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모두 많이들 해 처먹으셨더군요.”
“....”
준만이 집무실로 부른 사람들은 총 다섯 명이었다.
태선 전기 사장 박노열, 태선 중공업 부사장 문양기와 같이 태선가 사람부터 시작해 재계 17위 오양자동차 사장, 재계 14위 오양조선 부사장, 4대 회계법인 중 하나인 일해회계법인의 사장까지.
모두 태선그룹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대주주들이었다.
태선재단 이사장과 달리 이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은 이유가 있었다.
서로 횡령 사실을 숨기는 과정에서 얽히고설켜 있을 만큼 그들의 관계는 촘촘하게 엮여 있었다.
처음에는 태선가 사람들만 부를 생각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오양그룹 사람들과 일해회계법인 사장을 호출한 것이다.
사문서위조를 당연하게 한 이들이었고, 공금 횡령 액수가 상당했는데 자산을 관리하는 위치에 있기 때문인지 아직도 횡령 사실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진태가 이들의 횡령 사실이 적시된 장부를 갖고 있다는 것은, 진태 또한 많이도 해 먹었다는 소리다.
비리를 주도하고 대부분의 이득을 갈취한 사람은 아마 눈앞에서 떨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태일 것이다.
장부를 살필수록, 더 알게 될수록 아버지가 무서워지는 준만이었다.
“가족들은 왜 끌어들인 겁니까? 이제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 집안이 풍비박산 나게 생겼잖아요.”
준만의 말에 양기가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할 말 있으면 해.”
“저… 조선업 현장에서 제 친형이 운영하는 파견업체를 쓴 것은 맞습니다만… 추가 비용은 일절 없었습니다.”
“그래. 비용은 그대로 두고 사람 수는 속여서 죽도록 굴려댔지.”
“....”
“양기야. 너는 내 직속 아니냐? 이 사람들이랑 이 자리에 있는 게 쪽팔리지도 않아? 응?”
“... 죄송합니다.”
준만은 혀를 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들도 똑같습니다. 회사 관련뿐만 아니라 신도시나 부동산 투기 등 참 많은 것들을 건드렸더군요.”
가만 앉아 있던 오양자동차의 사장이 발끈한 듯 고개를 들고 말했다.
“다른 사람을 통하긴 했지만… 그 위에 서회장님이 있었다는 걸 누가 모릅니까! 태선에서 시켜서 한 일인데 이런 식으로 같은 태선 사람이 협박을 하다니요?”
“제 몫 챙길 때는 입 싹 닫고 있다가 이제 와서 화내시는 모습이 참… 추하십니다.”
“뭐요?”
“그리고 화를 낼 거면 정당한 이유로 화를 내세요. 제가 이 장부 터트리면 당신들만 죽을 것 같습니까? 엮여 있는 태선가 임원들만 수십, 수백은 될 겁니다. 화를 낼 거면 그 사람들 다 죽일 거냐고, 그렇게 화를 내셔야지요.”
그렇지 않아도 태선전기 사장, 노열은 그에 대해서 묻고 싶었는지 입을 뻐끔거리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준만이 먼저 선수를 친 것이다.
“서진태의 태선은 끝났습니다. 물갈이가 필요하다면 해야겠지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가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대체… 무엇을 원하길래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당신들 지분, 그리고 당신들과 엮인 사람들까지 전부 설득시켜서 강빈이를 지지하세요.”
다들 눈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는 가운데, 노열은 허벅지 위로 손이 하얗게 될 때까지 움켜쥐었다.
“부회장님. 저는 전자 라인인 거 아시잖습니까. 저보고 제 가족회사를 등지라는 말씀이십니까…?”
“가족회사를 등지거나, 가족을 등지거나. 둘 중 하나는 등져야 될 텐데, 자네 생각은 어떠한가?”
“....”
나머지 임원들은 별다른 말 없이 준만의 말을 받아들이는 듯했다.
“당신들 목숨줄은 언제라도 제가 움켜쥐고 있다는 거 잊지 마십시오.”
