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준만이 오랜만에 태선호텔의 부회장실로 찾아왔다.
평소와 다른 점이 있다면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아버지. 저보고 물산 나오라고 하시지, 왜 먼 데까지 오셨어요?”
“할 얘기가 있다.”
준만은 곧장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고 나도 그의 분위기에 이끌려 하던 일을 멈추고 다가갔다.
준만의 표정이 워낙 확고해 농담 하나 던지기도 힘들어 보였다.
마침 준만이 온 것을 확인했는지, 황실장이 들어와 자리에 차를 내려놓았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심신안정에 좋다는 라벤더 차였다.
부드러우면서도 상쾌한 향이 났다.
준만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 말을 꺼냈다.
“강빈아. 나는 온 힘을 다해 너를 도울 거다.”
당연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준만에 의아했지만 나도 맞장구쳐주었다.
“네. 저도 최선을 다해서 아버지가 하시고자 하는 일을 돕겠습니다.”
“그래.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내가 돕는 걸로 하자. 앞으로 내가 어떤 선택을 해도 토 달지 말고 받아들여라.”
장난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했지만, 준만의 분위기가 너무 확고했다.
무엇이든 간에 일을 벌이리란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네 백부랑 범준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 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저희도 이제 움직여야죠. 아버지는 물산 쪽 사람들만 잘 독려해주세요. 나머지는 저에게 맡기시고요.”
“그래. 비록 내가 처음에는 힘 한 번 내지 못하는 쭉정이 같은 놈이었다만, 이젠 사람들과의 인연도 제법 깊다. 물산 쪽은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내 지분은 네가 갖는 게 좋겠다.”
“예?”
준만이 처음 태선물산 사장을 맡을 때부터 언젠가 내 몫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시기가 벌써 올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에 변화가 왔다.
언젠가 내가 태선가를 차지할 때, 물산은 준만에게 남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느낀 것이다.
그런 생각까지 들자 급할 것도 없어서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지금 얘기를 꺼낸 것이다.
그리고 지분을 모두 나에게 넘긴다는 말은,
“아버지. 설마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나시려는 겁니까?”
내 말에 비로소 준만은 시원하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부회장이 뭐라고. 부회장은 무슨. 다 아버지가 만든 겉치레 아니겠냐.”
“아버지는 일할 때 가장 즐거워 보였습니다. 저 때문에 포기하려는 생각이라면 관두세요. 아버지 물산 자리 유지하고도 제가 이길 수 있습니다.”
준만이 한숨을 푹, 내쉬고는 말했다.
“요 몇 년, 네 덕분에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을 보냈다. 태선증권에 박혀 있었다면 한평생 느껴보지 못할 그런 경험들이었지. 그리고 그 중심에 네가 있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내가 태선물산을 받을 일도, 태선물산을 여기까지 성장시킬 수도 없었을 거다.”
“그 선두에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한켠에 아버지가 있다는 생각에 제가 더 힘을 낼 수도 있었습니다.”
정말이다.
준만에게 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준만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모습을 보여주며 태선물산의 사장 자리를 거머쥐었었고, 안정적인 경영 능력으로 내가 바랐던 모습의 기업을 만들었다.
그리고 함께 기업을 이끌어나간다는 위안이 되어주기도 했다.
내 밑의 부하직원들, 에릭, 황실장, 영균, 기현이 아니라 나와 동등한 위치에서 같이 고민하고 공감하는 부분들이 있었다.
“정말… 그만두셔야겠습니까?”
“이미 결정했다. 네가 어떤 감언이설로 나를 유혹해도 오늘은 얄짤없어.”
“이유가 뭔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유…. 이유라.”
준만은 눈을 감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일단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에 대한 의욕을 잃었다. 내가 무엇을 이루어낸다 한들, 그걸 인정해줄 수 없는 사람이 사라졌다는 건 나에게 참 큰일이더구나.”
준만의 말에 깊게 공감되었다.
진태는 나에게도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예전에는 태선을 갖고자 하는 열망과 범준에 대한 복수심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면, 언젠가부터 진태에게 인정받는 것도 큰 동기가 되었다.
진태가 떠나고 난 지금도, 나에겐 진태와의 약속이 남아 있었지만 준만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아비로서 할 말은 아니다만 나도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하하.”
“한창 일할 나이 아니십니까?”
“부회장 자리도 해봤겠다, 물산이라는 큰 기업도 경영해봤겠다. 해볼 수 있는 건 다 하지 않았겠냐? 남은 여생은 네 엄마랑 알콩달콩 지내야겠다. 물론 네 힘이 될 만한 일이 있다면 언제든지 할 거다.”
“어머니 제가 패션사업 차려드린 거 기억 안 나세요? 이제 아버지만 실업자 되신 겁니다.”
“....”
준만은 눈이 살짝 커졌다가 웃어대기 시작했다.
나도 그런 준만을 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와서 준만의 결심을 되돌리긴 힘들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준만의 지분을 지금 당장 받게 된다면, 내가 태선을 삼킬 날도 더 가까워진다는 것은 분명하니까.
“그럼 아버지 자리에 앉힐 사람은 생각하셨습니까? 제가 부회장 자리 앉는다고 해도 실질적인 경영 맡을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미 얘기까지 끝낸 사람이 있다. 너도 알고 있는 사람이야.”
