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진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때까지 본 적 없는 밝은 미소로 대답했다.
미소 안에 누런 이빨이 보였고, 퍼석한 입술이 갈라졌다.
퍽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지만, 그 순간 위로받는 느낌이 들었다.
위로받지 못한 지난 삶에 대하여.
그리고 정적이 있었다.
진태와 내가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동안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
정적을 깬 것은 서재로 들어온 진태의 제 2경호팀의 실장, 채보였다.
채보는 거대한 몸뚱아리가 안쓰러울 정도로 몸을 굽히고는 말했다.
“...대단히 송구스럽지만 회장님께서 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무슨 일인데?”
“그게… 회장님의 첫째 따님이 찾아왔습니다.”
진태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래서?”
“그게…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때 서재 밖에서 귀를 찢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버지!!”
모두가 듣기 싫은 소음에 인상을 찡그리는 와중에도 진태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내쫓아라. 두 번 다시 이 집에 찾아오는 일 없도록 조치해.”
“알겠습니다. 그럼… 실례했습니다.”
여전히 밖에서는 비명 소리에 가까운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채보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이윽고 정순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아버지, 그래도….”
“이 얘기는 하고 싶지 않구나. 너도 이 일에 대해선 함구해라.”
남순이 서재 밖을 힐끔거리다가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떨궜다.
그러나 남순은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한 번 재벌은 적어도 3대까지는 재벌이다.
정순이 모든 것을 잃은 것처럼 굴어도 진태가 죽고 상속될 유산만 최소 수백억 원일 것이다.
방금 증여한다고 밝혔던 모든 지분을 빼고도 말이다.
그런 짓을 벌이고도 평생 놀고 먹을만한 돈은 갖고 있을 테니 재벌이라는 게 참 뭣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다른 경우도 있다는 걸 알려주기라도 하듯, 진태가 말했다.
“내일 내가 살아갈 돈만 빼고 모두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영만이었다.
“예…? 현금을 전부 기부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귓구녕이 막혔냐?”
진태의 대답으로 확정 지어지자 재만이 성큼성큼 다가가 말했다.
“아버지. 차명으로 된 주식 빼고 아버지 명의로만 된 지분을 증여받으려면 최소 1조, 아니 최소 2조 이상은 내야 될 겁니다. 갑자기 그러시면 저희는 어떻게 지분을 받으라는 겁니까. 수중에 있는 돈 다 털어도 5천억이 안 됩니다.”
재만은 진태가 갖고 있는 현금을 욕심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태선전자의 지분을 받음으로써 그가 세웠던 목표는 달성했을 것이다.
문제는 증여세.
한국의 살인적인 재벌 증여세는 세율이 50프로가 넘는다.
차명으로 된 지분은 제외하더라도 진태의 지분을 넘겨받는 데만 수조 원이 필요한 것이다.
남순이야 늘 안정적인 것을 추구하니 모아둔 현금이 꽤 있을 거고, 준만은 내 도움을 받으면 된다.
애초에 그 둘을 노리고 진태에게 부탁했던 것도 아니었고.
영만은 태선보험의 지분만 받았으니, 몇 년에 걸쳐 세납한다면 감당할 만한 수준일 테고.
문제는 갑자기 세금폭탄을 맞게 된 재만에게 있을 것이다.
재만이 거친 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러려고 제가 비상장으로 기업 하나 내자 했던 걸 거절하신 겁니까?”
호오, 모르던 사실이었다.
하긴, 재벌 기업이 상속하는 과정에서 비상장 계열사의 주식을 취득하게 한 후 그 계열사를 상장시키는 방법으로 경영권을 승계하는 것은 가장 흔한 방법이니까.
지금 시대라고 해서 그 방법을 생각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그 방법대로 진행하려면 최소 2년 전부터는 준비했어야 할 텐데, 진태가 그때부터 거절했던 모양이었다.
진태는 재만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네가 감당하지 못할 것을 준 모양이구나. 그럼 전자 지분을…”
“아버지!”
“어떻게 할래. 증여세 직접 납부하고 곱게 받아갈래, 아니면 넘길래.”
당연하게도, 이미 답은 정해져 있었다.
재만은 받아들였고, 더 이상 잡음은 없었다.
그보다 사회에 모든 재산 환원이라니… 정순이 잘 먹고 잘살 거란 말은 취소해야겠다.
그다음 이어진 진태의 말은 나조차 예상하지 못했다.
“태선경연과 태선기획은 채규 줬다.”
“...!”
두 기업 모두 계열에 속하지 않고 오직 진태 소속의 비상장기업이었다.
태선기획은 태선그룹의 광고를 총괄하며 세간에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태선경연은 달랐다.
경제연구를 표방하지만, 태선그룹의 실질적인 결정권을 쥐고 있고, 그렇기에 진태의 혈육들조차 함부로 손댈 수 없는 권력을 가진 곳.
물론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진태의 힘이 컸고, 모든 지분을 자식들에게 내주고 책임자를 채규로 임명한 이상 많은 힘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그룹 중추의 임원들을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곳임에는 틀림없었다.
진태의 지분이 쪼개진 이상, 임원들과 주주들의 지지가 급부상할 것이다.
만약 채규가 아닌 재만에게 태선경연이 넘어갔다면, 그것만은 아찔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태선경연이 재만 쪽을 지지한다면, 그룹 임원들이 누구를 지지할지는 눈에 뻔한 일이었으니까.
