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그래도 태선전자서비스와 태선전자 지분을 모두 갖고 온 것은 큰 수확입니다.”
“그래…. 증여세가 터무니없긴 하다만 조율해서 6년에 걸쳐 갚으면 되니 감당 가능한 수준이다.”
전체적으로 검은 톤으로 인테리어 되어 있는 방 안.
재만은 범준과 진태의 증여에 대해서 대화하고 있었다.
재만은 범준의 잔에 고급 양주를 가득 따라주고 말했다.
“네가 해야 될 게 무엇인지 알고 있냐?”
범준이 두 손으로 양주를 받고는 공손히 재만의 잔에 양주를 따르며 말했다.
“그럼요. 중공업 문양기 부사장하고는 벌써 컨택했습니다. 유통 쪽의 택배는 건들기 힘들고…. 존마트 사장은 두고 봐야 될 같습니다.”
“오히려 물산보다도 네 작은 고모를 노려야 돼. 남순이는 여린 아이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면 정신 못 차릴 거야.”
“그걸 이용해서 계열사 흔들고 지분 가져오자는 얘기 아닙니까.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아버지가 증여해줄 지분을 합쳐도 남순이의 지분은 40프로 언저리다. 임원들과 주주들만 우리 쪽에 끌고오면 승산 있는 싸움이야.”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재만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양주를 주욱 들이켰다.
멀지않은 과거에, 범준은 늘 노력하는 사람이었지만, 갖고 오는 성과는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던 범준이 더 악착같이 마음을 먹더니 이제야 그 노력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태선식품에서부터 서서히 실적을 보이더니, 태선전기서비스의 사장으로 오르고 나서는 제 능력을 어김없이 발휘하고 있었다.
양주를 입에 머금자 달짝지근한 계피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범준은 벌써 술이 오른 듯 홍조가 물들어 있었다.
재만도 술기운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시간 싸움이다. 지금이야 내 편을 들어줄 사람이 많지만, 시간이 지나면 자본이 많은 서강빈 쪽으로 많이 기울 거야.”
“예. 일단 유통 쪽 좀 더 컨택해보겠습니다.”
“그래. 지분은 살 필요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상기해라. 반의반, 아니 반의 반의 반만 가지고도 사람을 얻으면 쥘 수 있는 게 회장이라는 자리다.”
“명심하겠습니다. 존마트 사장도 계속 컨택해 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재만은 일어나서 제 방 책꽂이에 꽂혀 있던 서류 봉투를 들고 왔다.
그리고 범준에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우선 한잔하고.”
재만은 범준의 잔에 다시 한번 술을 가득 따랐고, 제 잔에도 술을 채웠다.
재만이 먼저 술을 들이켜고, 범준이 뒤따라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으으….”
범준은 재만의 눈치를 보다가 제 가슴을 한 번 쓸어넘겼다.
그리고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재만을 바라봤다.
“이제 봐도 되겠습니까?”
재만이 눈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범준은 서류 봉투 안에 손을 넣어 안에 있는 것들을 꺼냈다.
익숙한 종이에 촉감과 함께 매끈한 것이 만져졌다.
“사진…? 웬 사진들입니까?”
서류 봉투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다양한 연령대의 여자들의 사진과 서류들이었다.
“네 수준에 맞는 건 샤롯, 에스지, 유엘…. 한국 내로라하는 회장들 손녀들이다. 오름마트 사장 딸내미도 있는데 존마트를 꺾는 데 도움이 될 테지. 그 이후에 이혼해도 상관없지만 출혈은 계산해야 될 테고. 그리고 오한중공업 사장…”
“아버지. 이게 뭐냐고 물었습니다.”
아까보다 홍조가 더 짙게 물든 범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저보고 지금 아버지를 위해 팔려 가라는 겁니까…?”
“방금 네가 한 말에 두 가지가 틀렸다. 둘 다 정정해주지. 하나는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안을 위해서고, 하나는….”
방금 전까지만 해도 눈웃음을 짓고 있던 재만은 표정을 굳힌 채 범준을 바라봤다.
“해달라는 게 아니다. 하라는 거다.”
범준은 초점 잃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태선전자의 부회장실에 도착한 재만의 입가에 웃음이 피었다.
범준이 컨택했던 세 명이 모두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재만 부회장님! 한참 기다렸습니다. 하하.”
“왜 이제야 불러주신 겁니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례대로 태선중공업의 문양기 부사장, 태선전기의 박노열 사장, 태선재단의 조승환 이사장이었다.
양기와 노열은 일어나서 재만을 반긴 반면, 승환은 앉은 채로 재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각 직급에 맞는 권력뿐만 아니라, 임원 중에서도 태선그룹의 지분을 꽤 손에 들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선택한 사람이 재만, 자신이라는 생각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거, 귀하신 분들이 오셨습니다. 하하. 제가 늦은 건 아니지요?”
“약속하신 시간에 딱 맞춰서 오셨는데요, 뭘. 하하! 워낙 바쁘신 분 아닙니까. 저희 같은 사람들이야 기다림은 늘 익숙한 법이지요.”
양기가 먼저 알랑방귀를 뀌었고, 노열이 이를 이었다.
“조금 늦게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미래의 회장님 만날 생각에 긴장되지 뭡니까? 하하.”
재만은 아예 만면에 웃음을 띠고는 받아쳤다.
“회장이라니요. 하하. 아직 회장님이 계시는데, 큰일 날 소리를 다 하십니다.”
“아니 그럼 서재만 부회장님 말고 누가 그 자리를 맡겠습니까?”
“그건… 맞는 소립니다! 하하.”
