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장례식장으로 들어가려는데, 뒤에서 잠깐 소란이 있었다.
이번에도 예약을 하지 않았다고 경호 팀이 내쫓는 모양이었다.
“저희 집 바깥양반과 시어머니가 서회장님과 각별한 사이였어요. 모두 먼저 가셨지만 별세 소식을 듣고 찾아온 거예요.”
“예약하지 않은 분은 들어오실 수 없습니다.”
“아니, 도대체 조문만 하겠다는데 대체 왜 막는 거예요?”
눈앞에 여자는 낯익은 인물이었다.
진태와 두 번 갔었던 인천 백반집, ‘미소 식당’의 주인인 김씨가 죽고, 식당을 이어받은 그의 부인이었다.
진태의 도움으로 집안이 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노인의 허리는 굽어 있었고,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저 몸 상태로 그저 감사함을 표하러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제가, 저희 집이 서회장님에게 빚진 게 많아서 그래요.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더 말씀 안 드리겠습니다. 돌아가세요.”
경호원의 말을 듣고 그녀가 제 품에서 봉투를 하나 꺼냈다.
“그럼 이것만이라도… 전해주세요.”
“그것도…”
“저 주세요. 할머니.”
보고만 있기 힘들어 다가가려는 찰나, 영빈이 나타나 봉투를 받았다.
김씨 부인은 그런 영빈을 보며 고맙다고 말했고, 영빈은 손사래를 쳤다.
그렇게 작은 사건이 일단락되었다.
영빈은 불쾌하다는 눈빛으로 경호 팀을 노려보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어? 강빈아. 언제 왔어?”
“방금 막 오는 길이야. 형은?”
“나는 어제 집 가서 잤다가 지금 오는 길이야.”
“고생했어. 그리고 저건… 처음부터 그런 거지?”
영빈이 뒤돌아 경호 팀을 한 번 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응. 태선전자에서 지시한 거라더라. 세상에 말이 되냐, 장례식장에 무슨.”
“아버지는 별말 없으시고?”
“모르는 눈치야. 안에서 나온 적도 없으실걸? 할아버지 떠난 게… 많이 힘드신가 봐. 너도 얼굴 보면 알 거다. 아무튼 아버지한테는 별 얘기하지 마.”
“그래.”
마냥 철없어 보이던 영빈도 이제 머리가 굵었는지, 남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안다는 게 기특했다.
며칠간 진태의 서재에서 멍하니 앉아 있던 나를 대신해 준만을 챙기고 있던 것은 영빈이었다.
이제는 제법 의젓한 모습이었다.
영빈과 함께 장례식장에 들어가자 가장 먼저 검은 조복 차림에 오른팔에 완장을 차고 있는 남순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에 다크서클이 짙은 남순의 얼굴은 생경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다음으로 보이는 것은 준만.
준만은 의자에 앉은 채 문상을 온 태선 건설의 사장, 현욱을 상대하고 있었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누가 보더라도 수척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준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 왔구나. 박 사장. 잠시만 얘기하고 와도 되겠나?”
“예. 그럼요. 부회장님은 앉아 계십시오. 제가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나와 마카오타워 시공권을 따내며 안면이 있었던 현욱은 나에게도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도 별 말없이 고개를 숙임으로써 감사를 표했다.
“조금 늦었구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곳에서?”
“예.”
“마지막은, 마지막은 어떠했냐.”
“평소와 같이… 덤덤하고, 조용하게. 저를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준만이 옅게 미소를 짓고 말했다.
“그래. 너한테 만큼은 그런 모습을 보이셨지. 늘 장승처럼 화난 표정을 짓던 사람이 말이다.”
준만이 아련하게 한쪽 벽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진태의 영정사진이 걸려 있었다.
5년 전쯤 찍었던 사진일까, 그의 눈매는 여전히 화난 듯 추켜올려져 있었고 입은 어딘가 심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영정사진 아래 재만이 보였다.
그의 목소리는 열 걸음은 떨어져 있는 나에게도 선명히 들려왔다.
“...해서 이제는 제가 그 역할을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하. 비서관님께서 잘 봐주십시오.”
그의 옆에는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비롯해 재만에게 뭐라도 얻어내려는 심산인 사람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재만의 왼쪽 팔에는 줄이 두 개 그어진 완장을 채워져 있었다.
태산가의 장남이자 상주인 재만은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진태의 영정사진이 마치 그의 성과라도 되는 것처럼 자리를 그렇게 잡았다.
나도 모르게 재만을 노려보고 있었는지 준만이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냅둬라. 애도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법이야. 네 백부는 저런 식으로 아버지를 잃은 슬픔을 달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 준만은 이런 사람이었다.
형제들에게 지독한 괴롭힘을 받고도, 끝내 원망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
그러나 나는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준만의 손을 뿌리쳤다.
“강빈아….”
“할아버지의 장례식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큰 소란은 피우지 않을게요.”
조문을 해야겠다고 밝힌 사람들을 쫓아내라고 지시를 내린 장본인.
진태의 장례식을 기만한 사람이 내 눈앞에 있었다.
“아무튼 이사장님은… 뭐냐?”
재만이 표정을 굳히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계신 분들은 모두 약속하고 오신 분들이겠지요?”
“...뭐?”
“여기가 식당도 아니고 예약하지 않으면 못 들어온다는 소리를 들어서요. 아까 할아버지의 친척분도 쫓겨나셨다는데, 여기 계신 분들은 대체 어떤 분들이길래 들어올 수 있었던 겁니까?”
