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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91화 (191/249)

#191화

VIP용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재만이 서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고모 안부나 물을 겸 왔습니다. 백부님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재만뿐만 아니라 그의 비서와 범준까지 있었다.

영균마저 1층에 대기시키고 홀로 이곳을 찾은 나와는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그들이 모두 내리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혔다.

재만은 내 옆에 서서 평소와 같은 톤으로 말했다.

“그래. 남순이를 내 쪽으로 끌어들일 생각이다.”

명백한 선전포고.

그리고 이것이 뜻하는 바는 재만은 나를 견제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고모 상태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벌써 이러셔야겠습니까.”

“왜, 겁이라도 나는 게냐? 네가 구밀복검(口蜜腹劍)으로 이곳을 찾은 걸 내가 모를 것 같더냐?”

“백부님께서 어떤 의중으로 이곳을 찾은 지는 제가 알 길이 없으나, 제 순수한 의도마저 물들이려 하지 마십시오.”

코웃음을 치고 지나가려는 재만을 보며 한마디 덧붙였다.

“백부님께선 금방 떨치신 것 같아 부럽습니다. 저는 한 달간 할아버지를 애도하느라 바빴거든요.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이제 저도 움직일까 합니다.”

재만의 발걸음이 멈췄고 나는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주주총회 때 뵙겠습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재만이 회장 승계를 위해 태선 그룹의 주요 임원들과 주주들을 섭외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자명한 사실.

그가 곧 주주총회를 열 거라는 사실도 유추할 수 있었다.

지금 반응을 보니 확실한 모양이고.

***

“이렇게 셋이 보는 건 거의 처음 아니야?”

남순이 재만 부자를 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가끔 차가운 모습을 보이긴 해도, 남순에게 있어 재만은 한때나마 진태 다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장남이었다.

“네. 저도 그렇고 고모도 바쁘셔서 시간 내기가 힘들잖아요.”

“호호. 강빈이도 똑같은 말 하더라.”

“안색이 많이 안 좋으세요.”

“시간이 해결해 줄 거야. 너는 큰오빠 닮아서 그런가 의젓하네.”

재만이 범준의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그럼. 누구 자식인데. 하하. 범준아 고모한테 줄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아, 네. 고모 이게 노르웨이에서 가장 유명한 거장이 만든 가방인데요.”

“힌세 팔라노?”

“역시 알아보시네요! 네. 힌세 팔라노가 특별 제작한 가방이에요.”

범준이 내민 가방은 척 봐도 유연한 악어가죽으로 만들어진 것이 보였다.

전체적으로 흰색 톤에 금으로 포인트를 주고 가방 곳곳에 점점이 박혀 있는 것은 화이트 다이아몬드였다.

“응. 이쁘다. 고마워.”

“네. 무슨 가방 하나가 1억 원이 넘는지 참… 하하. 어, 저 바구니는 강빈이가 준 거예요?”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나 보구나. 응. 강빈이가 주고 갔어.”

범준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바나나에… 나머진 뭐죠?”

“땅콩이나 호두 같은 견과류들도 있어. 이런 음식들이 행복 호르몬을 만들어준다면서… 호호. 귀엽지 않니?”

재만이 조소하며 말했다.

“어리긴 어리네. 우리가 일반인들도 아니고 이런 걸 선물이랍시고 준 거야?”

“왜? 정말 내 걱정하는 것 같아서 나는 좋던데. 뭐 범준이 선물도 마음에 들긴 하지만, 명품이야 늘 보는 거 아니겠어? 범준이는 너무 상심하진 말고. 고모가 워낙 겉치레를 못 하잖니.”

“....”

재만은 멋쩍은 듯 큼큼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남순아. 곧 주주총회를 열 생각이야.”

“벌써…?”

“응. 아버지 그렇게 가시고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너도 알잖아. 언제까지 아버지 그림자만 밟고 있을 수는 없어.”

“그래도… 나는 아직 조심스러워.”

