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채규의 폭탄 같은 선언이 이어지고 연회실은 잠깐의 쉬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지분을 획득한 것은 둘째치고, 재만의 지지 지분이 너무 적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준만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잠시만.”
준만이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을 잠시 내 테이블로 가라고 지시했다.
건설, 중공업, 중화학의 사장들이 내 테이블로 자리를 옮기자 준만이 의자를 내 쪽으로 바짝 붙이며 말했다.
“네 할아버지가 내게 준 것이 있다.”
진태가 준만에게 준 것?
“숨겨둔 지분이라도 있던 겁니까?”
“아니. 아버지가 지시하고, 입수했던 모든 비리가 적혀 있는 장부. 그걸 내게 넘겼어.”
순간 나도 모르게 벙찐 표정을 짓고 준만을 바라봤다.
거울이 있었다면 내가 지은 표정 중 가장 멍청한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걸 왜 아버지께 넘긴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진태가 준만에게 비리 장부를 넘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이루고자 할 때 네게 힘이 되라고 나에게 남겼다.”
“....”
“아버지가 말씀하신 건 아니지만, 아마 초라한 아버지가 되지 말라는 이유였을 거다. 자식에게 도움만 받는 아버지라니. 네 할아버지는 두 눈을 감아서도 그 모습은 보기 싫었던 거겠지.”
“그런 이유로 이런 걸 아버지께 넘겼을 리 없습니다.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믿었던 겁니다.”
아무리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때라지만, 진태가 고작 감정에 기울어 일을 처리했을 리가 없다.
비리 장부를 이용하는데, 나보다도 준만이 더 적임자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장부를 이용해서 뭘 어떻게 했길래 이만큼이나 지분을 따라잡을 수 있던 겁니까?”
“장부 속에 적혀 있는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우선적으로 만난 사람들이 네 백부 편에 있던 사람들이었지. 태선 전기 박노열 사장, 태선 재단 조승환 이사장, 태선 중공업 문양기 부사장….”
“아니, 저희 중공업 사람이 저 편에 붙었었습니까?”
“그래. 실장님 정보라인 아니었다면 나도 몰랐을 거다.”
준만의 말에 자연스레 채규를 찾게 되었다.
재만이 분에 못 이겨 강단에 올라갔는지, 구석에서 채규와 재만이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태선경연 해체에 대해서인지, 예상치 못한 나의 지분에 대해서 물어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재만이 원하는 대로 주주총회가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나랑 실장님은 오늘 회장 선출 자체를 막으려고 한다.”
“예….”
어찌 된 건지 평소와 다른 양상이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준비된 것 없이 포기하려 했고, 준만은 그런 나를 붙잡고 어떻게든 이 일을 해결하려 하고 있었다.
“제가 조금 앞서긴 하지만, 아직 취합하지 않은 지분들이 있고 어떻게 될지 모르니 일단 연기하려는 겁니까?”
“그래. 네 백부는 확실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니 받아들일 거다. 그리고 앞으로는 시간과의 싸움인 거지.”
시간과의 싸움.
내가 유리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고, 오늘 내가 가장 원하던 결과였다.
재만이 회장 자리에 앉지 않는 이상, 나에게 압박을 가할 수단은 없을 것이고, 나는 지금껏 해온 대로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성장하면 된다.
그리고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 내 은퇴 선언과 동시에 실장님의 부회장 찬반 투표를 진행할 거다.”
“아버지…. 이제 정말 떠나시는 겁니까.”
“그래. 나는 오늘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떠냐, 마지막은 썩 괜찮았냐?”
“예. 제가 지금껏 도와드렸던 걸 2배,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받은 기분입니다. 최고였습니다.”
준만이 씨익 웃어 보였다.
처음에 마주했던 나약했던 모습의 준만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재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강단에서 내려오고 다시 주주총회가 이어졌다.
사회자가 마이크를 잡고 말했다.
“서재만 부회장님과 서강빈 부회장님의 지지율 차이가 0.3프로 미만이기 때문에 두 후보의 지지율은 동률입니다. 태선그룹 주주총회가 정한 규율에 따라 둘 중 한 분이라도 회장 선출을 연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힌다면 다음 회장 선출을 위한 투표는 무기한 연기됩니다. 우선 서강빈 부회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런 질문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하다니.
규율에 따른 행동인지, 채규의 의도인지는 몰라도 나야 나쁠 것 없었다.
재만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눈에 선하기 때문이다.
“저는 연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술렁이는 소리 속에서 휘파람 소리까지 들렸다.
여기서 연기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것과 같으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언제나 말초적인 것을 원한다.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하는 나에게 자극을 받은 사람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럼… 서재만 부회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서 재만에게 옮겨졌다.
재만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져 있었다.
오늘 회장 자리를 차지한다고 생각하며 이 자리에 왔을 텐데, 이제 투표 자체를 거절해야 되는 상황이 오니 머리가 꽤 아플 것이다.
절대 도박 수를 두지 않으며 안정적인 이득을 추구하는 재만의 성격상, 결과가 불확실한 일에 도전할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리고 재만의 대답은 내 예상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연기… 하겠습니다.”
내가 대답했을 때 한 차례 시끄러워졌던 것과 달리 재만이 대답한 이후에는 정적이 대신했다.
사회자가 눈치를 보고는 이어서 말했다.
