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발인 전날이어서 그런지 더 많은 조문객들이 몰려 왔다.
재만의 ‘예약제’를 철회시키며 관리는 더 까다로웠지만, 장례식장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훨씬 늘었다.
여야 정치권도 진태가 별세한 것에 대한 애도를 표했고, 일반인들의 추모 행렬도 오래도록 이어졌다.
나는 어느 정도 마음을 추스리고 문상객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정해산업의 박해창이라는 사람과 가볍게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홀로 장례식장의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보였다.
‘김태평 대표.’
그를 본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내가 잊을 리가 없었다.
홀린 듯이 그에게 다가갔다.
“편하게 들어오세요.”
“아…. 네. 서강빈 부회장님. 큰 슬픔에 뭐라 위로할 말이 없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직도 꿈인가 합니다.”
가볍게 눈을 내리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 부회장님은 제가 누구신지 모르지요. 저는…”
“성공투자증권의 김태평 대표님 아니십니까?”
“에, 예? 저를 어떻게….”
알다마다.
어떻게 모를 수 있겠는가.
강현재 시절, 내 입사 면접을 진행했던 성공투자증권의 현 대표를.
내가 성공투자증권의 대표가 된 것은 태평의 다다음이었다.
태평은 내가 내로라하는 증권사들의 입사 제의를 거절하고 성공투자증권에 가게 만든 데 가장 큰 이유였던 사람이었다.
굉장히 유한 성격이었지만, 성과에 있어서는 그 목표가 대단히 날카로웠다.
태평이 대표로 있었던 7년간 성공투자증권은 적법과 위법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타며 최대한의 이득을 쟁취해내 결국 업계 서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다.
그 시절 태평에게 불려갔을 때 떨었던 일을 생각하자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런 내 웃음을 태평은 실소라고 생각했는지 몸을 움츠렸다.
“제가 무슨 실수한 적이 있습니까…?”
“실수는요. 그저 꼭 한 번 뵙고 싶었는데 이런 자리에서나마 얼굴을 봬서 위로가 되었습니다.”
“부회장님이 어찌 저를….”
“겸손 떠실 필요 없습니다. 저도 증권사에서 몇 년간 본부장 일을 했기 때문에 이쪽 바닥에서 대표님이 얼마나 대단하신 분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하하…. 증권가에서 전설 같은 분이 저를 치켜세워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태평은 지금, 엄청난 실적을 올리며 성공투자증권를 성장시키고 있을 터였다.
그러기도 잠시, 곧 은퇴를 하겠지만.
“그보다 들어오시지 않고, 왜 밖에 서 계셨던 겁니까?”
“사실, 회장님과 일면식이 한 번 있었을 뿐, 장례식에 찾아올 만큼 연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애도하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입니까? 대표님의 마음은 충분히 잘 전달되었을 겁니다.”
“예. 회장님께 저는 스쳐 가는 인물이었겠지만, 저한테 회장님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두가 회장님의 말 한 마디면 몸을 떨었지요.”
태평의 말을 듣고 진태가 어떤 말을 했을지,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이 되었다.
이미 추켜진 눈썹을 더 추켜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겠지.
“저는 그런 회장님을 닮고 싶었습니다. 많이… 배우고 싶었어요. 그러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저도… 저도, 비감하기 한이 없습니다.”
설마 태평에게 내가 위로를 받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가 은퇴하고 몇 년 뒤에 폐암으로 사망하기 때문이다.
담배를 즐겨 피웠었지만 그는 정기검진을 가볍게 여겼고, 결국 초기 증상이 없는 폐암을 눈치채지 못했다.
폐암의 5년 생존율은 말기보다 초기가 10배 가까이 높다.
그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생각났다.
“대표님. 다음에 꼭 한 번 뵙고 싶은데 괜찮으십니까?”
“저야 부회장님이 뵙자 하면 달려가야죠. 오늘은 날이 아니니, 명함을 주신다면 제가 다음에 연락하겠습니다.”
태평도 전생의 나처럼 가진 것 하나 없이 이 자리에 올라왔던 사람이다.
내가 했던 노력에 더하면 더했지 그보다 못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도 언젠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장례식이 끝나고 벌써 한 달이 흘렀다.
추모의 물결이 채 사그라들기 전에 태선그룹은 빠르게 정상화되어가고 있었다.
나뿐만 아니라 심약해 보이던 남순도 장례식이 끝나고 회사 업무에 집중했다.
그녀의 강인한 정신력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고, 채규가 전한 진태의 유언도 한몫했을 것이다.
‘원하는 것을 다 이루면서 살아라. 그러기 위해 적당히라는 단어를 지워라.’
짧은 유언을 듣자마자 진태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던 진태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기도 하고.
현재 회장 자리는 공석이다.
일각에서는 앞으로 누가 태선을 맡을지에 대한 토론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유력하다고 점쳐질 사람은 아마 재만일 것이고.
나와 준만이 합친다면 재만보다 태선그룹의 보유 지분량은 많겠지만, 재만을 지지하는 세력까지 합친다면 비등하거나 재만이 그 이상이었다.
오랜 시간 태선전자를 경영해온 이력과 수십 년간 쌓아 올린 그의 촘촘한 관계망이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진태가 죽고 태선이 가장 어수선한 시기.
이 틈을 타 재만은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며 우호 지분을 얻고 있는 상황이었다.
벌써부터 계열사를 돌아다니며 주주총회를 열기 바빴다.
기현이 태선호텔의 부회장실로 찾아왔다.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기현은 사설 하나 없이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를 곧장 시작했다.
브리핑의 요지는 두 가지였다.
태선금융 계열이 대부분 정리되어 기현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이 첫 번째.