나를 노려보던 재만은 아차, 싶었는지 옆에 있던 무리들에게 말했다.
“하하. 아무래도 제 조카 놈이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봅니다. 잠깐 얘기하고 와도 되겠습니까?”
“부회장님 편하신 대로 하세요. 하하. 저희야 문상 온 거지, 달리 일이 있어 왔겠습니까?”
수석비서관이 대표로 말을 하고 옆에 있던 사람들도 호응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윤시헌 수석비서관님, 조승환 이사장님, 장해욱 사장님… 그리고 나머지 분들. 모두 예약하고 오신 게 맞습니까?”
“예약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저는 언질받고 오긴 했습니다만…. 무슨 일입니까?”
수석비서관과 이사장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나머지는 그놈의 예약이라는 걸 하고 온 모양이었다.
“이상하네요. 태선가 사람이 아니라면 모두 예약이란 걸 해야 들어올 수 있다고 하던데요. 설마 백부님. 사람을 가려가면서 입장시킨 겁니까?”
예약을 하지 않아도 프리패스된 사람과, 예약을 하고 들어온 사람의 표정이 극명하게 갈렸다.
재만과 그들 사이에 실금이 가는 게 눈에 보였다.
재만이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말했다.
“제가… 나중에 설명 드리겠습니다. 너는 일단 나 좀 보지.”
“그러시죠. 그럼.”
나는 얼굴에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그들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재만은 나를 데리고 복도로 나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백부님이야말로 무슨 짓을 하는 겁니까.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영업을 뛰다니.”
“생각없이 말하는 건 너나 네 아비나 똑같구나.”
“그 모습은 할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겠죠. 백부님도 하시는 일을 보니 매한가지로 물려받은 듯한데 화내시는 이유가 뭡니까?”
“너…!”
재만이 내 어깨를 잡으려는 것을 손으로 쳐냈다.
“장례식입니다. 할아버지 가시는데 이렇게까지 해야겠습니까.”
“네가 상관할 바 아니다. 지금 분위기를 흐리고 있는 게 누구인 것 같으냐?’
복도가 쥐 죽은 듯 조용하다는 것은, 불과 몇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장례식장 안에서 침묵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과 같았다.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진태만을 애도해야 하는 이 자리에서, 나도 재만과 이런 식으로 관심을 끄는 것이 애석했다.
그럼에도 이런 식으로 일을 끌고 온 이유는 바로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저도 기자나 관계없는 사람들까지 들어오는 것은 반대입니다.”
“그런데…”
“그런데 예약제라니, 이게 뭐 하자는 겁니까? 게다가 수석비서관과 이사장은 절차도 없이 그냥 들여보내다니요? 이게 장례식장을 영업장으로 만드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네가 어려서 모르나 본데, 정재계 인사가 한자리에 모이는 게 흔한 일이 아니다. 너도 나이가 들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말이 얼마나 건방진 소린지 알 게다.”
머리가 굵어지면 제 아비의 장례식에서 장사판을 열어도 상관없다는 소리인가?
대화로 설득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내일 기사로 낼 제목 중 생각난 것이 있는데, 서진태 회장 빈소에 친인척 문전박대, 하지만 정계 인사들은 출입. 어떨까요. 이슈몰이가 되겠습니까?”
“아버지를 욕보일 셈이냐.”
“욕보인 사람은 제가 아니라 이번 장례식을 주관한 태선전자가 되겠지요. 아, 백부님은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겠지만, 의혹과 함께 태선가에 대한 비난은 따라올 겁니다.”
“너는 태선을 갖고 싶은 게 아니라 무너뜨리고 싶어 하는구나.”
“이 정도로 무너진다면 그게 태선이겠습니까? 잠깐 타격이 있다 말겠죠. 다만, 백부님의 인성은 길이길이 남도록 제가 힘써보겠습니다.”
재만은 분을 삭이려는 듯 눈을 감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이미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을 내쫓기라도 하라는 거야?”
“설마요. 다만 애도하고 싶은 사람에게 애도할 기회를 주자는 겁니다. 사람 가려 받지 말고, 할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싶은 사람들은 오게 해주자고요.”
재만이 예약제를 시행하고, 사람들을 가려 받으면서 얻은 것은 뻔했다.
장례식장에 들어올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 특권 의식을 주고, 그 대가로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것이다.
진태는 자신의 죽음마저 사업에 쓰인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어쩌면 진태라면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제 뼈라도 내놓을 사람이 진태였으니까.
그러나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진태의 마지막을 모두가 애도했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의 죽음을… 상품화하지 말자는 겁니다.”
“말 가려서 하거라. 상품화라니. 그리고 사람을 가려 받는 데 이유가 필요하냐? 그러다가 허튼 생각하는 사람이 와서 난리라도 피우면 네가 책임질 수는 있고?”
재만의 마지막 말이 도발처럼 들렸다.
마치, 내 말대로 한다면 사람을 시켜 장례식장을 망치기라도 할 것처럼.
“예.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런 사람이 나타나면 어떻게 해서든지, 누구의 지시인지 끝까지 알아내고 처리할게요. 그럼 되겠습니까?”
재만은 말을 잃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고, 나는 몸을 돌려 예약을 확인하고 있는 1층으로 향했다.
진태의 죽음을 순수하게 애도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