“예…. 서재만 부회장님이 회장 선출 투표를 연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에 회장 선출 투표는 두 사람 중 한 분이 의견을 표명할 때까지 무기한 연기하겠습니다. 다음은…”
이것으로 됐다.
이제 더 이상 내가 재만에게 뒤처지는 일은 없을 것이고, 확실한 승기를 잡을 때 회장 선출 투표를 열어 회장 자리를 거머쥘 수 있게 되었다.
준만을 보자 나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 모양으로 감사합니다, 라고 말했다.
이어진 주주총회에서는 사전에 이미 이루어진 투표에 의한 각 계열사들의 감자와 증자, 임원진 교체에 대한 발표가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저 진태의 말 한마디면 진행되었을 일이지만, 절대자가 사라지자 일 하나 진행하는데 막히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주주총회에 끝에 가서 준만의 발언이 있었다.
“저는 오늘을 끝으로 태선물산의 부회장 자리를 내려놓을 생각입니다.”
폭탄과도 같은 선언에 연회실이 다시 한번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준만에게 질문쇄도가 이어지자 준만은 마이크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말을 이었다.
“정년의 나이가 된 것은 아니지만, 이 자리에 더 적합한 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지금 태선경연을 맡고 있는 이채규 대표님입니다.”
쾅!
준만의 말이 들리고 뒤에서 책상이 부러지는 듯한 굉음이 들리자 고개를 돌렸다.
재만이 오른손을 꽉 쥐고 부르르 떨고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음료와 물병은 엎질러져 액체를 줄줄 흐르고 있었고,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던 태선호텔의 종업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재만이 무슨 말을 할까 지켜보았는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재만이 일어나자, 재만의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그렇게 퇴장했다.
오늘의 주주총회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듯, 또는 오늘을 잊으려는 것처럼.
그 뒤로 주주총회는 순탄하게 흘러갔다.
준만은 무사히 태선물산의 부회장 자리를 내려놓았고, 채규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아직 해야 될 일이 많았지만, 오늘은 준만이 모든 일을 내려놓고 사회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의 마지막을 기념해주고 싶었다.
“너를 마냥 젊은 사업가로 생각하던 사람들도, 오늘로 너를 다시 보게 될 거다. 그 서재만과 붙어서 네가 이긴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말이다.”
“이기긴요. 사회자 말대로 비긴 겁니다.”
“녀석. 이럴 땐 좀 웃고 그래라.”
재만이 양손을 집게처럼 만들더니 내 볼을 늘려 억지로 웃게 만들었다.
준만의 환한 미소를 보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진짜 웃음 말이다.
“아버지. 오늘 일은 잊지 못할 겁니다.”
“나도 잊지 못할 거다. 설마 재만이 형을 이길 날이 온다고 상상이나 했겠냐? 물론 내가 이긴 건 아니지만 말이다.”
“아니요. 아버지가 이긴 겁니다. 오늘 저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요.”
“그래? 흐흐. 그럼 그런 걸로 하자. 오늘로 은퇴했는데 나도 추억거리는 하나 있어야지.”
“예.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입니다. 그런데… 비리 장부라니, 그 중요한 일을 왜 이야기하지 않다가 터트리고 나서야 얘기하신 겁니까?”
준만이 장난스럽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말했다.
“왜 그랬을 것 같은데? 네가 맞춰봐라. 그놈의 촉인지, 감인지를 발휘해서.”
“저를… 못 믿으신 거 아닙니까?”
“내가? 너를? 크하하. 이놈아. 주무시던 서회장님이 벌떡 일어나서 웃겠다.”
“그걸 농담이라고….”
“내가 너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냐. 이유야 없어. 그냥 그런 거야.”
“그냥이 어디 있습니까. 무슨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는 겁니까?”
대답없이 준만은 한참 시선을 밖에 두었다. 의 시선이 차창 밖으로 향했다.
밖은 벌써 어둑해지고 있었고, 차가 달려갈수록 가로등을 지나치며 차창에 비친 준만의 얼굴이 점멸했다.
그리고 그 얼굴은 맑게 웃음 짓고 있었다.
“나도 이제 은퇴했으니까, 아들 용돈이나 받으면서 살 거 아니냐. 그전에 제대로 눈도장 찍으려고 한번 해봤다.”
준만의 말을 듣고 나도 더 캐묻는 것을 관두기로 결정했다.
더 물을 필요도, 준만에게 들을 대답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는 틀림없는 나의 아버지였다.
이제 완전히 일을 내려놓은 준만을 위해 선물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준만을 먼저 집에 보내고 휴대폰을 들었다.
“황실장. 전에 신혼여행 갔다고 한 곳이 어디라고 했지? 꽤 마음에 들었다며.”
“타히티섬에 다녀왔어요. 잠깐 휴가를 다녀오실 생각인가요?”
“내가 가는 건 아니고.”
“네. 그럼 숙박할 수 있는 최고급 리조트를 예약하겠습니다.”
“아니. 타히티 근처에 매입할 수 있는 무인도가 있는지 한 번 알아봐.”
“네?”
“가능하면 무인도가 아니면 더 좋고. 한국 무인도는 1, 2억 원 정도 든다고 알고 있는데 외국은 잘 모르겠네. 집도 크게 지을 수 있는 곳으로 한 번 알아봐.”
“... 알겠습니다.”
준만의 말년은 화려한 휴가 속에서 보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