지금 시기에 주주총회를 연다면 회장 승계에 대한 안건이 가장 중요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다.

아직 진태에 대한 마음의 정리도 끝나지 않은 남순에겐 벅찬 일이다.

“그래. 다 이해한다.”

재만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남순의 옆으로 가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너는 참석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의사 전달만 해주면 돼.”

“나보고 지금 오빠 편 들라는 거지?”

“아니. 말 그대로 네 의사만 표명하면 된다. 누굴 지지하는지, 누가 회장직에 어울리는지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남순의 제 편을 들 거라 확신하고 있던 재만은, 남순이 고개를 숙이고 있자 얼굴이 굳어졌다.

“남순아. 네가 그동안 뒤에서 강빈이 많이 도와줬다는 거 알고 있어.”

“내가 도와줘…? 오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도와준 건 내가 아니라 강빈이야. 애가 어쩜 그리 속이 넓은지, 분명 나보다 힘들 텐데도 나부터 챙겨 준 애가 강빈이라고.”

진태가 경주의 계략에 휘말려 죽을 뻔했을 때도, 그리고 결국 세상을 떠났을 때도 남순 자신은 슬퍼할 뿐 주변을 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남순에게 다가와 가장 먼저 위로를 건넸던 건 강빈이었다.

재만은 제 생각대로 일이 안 풀리는 것을 느끼자 다급하게 말했다.

“강빈이가 속 깊은 아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태선의 총수에 어울릴 것 같아? 경영 해본 시간이 10년도 안 된다. 좌정관천(坐井觀天)이라는 말처럼 우물에서 하늘을 바라보니 제가 원하는 곳이 얼마나 높은지 그 녀석은 모르고 있어.”

“글쎄….”

남순은 버릇처럼 검지손가락으로 제 갸름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나는 오빠 능력도 뛰어나지만 강빈이도 그에 못지 않는다고 생각해.”

“그놈은 아직 마흔도…!”

“오빠. 아버지가 태선 일으켰을 때, 서른도 안 됐어. 그리고 우리가 강빈이 나이 때는 뭐 했는지 기억은 해? 강빈이한테 나이라는 잣대는 의미 없는 거야.”

“남순아.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해라. 지금 결정이 태선의 미래를 좌우하게 될 거야. 네가 갖고 있는 태선백화점뿐만 아니라, 태선 그룹 전체를 말이야.”

“그러니까 더 고민하겠다는 거야. 나한테는 오빠나 강빈이, 둘 다 뛰어난 사람들이야.”

그때, 눈치를 보며 눈알을 굴리고 있던 범준이 말했다.

“고모. 벌써 아버지를 지지하겠다고 하는 분들이 많아요. 아직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고명하신 분들이죠. 그리고 그분들 사이에는 유통 계열의…”

“범준아.”

범준이 은근하게 압력을 가하려 하자 남순이 범준의 말을 끊었다.

“내가 욕심내지 않는다 해서, 내가 가진 걸 지키지 않는 것은 아니란다.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것들이야. 누구라도 내 걸 훔치려 든다면 나도 가만있진 않을 거야.”

재만이 범준을 흘기며 말했다.

“넌 나가 있거라.”

“아버지…?”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범준은 눈을 크게 뜬 채 재만을 바라보다가 결국 일어섰다.

범준이 나가기도 전에 재만이 말을 이었다.

“저 녀석 말은 잊어. 나를 위해서 한 말이겠지만 선을 넘었어.”

“아까 범준이가 하려던 말 이어서 하자면 유통 계열 사람들한테도 손을 대고 있다는 말이지? 택배는 강빈이 거나 다름없고… 면세점이나 마트 쪽이려나.”

“그놈이 헛소리한 거다.”

남순이 무표정하게 재만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도 나가줘. 여기 있는다고 당장 오빠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진 않을 거야.”

“서남순.”

