으로 12시간이나 되었다.
상민은 말하지 않았지만, 작년 1월에 출시되었던 아이팟 미니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어 디지털사운드의 MP3는 진작에 입지를 잃고 있었다.
아이팟 미니는 가격 대비 용량이 심하게 떨어졌지만, 귀여운 디자인 덕분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성능뿐만 아니라, 어떤 제품이 잘 팔릴지 애플은 알고 있는 것이다.
상민이 여전히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차라리 제품개발에 투자를 멈추고 외관만 살짝 바꿔서 출시하는 방향으로 갈까 합니다. 매출은 계속 떨어지겠지만….”
“순익은 나겠죠. 그게 대표님이 원하는 방향입니까?”
“원하든, 원치 않든 해야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직원들 월급까지 다 챙겨 주면 겨우 적자를 면하는 상태여서요. 작년에 팔지 못한 MP3가 창고에 가득 쌓여 있습니다.”
상민이 제안한 방법으로 간다면 MP3는 조금 더 오래 살아남겠지만, 이래서야 예전과 같은 수익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리고 MP3를 최초로 만들어내고, 꾸준히 성능 향상을 해 온 디지털사운드의 개발 능력을 썩히기는 아까웠다.
“저번에 동영상 재생과 관련해서 논의 중이라고 하셨던 건 어떻게 됐습니까?”
“지금은 음질 개선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미루고 있습니다.”
“시간과 투자만 있다면 가능하다는 말이겠지요?”
“예. MP3가 원래 동영상 규격인 MPEG에서 따온 말이니까요.”
동영상 관련 얘기가 나오자 상민은 자신감이 붙었는지, 고개를 슬쩍 올려 나를 봤다.
“대표님. 지금 하고 계신 음질 개선만 끝나고 플레이어에서 영상 재생이 가능하게 만드는 것에 집중하세요.”
“그러려면 투자금이…”
“제가 부족하지 않게 아낌없이 지원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만간 협력 업체 하나를 소개해드리겠습니다.”
“그래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겠습니다.”
다시 기술개발에 매진할 수 있는 게 좋은지, 상민은 이제 고개까지 내가 있는 방향으로 내밀고 있었다.
“그보다 어떤 업체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대표님도 아시는 기업일 겁니다. 올해 한국에도 진출하기로 결정한 구글이 대표님과 협력할 업체입니다.”
“구, 구글이 저희랑요? 거기에 저희 광고라도 띄워주시는 겁니까?”
상민이 의문을 표하는 것이 이해 갔다.
지금은 포털 사이트에 불과한 구글과 음악 재생 플레이어인 MP3는 동떨어져 보이니까.
그러나 내년에 구글이 유튜브를 인수하고, 영상 쪽에 투자를 하게 되면서 전혀 다른 양상이 펼쳐질 것이다.
“구글이 곧 비디오 플랫폼을 인수할 겁니다. 저는 동영상을 다운 받을 수 있게 만들고 그 파일을 디지털사운드 기기에서 재생할 수 있으면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예. 오늘까지 진행했던 개발을 전면 중단하고 영상 재생으로 초점을 맞춘다면, 이번 분기 안에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습니다.”
영상재생플레이어, 즉 PMP(Portable media player) 기능을 하는 기기는 지금도 있긴 했다.
화질이 볼품없긴 했지만 게임파크에서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인 GP32에 특정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면 동영상을 재생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작년 말에 소니에서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 PSP는 4.3인치의 와이드 LCD를 탑재해 영화 감상에도 무리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소형 기기를 쓰면서, 유튜브의 가벼운 영상들이나 뮤직비디오를 보는데 최적화된 기기였다.
아이팟도 올해 출시하긴 하겠지만, 이번에도 최초의 타이틀은 디지털사운드가 가져갈 것이다.
작은 화면이지만, 그 간소함에 끌리는 사람이 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름도 바꾸시죠. MP3에서 MP4로. 전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보여주자고요.”
“그거 좋은 아이디어 같은데요? 오늘부터 당장 밤샘 연구에 들어가겠습니다.”
상민은 해낼 수 있다는 열의를 내비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시애틀로 향할 전용기에 몸을 실었다.
상민과의 일이 아니어도 미국 출장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페이팔 직원이었던 채드가 유튜브 사이트를 만들기까지 한 달밖에 남지 않았고, 투자 중인 회사들과 GB인베스트먼트의 직원들을 격려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한국에서 정신없는 일상을 보낼 때, GB인베스트먼트는 꾸준히 수익을 내고 있었다.