일해회계법인 사장이 손을 들었다.
“언제까지 두려워하며 살아갈 순 없지 않겠습니까? 언제까지 유효한 겁니까?”
“거사가 끝나면 이 장부를 불태울 겁니다. 그리고 그 전이라도 지분을 저한테 넘기시면 당장 이름을 지워드리죠. 물론 제값을 쳐줄 생각입니다.”
“그 정도면…. 저는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저도 동참하겠습니다.”
“사실, 저는 서강빈 부회장님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찰나였습니다. 차라리 잘 됐습니다.”
“...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일해회계법인, 오양자동차, 오양조선의 사장, 양기가 차례대로 준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노열이 말했다.
“저는… 생각할 시간을 더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준만이 노열을 응시하며 말했다.
“생각하고 말고는 자네 자유 아니겠나. 마음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제 이걸 터트리고 말지도 내 자유일세. 당장 내일이 될 수도 있고, 그래야 동등한 입장이지 않겠나?”
준만이 장부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울상을 짓고 있는 노열이 생각을 결정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
태선백화점에 갔다 온 이후 재만의 마음은 더욱 급해졌다.
계열사 부사장, 전무 라인은 물론 상대도 하지 않던 다른 그룹의 기업들까지 태선그룹의 지분을 들고 있다면 가리지 않고 찾아갔다.
그중 재만이 찾아가고 있는 곳은 민영방송국 GBC의 함규명 국장이었다.
규명, 개인이 보유한 지분은 100억 원도 안 되었지만, GBC방송국은 태선그룹의 1프로에 해당하는 지분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규명은 방송국의 결정을 좌우할 수 있는 권력자였다.
남순이라는 큰 우군을 잃은 지금,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이다.
규명은 짧은 머리에 입술 위로만 콧수염을 길렀다.
“회장님 소식은 들었습니다. 제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더군요.”
“예…. 저도 아직 비감하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쩌겠습니까.”
재만은 규명이 한쪽 입꼬리를 꿈틀거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밀린 얘기는 차차 하기로 하고… 제가 이곳을 찾아온 이유부터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부회장님이 친히 행차하셨는데 일부터 마무리 지어야겠지요.”
“GBC가 갖고 있는 태선그룹 지분이 꽤 되지 않습니까.”
“예. 태선호텔이 700만 주 정도 있고, 전자가 500만 주가 조금 넘지요. 가장 많은 주를 보유한 게 이 정도고, 다른 기업들도 말씀드릴까요?”
재만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고개만 살짝 저었다.
“그 모든 지분의 의결권은 국장님께 있는 것도 사실이지 않습니까?”
“하하. 그렇다고 볼 수 있죠. GBC는 제 뜻대로 움직입니다.”
GBC방송국이 갖고 있는 지분이 규명의 소유는 아니었지만, 의결권은 규명에게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규명은 국장이면서 동시에 GBC 방송국의 최대 주주이기 때문이다.
재벌가가 계열사들을 지배하는 방식과 비슷했다.
“그럼 제가 직접 찾아온 이유를 아시겠군요.”
“차기 회장 자리에 오르는 데 힘써달라, 아니겠습니까?”
“예. 맞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조건을 들어도 되겠습니까?”
GBC방송국은 태선그룹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앞장서서 물어뜯기로 유명했다.
태선그룹의 지분을 소유하면서도 그런 모습에 사람들은 ‘투명한 언론사’라 불렀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GBC방송국은 태선 언론대응팀의 지시로 움직였을 뿐이다.
큰 건을 덮기 위해 작은 것을 들추었고, 사람들의 이목을 GBC방송국이 내놓는 뉴스에 집중시킨 것이다.
그리고 규명은 그 모든 과정을 지휘한 실력자로서 차후 언론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인물이었다.
“우리가 그간 쌓아온 정만으로는 안 되겠지요?”
“하하하. 부회장님. 농이 지나치십니다.”
