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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93화 (193/249)

#193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재만이 말했다.

“거실로 와라.”

힘없는 발소리.

그리고 얼굴이 시뻘게진 범준의 얼굴이 보였다.

평소와 같으면 목소리를 높여 한소리를 했겠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다.

“술이라도 한잔한게야?”

“아, 아닙… 예.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이랑 한잔하고 왔습니다.”

“그래. 뭘 그렇게 뻘쭘하게 서 있어? 여기 앉아라.”

재만이 가볍게 자신의 옆자리를 두드렸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범준은 오히려 불안감을 느꼈다.

“무슨 일이라도…?”

“일이야 있지. 범준이 너한테 아주 좋은 일이 있어.”

“설마… 저에게 드디어 전자 사장 자리를 주시는 겁니까?”

태선전자의 사장 자리를 범준이 얼마나 바라마지 않았던가.

태선전자서비스의 사장으로 보내며, 그토록 바라던 자리였다.

기대감에 부푼 범준을 보며 재만은 사실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범준은 술에 절어있던 정신이 한순간에 깨어나는 것을 느끼며 벌떡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맡겨 주신 이상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결과를 이끌어내겠습니다.”

재만은 흐뭇한 미소를 짓고는 이어서 말했다.

“범준아, 내 아들아. 좋은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다.”

“예? 이것만으로 충분히 감개무량합니다만….”

처음 보는 재만의 미소.

범준은 섬찟한 느낌에 몸을 살짝 떨었다.

“내가 전에 너에게 결혼할 상대를 정하라 하지 않았더냐. 생각은 끝냈어?”

“그, 그것이…. 선은 보았지만 아직 고민 중에 있습니다.”

재만이 결혼 상대를 결정하라며 보낸 여자들의 프로필 중 분명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 있긴 했다.

에스지의 차녀, 구혜지는 보기만 해도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미인이었고, 죽을 날이 머지 않은 유엘 회장의 장손녀, 마수혜는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표독스러워 보였지만 직접 만나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둘 다 상당한 미인에 집안도 괜찮았지만, 범준은 결혼이라는 것 자체를 하기 싫었다.

자신의 삶이 한 여인에게 속박당하기엔 아직 해보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다.

“고민할 필요 없다. 마음이 있더라도 모두 접어라.”

“정말입니까? 아버지! 역시 아버지는 제 마음을 이해하실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마흔이 되기 전엔 적당한…”

“네가 시간을 질질 끌어 이 아비가 좋은 상대를 구해왔다.”

재만이 범준 앞에 툭, 하고 사진 한 장을 내려놓았다.

혜지나 수혜에 비하면 지극히 평범하고 콧잔등에 주근깨가 내려앉은 여인이었다.

“이게 무슨…?”

“GBC 방송국 알지? 거기 독녀다. 날짜는 내가 잡을 테니 너는 알고만 있거라.”

범준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이… 이게 뭡니까?”

“네 아내 될 사람 보고 이게? 드디어 정신이 나간 게냐.”

“아버지! 차라리, 차라리 에스지나 유엘로 가겠습니다. 저 좋다는 명망 높은 기업들이 줄을 짓고 있는데 방송국이라니, 이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늘 재만의 말에 순응하며 따라왔던 범준이었지만, 이번만은 양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재만은 그런 범준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태선이 더 성장하기 위해선 그런 집안이 필요할지도 모르지. 하지만 범준아. 그것은 우리가 태선을 가졌을 때야 비로소 가치 있는 거다. 네가 결혼까지 하면서 이룬 성과를 다른 놈의 입에 떠먹이고 싶은 건 아닐 테지?”

“서강빈 그놈한테…. 그건 상상도 하기 싫습니다.”

“GBC가 가진 태선그룹 지분이 어마어마하다. 아버지가 많은 힘을 쥐여주겠다 약속했어.”

GBC를 완전히 장악하고 태선 편향의 언론사로 만들기 위해 진태는 많은 돈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 태선이 청렴한 기업이미지로 굳혀지고, 갖은 국정감사를 회피할 수 있는 동력이 되긴 했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결혼입니다. 결혼. 적어도 선택지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술이 점점 깨기 시작하자 테이블에 놓인 여자의 얼굴이 점점 더 추녀에 가까운 형상을 띠고 있었다.

재만이 범준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 마음 다 이해한다. 하지만 범준아. 달리 생각해보면 어떻겠냐.”

“예?”

“유엘, 에스지, 샤롯. 태선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한국 안에서는 다 알아주는 기업들이다. 그곳 자제들과 결혼했다가 스캔들이라도 불거지면 어떻게 될 것 같냐?”

재만의 말은 결혼 상대로 누구를 골랐든, 범준이 밖에 나돌아다닐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야 태선의 언론대응팀이 나서지 않겠습니까?”

“상대기업은 가만있을 것 같냐? 특히 네가 고른 유엘 회장이 끔찍이 아끼는 손녀가 마수혜다. 에스지는 작은 구설수라도 오르는 걸 싫어하니 너를 옥죌지도 모르지.”

“감히 누가 태선을 상대로 우위에 서려 든다는 겁니까? 아버지가 곧 태선 아닙니까.”

재만이 범준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범준아. 그 모든 게 내가 태선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선 GBC가 갖고 있는 지분을 우리 쪽으로 돌려야 된다.”

“아버지… 정말 다른 방법은 없겠습니까?”

“일단 식을 올리고 내가 회장 자리 오를 때까지만 버텨라. 태선이 내 손에 들어오면 네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쓰지 않으마. 설마 그것도 힘들다고 말할 테냐?”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버지.”