운용금액이 점점 늘어감에 따라, 수익률이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벌어들이는 돈이 태선전자 전체 매출과 비슷할 정도였다.
게다가 중국의 3대 IT기업들은 앞으로 엄청난 성장세를 이어갈 테니, 그 수익까지 생각한다면 태선그룹 전체와 비견될 것이다.
투자야 앞으로도 꾸준히 하겠지만, 돈은 이제 차고 넘치는 것이다.
출국장을 나오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에릭은 귀여운 인상을 만들어주던 젖살이 사라져서 이전의 앳된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준희는 곱슬머리가 더 부풀어있어 진석을 생각나게 했다.
“다들 많이 바뀌었네. 특히 에릭 너는 이제 학생이냐는 소리는 안 듣겠다.”
내 말에 에릭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제 삼십 줄이니까요.”
“네 국적은 미국이니까 만 나이로 쳐야지.”
“하하. 마음은 늘 한국에 있습니다.”
옆에 서 있는 준희의 폭탄 머리를 보니 한번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준희는 머리가 왜 더 부풀었어?”
“제가 요새 밥 로스한테 꽂혔거든요. 증권가의 개성이라고 해두죠.”
“... 그래.”
일만 잘한다면 행색이야 무슨 상관이겠는가.
에릭에게 듣기로 준희가 성사시킨 거래도 꽤 많았다.
차를 타고 GB인베스트로 향했다.
시애틀의 거리도 10년 전에 비해 많이 바뀌었다.
시애틀을 상징하는 스페이스 니들 타워 주변으로 고층 건물들이 들어섰고, 확장된 도로 사이로 많은 차들이 오갔다.
“그보다 대표님이 친히 미국에 오신 이유. 이제 말씀해주시죠.”
에릭이 내 쪽으로 몸을 바짝 붙이며 말했다.
앞 좌석에 타고 있던 준희도 힐끔거리고 있었다.
“너희 보러 왔다고 하면 믿을래?”
“...차라리 투자할 곳이 있어서 왔다고 하시죠. 한국에서 제일 바쁘신 거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이제 얼추 정리돼서 그렇게 바쁘진 않아.”
태선호텔은 진석이, 태선물산은 채규가, 태선금융은 기현이 문제없이 경영하고 있었다.
워낙 실력자들이라 그런지,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잘 나아갔다.
거기에 GB인베스트먼트의 한국 지사까지 생기면서 투자 관련 업무도 많이 해소되어 이제야 숨통이 트이고 있었다.
괜히 시간을 내서 미국에 온 것이 아니었다.
“만나야 될 사람이 있어.”
“흐음. 대표님이 직접 미국에 올 정도라면 누구신지 참 궁금하네요.”
“태선가 사람이야.”
“미국에 태선가 사람이 있다고요? 다 한국에 있는 줄 알았는데요.”
“나도 얼굴 본 건 별로 안 돼. 어릴 때 미국에 유학 가서 지금은 결혼까지 하고 조용히 살고 있거든. 언론에도 노출된 적 없고.”
“좋은 기회네요.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그래.”
대화를 하는 사이 GB인베스트먼트에 도착했다.
직원들의 환대를 받으며 최상층으로 올라가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에밀리, 비앙카. 오랜만이야.”
“대표님! 보고 싶었어요.”
“별일은 없으시죠?”
에밀리와 비앙카가 엘리베이터 앞에서 나를 반겼다.
“그래. 한국에서 너희들 활약 들었어. 고생 많았다.”
내 말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에밀리와 비앙카를 다시 사무실로 보내고 나는 에릭, 준희와 함께 대표실에 들어갔다.
준희가 들어오고 나서 에릭은 준희에게 자신의 방을 내어주고, 자신은 내가 쓰던 대표실을 쓰고 있었다.
안에는 에릭이 했던 인터뷰 기사들이 마치 상패처럼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자의식 과잉이군….”
“네?”
“아니야.”
내가 골랐던 검은색 가죽 소파 위에는 푸른 천이 덧씌워져 있었다.
아마 제 취향으로 나름의 인테리어를 한 모양이다.
자리에 앉아 에릭과 준희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GB인베스트먼트의 본사를 한국으로 옮기려고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