“내 의견은 변함없어. 태선의 미래를 위한 선택을 할 거야. 오빠가 그럴만한 사람이면 힘을 보태줄 거고.”

“...믿어도 되겠니.”

“아니, 믿지 마.”

남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만은 남순이 책상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는 모습을 한참 동안 눈에 담고 나서야 집무실을 떠났다.

***

“하… 아들놈 때문에 내가 이런 일들까지 하게 될 줄이야.”

한숨을 쉬는 준만의 앞에는 비리 장부 중 세 명분의 서류가 놓여 있었다.

똑똑.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곱슬머리를 뒤로 넘겨 이마를 내보이게 한 남자였다.

반백은 되었을 남자의 이름은 조승환.

장례식장에서 재만과 한참을 떠들어댄 태선재단의 이사장이었다.

“이거, 부회장님이 불러주실 줄은 몰랐네요? 하하.”

“소파에 앉아.”

“예?”

“앉으라고.”

상황파악이 되지 않은 승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승환은 표정을 한껏 구기긴 했지만 일단 소파에 앉았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입니까? 저한테 이런 식의 태도는 피차 좋지 않을 텐데요.”

“당신이 했던 일을 알게 된 이상 존중해줄 수가 없어서 그래. 나도 이런 식의 대화는 피곤하군.”

턱, 하는 소리와 함께 준만이 승환에게 자료를 보여주었다.

“당신, 많이도 해 먹었더군. 6개 대학에서 사학 비리를 저지르지 않나, 불우아동을 지원하는 명목으로 설립한 단체에서는 요트에 펜션까지 구입했다지? 보육원에 쓰이는 난로의 가격을 열 배나 뻥튀기하면서 말이야. 국가지원으로 진행했던 사회복지공동모금의 기부금으로 유흥업소는 왜 갔던 겐가?”

준만의 얘기가 진행될수록 하얗게 질려가던 승환은 이제 숨이 넘어가려고 하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자료들까지…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라 확증이었다.

그래도 눈칫밥으로 살아왔던 인간이라 그런지 태도 변화가 빨랐다.

“부, 부회장님…. 살려 주십쇼.”

“살고 말고는 법원에서 결정할 문제 아니겠나. 아니지, 태선의 돈을 빼돌린 거니까 힘을 좀 더 써야겠어.”

“그, 그중 태반은 회장님 지시로 이행한 겁니다.”

“아! 법원에서 그렇게 증명을 하면 되겠군. 물론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고 우리 쪽에서 손을 쓴 사람들이 모든 재판 과정을 진행할 걸세.”

저도 모르게 진태의 말투를 흉내 내고 있다는 느낌을 받은 준만이 쓴웃음을 지었다.

승환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납작 조아렸다.

“어떤 일이라도 하겠습니다. 한 번만 넘어가 주십시오!”

“흠… 어떤 일이든?”

“예, 시키는 건 모두 하겠습니다!”

준만은 다리를 꼬았다가 푸는 것을 반복하며 시간을 보냈다.

승환은 여전히 엎드린 상태로 몸을 떨고 있었다.

“앞으로 자네의 지분은 강빈이를 위해서만 움직이게.”

자신이 벌였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처사.

승환은 원래 재만을 지지하기로 결정했으나, 계약을 한 것도 아니고 번복하면 그만이었다.

“정말… 그거면 되겠습니까?”

“그래. 그걸로 아버지가 주도했던 일에 대해선 눈감아주지.”

“그게 무슨…”

“자네가 빼돌린 돈들은 전부 돌려놓게. 사회의 버팀목이 되어줄 기부단체가 이딴 짓을 벌이면,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어디에 기대야 하나?”

“...시간이 필요합니다.”

“시간이야 넉넉하게 3년 줌세. 그리고 혹여나 갚기 힘든 상황이 오면 자네 지분도 팔아버리고. 아, 참고로 나한테 오는 게 가장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을 거야.”

자신도 강빈이와 닮아간다고,

준만은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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