범준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꿈이 곧 제 꿈입니다. 잠깐만… 아주 잠깐만 희생한다고 생각하겠습니다.”

그 눈물이 재만을 위해서 흐르는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 범준조차 알 수 없었다.

***

준만은 눈앞에 펼쳐진 생경한 풍경에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제 집무실에서 실장님과 독대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채규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이런 날도 있는 거지요.”

진태가 죽 고나서 채규는 태선경연의 대표를 맡고 있었다.

어떤 계열에도 속하지 않는 태선경연은 본디 진태의 뜻에 따라 그룹의 중대사를 결정짓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태의 죽음 이후 그 힘을 어느 정 잃긴 했으나, 적어도 이번 회장 취임 건에 대한 주주총회는 태선경연에서 주최할 예정이었다.

본래 중립을 표방해야 할 태선경연의 대표인 채규가, 태선물산의 부회장인 준만을 찾아온 것이다.

채규는 호로록 마시고 말했다.”

“10퍼센트 정도의 사람들이 불참한다고 의견을 밝혔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오겠네요.”

이번 주주총회는 태선그룹의 보유 주식 평가액 25억 이상을 소유한 대주주만 참석할 권리를 얻는다.

대주주 이상이 보유한 태선그룹의 보유 주식은 93.7프로로 대부분의 주식들을 대주주들이 양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 10퍼센트만 불참한다면 대부분의 주요 인사들은 모두 참석한다고 봐도 무방했다.

“컨택했다던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대부분 큰형에게 향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전기 박노열 사장도 결국 넘어왔습니다. 끝까지 반대한 사람들도 결국 중립을 선언했고 저희에게 반대를 들 일은 없을 겁니다.”

“고생하셨습니다. 중립을 저희 편으로 돌리는 것보다, 반대편에 있는 사람을 뒤집었으니 저희 쪽으로 많이 기울었을 겁니다.”

재만 쪽에 붙은 사람 먼저 설득해야 된다고 주장했던 사람이 채규였다.

일이 착착 진행되는 것을 보고 채규의 지략에 감탄했다.

“그보다 서강빈 부회장님한테는 비리 장부에 대해 얘기하셨습니까?”

“아뇨. 강빈이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겁니다.”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가 있습니까?”

“강빈이도 지금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을 겁니다. 저희와 다르게 중립 입장에 있는 계열사들을 돌아다닌 다더군요. 괜히 신경을 분산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채규가 작은 웃음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서강빈 부회장이 어디서 책임감을 배웠나 했더니, 여기 눈앞에 계시는군요. 부회장님 어릴 때는 제가 왜 못 알아봤을까요.”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하하. 강빈이가 저한테 배우다니요. 오히려 제가 강빈이를 보고 많이 바뀌었습니다.”

채규가 이번엔 입술을 말아 올리며 크게 웃었다.

“하하.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간만에 회장님 생각이 났거든요. 회장님도 부회장님과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준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 아이가 가진 가장 큰 무기일 겁니다.”

“예. 회장님이 은퇴하시면 따라 은퇴하겠다고 결심했던 제가 아직도 이 자리에 있으니 말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슬쩍 웃었다.

“그보다 부회장님. 서강빈 부회장님을 회장 자리에 올리기 전에 저를 부회장 자리에 올리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준만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준만이 채규를 부회장 자리에 올리려고 계획했던 것은 강빈이 회장 승계에 도움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채규는 그 순서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한 것이다.

“그럼…”

“예. 제가 부회장 자리에 오르는 것의 의미가 희석되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해본 것이 있습니다.”

“말씀해주십시오. 실장님 말이라면 천금보다 귀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번 주주총회의 안건을 그룹 회장 선출에서 물산 계열 부회장 선출로 바꾸는 겁니다.”

“...제 머리로는 실장님을 따라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회장을 공석으로 두자는 겁니까?”

채규는 깍지를 끼며 고개를 주억였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태선 경연에서 취합하고 제가 따로 조사한 결과 이번에 서강빈 부회장이 회장으로 선출될 확률은 절반에 살짝 못 미칩니다.”

“제 지분을 모두 강빈이에게 넘긴다고 해도 말입니까?”

“예. 부회장님과 서강빈 부회장님에게 우호적인 지분을 모두 합친 결과입니다. 보유한 지분 총량은 서재만 부회장님보다 우세하지만 역시 우호 지분에 크게 밀립니다.”

강빈이 지분을 쌓아 올린 시간보다, 재만이 그룹 계열사의 임원들과 주주들과 쌓아 올린 시간이 더 길었다.

“... 역시 시간이 더 필요한가 보군요.”

“예. 이대로 5년, 아니 3년만 흘러도 자연스레 서강빈 부회장님이 회장 자리에 오르겠지만 아직은 이릅니다. 그동안 서재만 부회장님이 쌓아온 내력을 쉽게 무너뜨리진 못합니다. 그나마 이 수치도 부회장님이 동분서주 움직여준 덕분에 나올 수 있는 수치입니다.”

“그래도 강빈이가 회장이 될 수 있는 확률이 있는 한 저는 계속해서 부딪칠 겁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건… 전대 회장님의 뜻이기도 하지요.”

채규는 처음으로 진태를 ‘전대 회장’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 말은 차후의 회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이기도 했다.

“서재만 부회장님은 아직 비리 장부를 통해 저희 세력이 늘어났다는 것을 모릅니다. 주주총회 때 그걸 알려서 흔들어야 됩니다. 지금 당장은 위험하다고 느끼게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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