“하하하.”
그렇게 방 안은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그때, 분위기를 바꾼 것은 처음 인사 이후에 가만 앉아 있던 승환이었다.
“요새 서강빈 부회장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아졌습니다. 심지어 태선전자 산하에 있는 오치동 사장도 그렇지 않습니까.”
승환이 산통을 깨자 재만의 얼굴이 일순 굳었으나 곧 풀고는 말했다.
“반도체 사장이야… 제가 얼마든지 갈아치울 수 있는 자리 아닙니까.”
“서강빈 부회장이 최대 주주인 마당에 어떻게 바꾸겠다는 말입니까?”
“그건….”
“부회장님.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막연하게 부회장님을 지지하겠다고 선언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는 아직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으로 갈 겁니다.”
태선재단은 비상장기업에, 그룹의 실질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재만이 승환과 컨택하고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오직 그가 가지고 있는 태선그룹의 지분 때문이었다.
전자와 물산, 이 핵심이 되는 두 기업에 승환이 갖고 있는 지분은 소수점 첫 자리도 되지 못했지만, 금액으로 따졌을 때 수백억 원에 달하는 가치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재만은 예상치 못한 증여세 폭탄까지 받으면서 지분을 추가 매수하기는커녕, 지키는 데 갖고 있는 현금을 쏟아 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환같은 대주주는 반드시 잡아야 하는 사람이다.
재만이 감정을 갈무리하고 차분하게 얘기했다.
“이사장님. 서강빈 부회장이 몇 번의 투자 성공으로 꽤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것은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서강빈 부회장이 그걸 실력으로 이루었겠습니까? 요행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입니다.”
“요행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 많은 성공이 있었을 텐데요? 서강빈 부회장이 뭐라고 불리는지는 아십니까?”
“....”
“실패하지 않는 투자자.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처음 이렇게 부른 뒤로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더군요.”
승환은 깍지를 끼고는 말했다.
“부회장님. 제 재산의 태반 이상이 태선그룹의 주식입니다. 그리고 결코 작지 않은 지분이라는 것은 부회장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말씀 이어서 하시죠.”
“그리고 저는 공격적인 투자보다는 안정적으로 그룹을 이끌어나갈 분의 손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부회장님의 말대로 서강빈 부회장의 ‘운’이… 언제 다 할지 모르니까요.”
승환의 말을 다 들은 재만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저는 이사장님이 서강빈 부회장 편을 드는 줄로만 알았지 뭡니까.”
승환이 한쪽 입꼬리를 슥 올리며 말했다.
“부회장님 경영 능력이야 잘 알고…. 이번에 태선전자 지분도 전부 넘어간 걸 아는데 제가 어떻게 서강빈 부회장 쪽을 지지하겠습니까. 심지어 부회장직으로 있는 태선호텔의 지분도 단 1프로도 증여받지 않았던데요.”
승환의 말에 재만은 진태가 유산 분배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분명, 진태는 강빈을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기이하게도 단 한 푼의 지분도 증여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만큼은 간이 서늘해지는 느낌을 받았으나, 다음 날이 되고는 오히려 호재였다.
임원들과 대주주들은 재만이 태선전자의 지분을 증여받고, 강빈은 조금의 지분도 증여받지 않았음을 확인하고 재만을 차기 회장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재만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사장님이 염려하시는 부분은 잘 알겠습니다. 서강빈 부회장의 그 깨지지 않는 성공 신화…. 제가 어떻게든 한 번 깨보도록 하겠습니다.”
말 그대로 강빈은 어떤 투자를 진행하더라도 절대 실패하지 않았다.
아니, 실패는커녕 늘 어마어마한 수익을 내왔다.
강빈을 지지하는 세력들의 절대적인 신뢰는 여기에서 온 것이나 다름없다.
“사실… 저도 생각해둔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
진태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즐겨 먹었던 송로버섯은 고약한 향기를 뿜어냈고, 전복은 입에 댈 수 없을 만큼 비릿했다.
이천에서 갖고 왔다는 최상등급의 쌀로 만든 죽은 설익은 것처럼 잘 씹히지 않았다.
“이딴 음식을 지금 먹으라고 갖고 온 게냐?”
진태의 말에 음식을 갖고 온 주방장이 벌벌 떨었다.
“다, 다시 가지고 오겠습니다.”
주방장이 죽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쓰읍, 저놈이 어디서 왔다고?”
“... 미국 베벌리힐스에 있다는 호텔 아스토리아 출신입니다.”
채규는 설명하면서도 묘한 느낌을 받았다.
베벌리힐스 안에서도 아스토리아는 5성급 호텔로 특히 요리가 유명한 곳이었다.
그런 주방장이 정성껏 만들어온 송로버섯 전복죽을 진태는 맛없다고 돌려보낸 것이다.
“재료 품질은 검사했고?”
“예…. 저희 주방에 들어오는 모든 음식은 경호팀에서 검수를 하는 거 아시잖습니까.”
“....”
“회장님… 병원에 가서 검사를, 아니 상주의사를 불러오겠습니다. 간단한 검사라도 진행하시죠.”
“아니야… 아니다, 채규야.”
진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반쯤 일어섰다가,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허…?”
진태의 얼굴이 일그러졌고 채규는 그런 진태를 보며 굳었다.
“회장님. 안 되겠습니다. 태선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채규가 실례를 무릅쓰고 진태를 부축하려던 찰나 진태가 말했다.
“오늘이 그 날인가 보다.”
말을 뱉고나니 진태는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느낌이었다.
“채규야. 강빈이를 불러와라.”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놈이 한 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