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실장, 아니지 이제 대표님! 하하.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저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세상에, 실장님이 태선경연을 맡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버지 돌아가시고 누가 그 자리를 책임질 수 있을까 의문이었는데, 과연. 실장님말고는 떠오르지 않더군요.”
“앉고 싶어 앉은 자리는 아닙니다만, 태선을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입니다.”
“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채규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재만은 계속해서 방긋거리고 있었다.
GBC방송국 함규명 국장와 범준이 약혼하며 GB방송국의 보유 지분이 이번 주주총회부터 재만의 우호 지분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오늘을 위해 보유 주식이 100억 원 이상 갖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만났다.
이번 분위기 증여세를 제외한 돈은 모조리 로비하는데 들어갔다고 해도 무방했다.
재만의 정보 라인으로 조사한 결과 재만이 보유한 지분과 그의 우호 지분을 모두 합친다면 50프로가 살짝 넘었다.
중립 입장을 고수하는 세력이 10프로 정도였으니 자신이 회장이 되는 일은 기정사실이나 다름없었다.
“아버지. 미리 축하드리겠습니다. 이제 회사에선 회장님이라고 불러야 되겠군요.”
범준은 약혼을 하고 곧장 태선전자의 사장을 단 상태였다.
그동안 진태의 측근으로서 사장 자리를 맡았던 류현철은 진작에 해외 지사로 파견했다.
“하하. 녀석아. 경거망동하지 말거라. 혹시 모르지. 하늘에서 벼락이라도 떨어져 이번 총회가 엎질러질지 말이다.”
“하하….”
재만의 재미없는 농에도 날이 날이니, 범준은 맞장구치며 웃어 주었다.
누가 뭐라 해도 오늘은 재만이 회장을 취임하는 기념비적인 날이 아닌가.
그들뿐만 아니라 재만에게 친근한 척 다가오는 임원들과 주주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평소 사석에서 보기 힘들다던 정치인들과 연예인들도 왕왕 보였다.
그중에는 대주주이긴 해도, 보유 평가액 25억 원을 겨우 넘긴 사람도 있겠지만 재만은 모두를 미소로 맞이했다.
“하하. 다들 이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재만은 말하다 말고 자신을 훅 지나치는 한 명의 남자를 눈에 담았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자신을 지지하겠다고 밝혔던 태선재단의 이사장, 조승환이었다.
“이사장님?”
재만의 목소리는 금세 그를 연호하는 사람들에게 파묻혔지만, 승환이 듣기에는 충분했을 거리였다.
재만 애써 불안감을 떨치고 눈앞에 사람들에게 집중하기로 했다.
“아무튼 곧 있을…”
그때 사람들이 입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웅성거리는 소리, 몇몇은 심지어 재만을 앞에 두고 발걸음까지 떼었다.
재만은 몸을 돌리지 않고도 누가 등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유일한 호적수는 한 명밖에 없었으니까.
“...이번엔 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다.”
재만이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게 독백했다.
***
태선그룹의 전체 주주총회는 태선호텔 연회실에서 열렸다.
공식적인 자리가 아니다 보니, 보유 주식 평가액 25억 원 이상의 대주주들만 모였음에도 그 넓은 연회실이 가득 차 있었다.
연회실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는 둥근 테이블들 위로 간단한 다과가 차려져 있었다.
내가 등장하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오늘의 최대 안건인 회장 선출의 두 후보 중 한 명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반응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얼굴이 떠오르는 연예인부터, 각종 정재계 인사까지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오늘 저는 부회장님을 지지할 겁니다.”
“젊은 나이에 회장 후보에 거론되는 것만으로 대단하십니다.”
“제가 구상하고 있는 건설사업이…”
“이번에 검찰이 기업 비리에 역점을 두겠다고 밝혔는데…”
간단한 인사부터 사업 제안, 제도에 대한 견해까지 다양한 말들이 쏟아졌고, 나는 일일이 답해주었다.
“컴윗닷컴 대표님이시죠? 요새 눈여겨보고 있습니다. 하하. 부족하지만 지지해주신다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젊은 만큼 불같은 열정으로 일하겠습니다. 건설 관련은 태선건설 박현욱 사장과 얘기해보십시오. 제가 언질해두겠습니다. 검찰이 지금 중점을 두고 있는 건 공적인 성격을 띠는 기업에 한해서 아닙니까? 선생님은 어디 기업에….”
한 마디, 한 마디가 0.001프로의 지분이 된다 하더라도 남는 장사였다.
그렇게 사람들의 물결을 지나 도착한 곳은 강단 바로 앞에 자리 잡고 있는 테이블이었다.
이미 기현과 진석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기현은 태선보험의 사장 자격으로, 진석은 태선호텔의 사장자리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다.
기현을 영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앉힐까도 생각했으나 이제 와서 그럴 필요도 없겠다 싶어 그냥 두었다.
“오늘 부회장님 용안이 빛이 나십니다? 하하. 아침부터 기운이 펄펄 솟는 게 운기가 저희 쪽으로 향하고 있는 듯 합니다.”
“사장님도 곱슬머리를 펴니까 배우가 따로 없으십니다?”
진석은 악성 곱슬머리를 완전히 펴고 깔끔하게 머리를 단정하고 있었다.
머리만 바뀌었을 뿐인데 인상이 아예 달라져 있어, 길에서 봤으면 못 알아보고 지나갔을 것 같았다.
“예. 오늘을 위해 잠깐 핀 거라 아마 내일이면 돌아가 있을 겁니다. 하하. 미용사가 욕을 꾹 참고 머리를 펴는 게 얼마나 웃기던지.”