두 번째는 영만이 진태가 죽기 전 증여받은 지분으로 태선보험 지분이 40프로와 우호 지분까지 포함하면 경영권 방어에 수월하다는 것이다.
“우리 쪽 지분은?”
“GB 한국 지사에서 매수한 게 8.7프로, 태선증권에서 갖고 있던 지분이 3.1프로로 약 12프로 정도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선보험의 지분을 갖고 있는 임원들 중 포섭이 거의 확정된 사람들의 지분은 5.5프로입니다. 다 합치면 17프로가 조금 넘습니다.”
“턱없이 부족하군.”
영만이 갖고 있는 태선보험의 지분이 나의 3배는 넘었다.
그렇다고 해서 불리하다는 건 아니지만.
일단 영만은 진태에게 증여받은 지분에 대한 증여세를 낼 돈을 갖고 있지 않다.
다년간 분할로 낸다고 해도, 지금 당장 낼 돈이 없는 것이다.
그의 비자금과 지분을 제외한 개인자산은 태선카드를 살리는 데 몽땅 써버렸으니까.
“먼저 다가가진 않되, 서영만이 먼저 컨택하면 피하지는 마. 서재만이 먼저 움직일 수도 있으니까 움직임 주시하고.”
“예.”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본격적인 경영권 싸움이 시작되었다.
***
강남의 한 오래된 선술집.
평소라면 신나는 노래와 사람들의 대화 소리로 떠들썩할 시간대였지만, 오늘은 잔잔한 노래도 틀지 않은 채 조용했다.
입구로 재만이 들어오자, 현 태선물산의 부사장인 계춘은 벌떡 일어났다.
계춘은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자 애썼지만, 긴장으로 얼굴이 굳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석에서 뵙는 건 처음이네요. 영광입니다. 부회장님.”
“하하. 나도 반갑네.”
재만은 계춘과 가볍게 손을 쥐고 자리에 앉았다.
“그래. 최근 물산의 분위기는 어떤가?”
“부회장님.”
“응?”
계춘이 양주 한 병을 따더니 재만 앞에 따르고 말했다.
“그 전에 확실하게 말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이 사람. 뭐가 이렇게 급해? 하하. 원하는 게 뭐야. 말해 봐.”
계춘은 긴장되는 통에 차가운 공기에도 몸에서는 땀이 나고 있었다.
눈알을 굴리며 눈치를 보다가 말을 꺼냈다.
“부회장님이 회장 다시면… 제가 물산 한번 맡아보고 싶습니다.”
재만은 기가 찬다는 듯 실소하다가 말을 이었다.
“이거, 윤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욕심이 많은 친구구만. 자네가 가진 물산 지분이 얼마나 된다고 그랬지?”
“1프로가 조금 넘습니다.”
다른 기업도 아니고 태선물산의 1프로.
재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지지할 것을 약속하고 따라온다면, 그 자리. 내가 약속해주겠네.
“감사합니다!”
계춘이 다시 벌떡 일어나더니 허리를 굽혔다.
“물론, 지금 그 자리에서도 최선을 다 해야 될 거야. 물산 행보, 서준만, 서강빈이 뭘 하는지 낱낱이 나한테 보고하게.”
“예. 부회장님의 눈이 되겠습니다.”
“좋네. 선수금이라면 뭣하지만, 자네 막내아들 일자리 구하고 있지 않나?”
“그, 그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그거 알아보는 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놀라나? 아무튼 아들놈 내일부터 전자 꼭대기 층으로 출근하라고 해. 인사팀 자리 하나 비워둠세.”
계춘의 만면에 웃음이 가득 들어섰다.
막내아들을 태선물산에 입사시킬 수는 있었지만, 준만 눈치 보랴, 강빈 눈치 보랴, 밑바닥에서부터 일을 시켜야 될 것이다.
그런데 인사팀이라니?
그것도 태선전자의 인사팀이라면 그룹의 핵심과도 같은 부서 아닌가.
사회초년생이 들어갈 수 있는 곳 중 태선전자의 인사팀과 비견될만한 곳은 없을 것이다.
“무조건 충성하겠습니다. 부회장, 아니 회장님!”
***
준만은 방 안에서 턱을 괸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지만, 반응하지 않았고, 이내 문이 열렸다.
“여보.”
영혜의 목소리였다.
근 며칠 동안 퇴근 후 방에만 박혀 있었더니 걱정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이야? 얘기를 해야 알지.”
“일은 무슨.”
“아버지 때문이지?”
“....”
영혜가 뒤에서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늘 사실대로 토하게 만드는 따뜻함이었다.
“이래도 말 안 할 거야?”
“... 여보. 맞아.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될지 모르겠어. 재만이 형은 벌써부터 계열사들 돌아다니고 있다는데, 나는 그럴 만큼 강한 사람이 못 돼. 아버지 죽은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고. 그리고….”
진태가 죽기 전에 자신에게 건네주었던 비자금 장부는 이런 준만을 더 혼란스럽게 했다.
“나는 당신 다 이해해. 당신이 뭘 하든 나는 당신 편이야.”
영혜가 준만을 더 끌어안았다.
준만이 힘든 세월을 보내는 동안 영혜는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러니 이제는 그가 영혜를, 가족을 뒷받침해주는 가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준만은 나지막이 물었다.
“강빈이는 포기할 생각 없겠지?”
“응. 그런 아이니까.”
그런 아이.
강빈은 어렸을 때부터 제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꼭 손에 쥐어야 되는 아이였다.
언젠가부터 사고 치는 일이 줄었고, 원하는 것이 스포츠카에서 건강한 방향으로 바뀌었지만 그 습성만은 똑같았다.
내가 짊어지겠다.
준만은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