규명 또한 태선의 사람이라 말할 수 있었지만, 재만의 사람은 아니었다.
본디 규명은 진태의 뜻에 따라 움직였던 사람.
진태가 죽은 지금도, 그는 태선에게 우호적이었지만 통제할 사람은 없는 실정인 것이다.
그리고 재만은, 규명은 손에 넣기 위해 큰 패를 하나 깔 생각이었다.
“재미없으셨나 봅니다.”
갑자기 가라앉은 재만의 목소리에 규명이 흠칫 떨었다.
“예? 아… 아닙니다. 하하.”
“국장님. 제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말씀하시죠.”
“국장님 따님이 아직 미혼이지 않습니까. 마침 제 아들내미도 적령기를 넘겼는데… 어떠십니까?”
규명의 눈빛이 일순 흔들렸다.
사돈지간이란 예부터 내려져 온 그 무엇보다 확실한 보증수표다.
심지어 재만의 아들은 독남이지 않은가.
규명은 자신이 꿈도 꿀 수 없었던 달콤한 권력이 제 눈앞에 펼쳐지는 것을 상상했다.
자신의 사위가 태선의 왕좌에 앉고, 자신은 그 위에서 흐뭇하게 내려다보는.
그러자 몸이 저절로 벌떡 일어났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사돈!”
***
“그럼. 응응. 아, 진짜 회식 자리라니까? 나보고 지금 전무님한테 전화기를 토스하라는 거야?”
범준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활극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친구 놈 하나가 제 아내에게 오늘 술자리에 대해 변명하고 있었다.
겨우 전화를 끝내고 자리에 앉은 친구의 옆구리에 여자가 달라붙었다.
친구는 뭐가 그리 좋은지 헤벌쭉하게 웃고 있었다.
범준은 자신의 옆에 앉은 여자의 허벅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한심한 새끼야. 결혼은 왜 했냐?”
“내가 하고 싶어서 했냐? 집안에서 하라는 걸 나보고 어떡하냐. 너는 절대 하지 마라.”
“네가 말 안 해도 할 생각 없다. 흐흐.”
“그래. 부러운 놈. 이제 너희 아버지 회장 달 거 뻔한데, 네 자리도 따놓은 당상 아니겠냐?”
친구의 올려치기에 범준은 만면에 웃음꽃을 피웠다.
범준에게 치대던 여자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가 정말 태선그룹 황태자라고?”
“황태자? 흐흐. 너 오늘 운 좋다? 내가 한 달 치 매출 올려줄게. 제일 비싼 걸로 한 궤짝 채워서 갖고 와.”
“정말? 잠깐만 기다려!”
여자가 발그레한 얼굴로 휘청이며 일어나더니 룸 밖으로 빠져나갔다.
주변에 앉아 있는 범준의 친구들이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박수를 쳤다.
“역시 같은 재벌이라도 태선은 다르다. 친구 잘 둔 덕에 제대로 얻어먹겠네.”
“그래. 앞으로 범준이한테 밉보이는 새끼 있으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그런 의미에서 한잔하자. 태선의 황태자를 위하여!”
친구 한 명이 술잔을 올리자 모두가 술잔을 치켜들었다.
“위하여!”
범준도 신이 나 가세하고는 술잔을 모두 입에 털어 넣었다.
그때 범준의 오른쪽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범준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자 아까 아내가 있던 친구가 조심스레 말했다.
“전화 안 받아도 되겠냐? 네가 워낙 바쁜 몸이어야지.”
“내가 너처럼 아내가 있냐, 자식이 있냐? 아니면 뭐 상사가 있을까? 하하…. 하?”
있었다.
범준의 유일한 상사가.
그리고 늦은 시간에 범준에게 전화할 사람이라면….
범준은 떨리는 손으로 수신자를 확인했고, 역시나 예상했던 사람이 맞았다.
“예, 예. 아닙니다. 예…. 예. 당장 집으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범준이 일어나서 터덜터덜 룸 밖으로 나갈 때까지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