“역시 건설사 박현욱 사장입니까? 확실히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현욱은 마카오타워 시공에 전반적인 책임을 맡았을 뿐 아니라, 그 이후에 한국으로 돌아와 수많은 아파트들을 세우면서 건설 내의 입지를 단단히 했다.
다른 대기업에 비해 뒤늦게 한국 시장에 집중했음에도 순식간에 입지를 다진 것은 보면 능력에 대해 의심할 바가 없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현욱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준만은 고개를 젓고 있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물산 맡을 사람이 또 있습니까?”
“있지. 물산말고 어딜 가든 그 기업을 최고로 이끌 사람이.”
“예?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지금 태선경연의 대표를 맡고 있는 사람.”
“이채규 실장님…?”
“이제는 부회장이라고 불러야 될 게다.”
채규의 능력은 둘째치고, 준만의 부탁을 받아들였다는 게 의외였다.
진태가 살아있을 적에 그 누구의 편에도 서지 않았던 사람이 채규였다.
게다가 진태가 떠나고 나면 은퇴를 선언한 바도 있었다.
태선 경연의 대표를 맡은 것도 중립을 표명하려는 의도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태선물산의 부회장 자리라니?
“확실하게 얘기된 것이 맞습니까?”
“왜, 이 자리에서 전화 연결이라도 시켜주랴?”
“그건…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채규를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준만이 대체 무슨 조건을 제시했기에 채규가 받아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준만이 가볍게 결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사할 필요 없다. 이 실장님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강빈이, 너 때문이니까.”
“예?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실장님은 네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가길 바라고 있어. 태선이라는 왕관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 서강빈, 너라고 말이야.”
채규가 언젠간 내 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 적은 있었다.
그동안 진태에게 들어갔을 내 성과는 대부분 채규를 거쳐 들어갔을 거고, 그 성과 하나하나가 작은 일들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이렇게 내 쪽으로 대놓고 온다고는 생각 못 했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할아버지가 남긴 안배겠지.’
진태의 곁을 수십 년간 지켜왔던 채규가 나를 위해 움직일 거라 생각하자 가슴 한켠이 아렸다.
“실장님에겐 제가 따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래.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게다. 네 백부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아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지.”
“예. 편하실 때 말씀하세요.”
준만이 무엇을 더 숨기고 있는지 예상가는 것은 없었으나,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준만은 더 얘기하기엔 오늘 나눈 대화로도 충분히 버거울 테니까.
“아무튼 너는 네 일이나 잘하고 있어라. 나도 마무리는 제대로 지을 생각이니,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네 할아버지 유언 기억나지?”
“원하는 걸 다 이루어라.”
“그래. 나는 태어나서 이루고 싶은 건 다 이룬 것 같다. 기업가로서 오르고 싶은 위치에 올라봤고, 금쪽같은 아내에, 제 살고 싶은 대로 사는 아들, 가업을 이을 아들도 있어. 여기서 내가 더 바랄 게 뭐가 있겠냐. 그러니 강빈이 너도 너 원하는 건 다 이루고 살아.”
정말 후회없는 삶을 살았구나.
준만의 말을 들으며 문득 그가 부러웠다.
이루지 못해 죽은 삶이 떠올랐고, 이루기 위해 발버둥 치는 지금의 삶을 깨달았다.
“제가 원하는 대로… 그렇게 살아가겠습니다.”
준만은 더 말하지 않고 내 어깨를 두드렸다.
잃은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었다.
그것으로 부자간의 대화가 끝났다.
***
장례식장에서 남순이 우울해하던 것이 생각나 오랜만에 태선백화점에 찾아갔다.
이제는 익숙한 절차를 밟고 최상층, 그녀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부쩍 핼쑥해진 얼굴을 한 남순이 조용히 미소 지으며 반겼다.
“백화점에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예전에는 자주 찾아오더니.”
“네. 더 자주 찾아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미안하긴 무슨. 서로 바쁜 거 다 아는데.”
“약소하지만 제 선물.”
남순에게 바나나와 땅콩, 아몬드 등 트립토판이 풍부한 음식들이 담긴 바구니를 건넸다.
“어머, 이게 뭐니?”
“세로토닌이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호르몬이 있습니다. 그걸 만들어주는 게 트립토판인데, 그게 많이 들어있는 간식들입니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고마워. 감동이다. 정말.”
백화점까지 운영하는 남순에게 온갖 명품을 선물한들 좋아할까.
황실장이 준비한데다가 명분까지 만들어냈지만, 이보다 적절한 선물을 찾기 힘들 것이다.
“요즘 밥은 잘 드세요?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습니다.”
“챙겨 먹지… 사실,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어. 밥이 넘어가야 먹지.”
“미혜 누나가 잘 안 챙겨 줍니까?”
“미혜야 늘 바쁘지, 뭐. 결혼하고 박사 과정까지 밟고 있으니 오죽 바쁘겠니.”
미혜, 홍미혜는 남순의 외동딸로 현재 미국 유학 생활을 하고 있었다.
유학 생활 도중 미국인 남자와 눈이 맞아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진태의 장례식에 얼굴을 잠깐 비추긴 했는데 곧장 미국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나라도 챙겨 주겠다고 말하려는데 전화가 울렸다.
남순은 휴대폰을 들더니 갑자기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세요?”
“오늘 네 백부도 여길 찾아온다고 했거든. 지금 전화가 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