진석은 여전히 유쾌한 모습이었다.
진석을 지나치자 기현이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에헤이, 앉아. 젊은 이미지로 밀고 나가야 되는데 이러면 내가 꼰대 같잖아.”
“예. 부회장님.”
기현이 허리를 다시 펴고 자리에 앉았다.
요새 신경을 많이 못 썼음에도 바뀐 것 하나 없는 두 사람을 보자 걱정이 사그라들었다.
그리고 우리 테이블을 지나 옆에 위치한 테이블에는 준만과 물산 계열 사장들이 앉아 있었다.
“아버지.”
내가 부르자 준만이 나를 보며 굳은 표정으로 얼굴을 끄덕였다.
아무래도 진태가 죽기 전에는 이런 주주총회 자체가 많이 없었으므로 준만도 나름 긴장된 모양이었다.
그래도 준만이 같은 공간에 앉아 있다는 것만으로 든든했다.
나는 좀 늦게 온 편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고 얼마 안 지나 주주총회가 시작되었다.
사회자의 간단한 소개가 이어진 뒤 채규가 강단에 섰다.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해 자리를 빛내주신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저는 태선경제연구원의 대표를 맡고 있는 이채규입니다.”
짧은 박수 소리가 이어지고 채규의 연설이 이어졌다.
“태선그룹 총 주주총회의 의의는 다른 주주총회와는 결이 다르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공정거래위원회에서 ‘기업집단’이라고 정의하고, 임직원 모두 태선이라는 이름의 소속감을 느끼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만. 각 계열의 지주회사가 있을 뿐 모든 기업을 지배하는 대장 회사가 없으니까요.”
채규의 말마따나 태선은 정부에서 인정한 기업집단이다.
그러나 태선전자, 태선물산, 태선호텔, 태선백화점, 태선보험, 이 다섯 개의 지주회사로 나뉘어 있었고, 각 지주회사가 서로의 지분을 조금씩 소유한 형태의 복잡한 지배구조를 띄고 있었다.
이는 낮은 지분으로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한 진태의 계략이기도 했다.
실제로 진태가 죽기 전까지만 해도 이는 대기업의 효율적인 지침으로 정의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상황이 조금 일변했다.
제각기의 지주회사를 한데로 모을 수 있는 구심축이었던 진태가 사라지고, 태선그룹이 그룹으로 남을 수 있는가가 문제시된 것이다.
채규는 그 점에 대해 꼬집고 있었다.
“따라서 태선그룹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일을 진행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이 태선경연이었습니다. 주주들의 결정을 이행하는 역할이었지요.”
채규는 저렇게 말했으나 이 자리에 앉은 대부분은 그 의결권을 행사할 틈도 없었을 것이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주주들의 결정’이란 ‘진태의 결정’이었고, 태선경연의 이행이란 곧 진태의 뜻이었다.
“증자와 감자, 임원진 교체까지. 태선그룹 전체의 결정에 따라 태선경연은 강한 힘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태선물산의 주주가 태선전자에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이한 풍경이었지요. 이에 저는 태선경연의 존재여부가 태선그룹의 결속을 강제하는 것이 아닌가, 각 계열사들의 방향성을 제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강한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채규의 말이 끝나고 객석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태선을 그룹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태선경연의 존재여부에 대한 의문이라니, 나조차 당황스러울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채규가 태선경연의 대표이고, 그룹의 중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하지만 채규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태선가의 일원이 가담해야 가능한 일.
그리고 지금 채규와 접선하고 있는 사람은…
준만이 나를 보며 안심하라는 듯 옅게 미소를 띠고 웃고 있었다.
내가 중립 입장에 있는 주주들을 설득하러 돌아다니는 동안, 준만과 채규도 마냥 놀고 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이에 저는 이번 주주총회의 안건으로 태선경연의 존재 여부를 결정하고 싶습니다.”
결국 채규가 말을 꺼냈다.
회장을 결정짓는 자리에서 회장의 권한을 축소시키는 건의 제안이라니.
내 바로 뒤편에 앉아 있는 재만은 고요히 앉아 있었지만 채규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채규는, 준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사실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주주총회에서 재만을 이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준만이 보유한 지분에 내가 가진 모든 지분들, 내가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내 편으로 돌린 중립의 지분들을 모두 합친다 한들 태선그룹 전체 지반의 30프로가 조금 넘었다.
그에 반해 재만과 그의 우호 지분을 합친다면 최소 40프로 그 이상이었다.
어차피 진태가 죽은 이상, 주주총회는 자주 열릴 것이고 다음을 기약할 생각이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부족했다.
그렇게 합리화했다.
어차피 시간은 나의 편이라고.
GB의 자본금으로 태선의 주식들은 끊임없이 매수하고 있었고, 물산, 호텔, 금융 등 내가 갖고 있는 계열사들을 더 키워낼 수 있는 지식들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으니까.
하지만.
재만이 회장으로 취임된다면 공석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보다 더 많은 지분이 필요할 것이다.
재만은 절대 왕좌에서 내려오지 않으려 할 것이고, 나를 견제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결국 회장 자리에 다시 도전하기 위해서 기약없이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려야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자리에 나온 이유는 나약한 모습을 재만에게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다.
패배를 하더라도, 간발의 차였다고, 범준에게 말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채규의 두 번째 말이 연회실을 울렸다. 그리고
“고지해야 될 사실이겠죠. 이번 회장 선출에 따른 지지율은 서재만 부회장님이 37.4프로. 서강빈 부회장님이 37.6프로 입니다.”
이변이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