아마 진태가 자식들에게 태선경연을 넘기지 않고, 채규에게 넘긴 것은 가장 중립적으로 태선을 위한 결정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갑자기 쥐어진 큰 권력은 많은 위협을 받을 것이고, 부담스러운 자리다.
게다가 태선경연은 수익을 내는 그룹이 아니라 오히려 적자를 내는 기업.
태선기획은 태선경연을 맡는 것에 대한 보상일 것이다.
‘이실장님한테도 경호가 필요하겠어.’
재만이 채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것을 느꼈고, 범준 또한 무슨 꿍꿍이인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채규는 그저, 이곳에 왔을 때부터 했던 부동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아마 진태에게 모든 것을 전해 들었을 테고, 위험과 부담을 오직 진태를 위해서 받아들였을 것이다.
채규에게 진태는 끝까지 따라갈 사람이었고, 진태에게 채규는 끝까지 따라올 사람이니까.
상하관계를 떠나 그 둘 사이에 끈적한 신뢰가 보이자, 진태가 몹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도 평생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생길 수 있을까.
강현재의 삶은 고독했다.
누구도 믿지 않았고, 누구도 나를 믿지 않았다.
그렇게 혼자 살아왔고 고독하게 죽었다.
이 두 번째 삶은 어떠한가.
누구에게 내 평생을 맡길 수 있겠는가.
누구에게 내가 두 번째를 살아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고독한 사람이었다.
***
자신의 혈육들을 모두 내보낸 진태는 의자에 기대어 목을 젖혔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경호팀까지 모두 물린 채 채규와 단둘이 남자 진태는 비로소 몸을 떨었다.
“간호사를 불러 진통제라도 투약하시겠습니까…?”
“조금은 더 깨어 있고 싶네. 이렇게 떨리고 뼈가 시리지만 그래도 살아있다는 건 알겠어.”
“... 알겠습니다.”
진태의 고집을 알기에, 채규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진태의 몸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진태가 말했다.
“너도 알겠지만 내가 자식 교육에는 영 소질이 없어.”
“제가 무능한 탓입니다.”
“정순이, 동만이 그렇게 내치고 다른 자식 놈들도 내 목을 노리는 뱀 새끼처럼 보인다.”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산송장 다 돼서 내 목숨 날아가는 건 무섭지 않아. 다만 태선이 무너질까, 그거 하나가 두려워.”
“저는 끝까지 회장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채규야.”
진태가 몸을 움츠리며 담요를 끌어 올리고는 말했다.
“내가 죽거든, 2경호팀은 채규 네가 써라.”
“그런 약한 소리 하지 마십시오. 회장님과 안 어울립니다.”
“지금처럼 뒤에서 경연을 이끄는 게 아니고, 공식적으로 자리를 맡으면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놈들이 많을 거야. 빗댄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죽을 수도 있는. 태선경연 대표란 그런 자리다.”
태선그룹의 지분도 없었고 수익은커녕 적자만 내는 기업이었지만, 태선경연이라는 힘이 태선그룹 내에서 갖는 힘은 막강했다.
태선전자, 태선물산 등 그룹의 내로라하는 두 기업들과의 내부거래가 이루어진 곳이며, 준만에게 건넨 회계장부를 작성한 곳도 바로 태선경연이었다.
그뿐인가, 태선경연에서 만든 국정과제와 국가 운영에 대한 보고서는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될 정도로 정계에서도 입지가 단단했다.
그만큼 그 권력을 노리는 하이에나들이 꼬일 것이고, 진태는 이 모든 것을 알면서도 채규에게 태선경연의 대표라는 자리를 맡겼다.
그러나 죽을 수도 있다는 말에도 채규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자리가 무서워 관둘 거라면 진작에 관뒀습니다. 회장님은 모르겠지만 제가 얼마나 위험한 일들이 많았는지 아십니까? 소싯적에는 웅해건설에서 공사장에 부른 용역들 막느라…”
그렇게 채규는 진태를 위해 헌신했던 일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진태는 처음 듣는 얘기도, 다시 듣는 얘기도 있었으나 가만 채규의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채규의 얘기가 끝난 뒤에야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흐흐. 네놈도 강빈이를 닮아 가는구나. 쓸데없는 말이 많아졌어. 준만이도 그러더니…. 강빈이가 이 서재를 들락거릴 때부터 전염이 된 모양이야.”
“...하하.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진태는 즐거움에 눈으로 반달을 그리며 채규에게 말했다.
“수십 년간 내 지랄 같은 성격을 받아준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그런 말씀 하지 마십시오. 회장님께 인생을 바쳤던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습니다. 늘 영광이었습니다.”
“이거 봐라. 입에 발린 소리를 하는 놈이 아니었는데…. 강빈이 그놈이 내 수족 같은 놈을 다 버려놨어.”
“하하. 회장님. 그거 아십니까? 회장님도 많이 바뀌셨습니다.”
“내가 말이냐…?”
“예. 서강빈 부회장이 달라져서 돌아온 뒤로, 웃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늘 화가 나 있던 눈매도 제 느낌인지는 몰라도 순해지신 것 같고요.”
진태가 인상을 찡그리며 제 눈썹을 매만졌고, 채규는 그 모습을 보면서 입을 가리고 작은 웃음소리를 내었다.
“이상한 놈이야.”
“회장님을 바꿀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거겠지요.”
“유독 그놈 편을 많이 드는구나.”
“회장님께서 차기 후계자로 점찍어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서강빈 부회장을 도울 생각입니다.”
“너는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내 핑계 대지 말고 네 솔직한 심정을 말해봐.”
채규는 드물게, 빙긋 웃었다.
“두말할 필요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