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진태의 말에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기 달랐으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진태는 여지껏 회장이라는 자리와 함께 압도적인 지분들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유산’은 그 모든 걸 내려놓는다는 걸 뜻했다.
진태는 목을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똑같이 나눠 줄 생각은 없어. 너희들의 그릇에 맞게 내어 줄 게다.”
영만의 불안에 잠긴 표정과 묘한 기대감을 품은 범준이 명확하게 대조되었다.
영만이야 실적은 말할 것도 없었고, 금융 계열 자체를 실력으로 나한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범준… 태선전자의 성장과 힘입어 산하 계열사를 총괄하는 태선전자서비스도 가공할 성적을 내었다.
태선전자에 얹혀가는 모양새긴 했지만, 그래도 성과는 성과이니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이다.
“남순이, 너한테는 유통 관련 지분들과 태선백화점의 내 지분을 모두 내어주마.”
태선 그룹 유통 계열에는 대표적으로 내가 최대 주주로 있는 태선택배와 범준이 맡았던 태선식품이 있다.
태선택배는 나의 지분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진태의 지분이었고, 태선식품은 범준이 나오게 되면서 다시 진태에게 지분이 회수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태선면세점, 존마트 등 유통과 관련된 지분들을 모두 넘긴다는 말이었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지역마다 목 좋은 땅들을 사 놓은 게 있다. 마트 내기 딱 좋은 땅들이니 존마트 지점도 늘려봐라. 이미 태선백화점과 비슷한 위치 아니냐. 내가 보기에 될 사업이다. 주력사업으로 밀어봐.”
“네… 알겠어요. 알겠는데, 아버지. 아니죠…? 그냥 내려놓고 쉬시고 싶은 거죠?”
남순의 처량한 목소리에 진태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 조금 쉬고 싶구나.”
“....”
진태가 쓰러졌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채규와 나밖에 없었다.
이유는 묻지 않았지만, 진태가 쓰러지고 채규는 나 혼자 불렀고, 나는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저 매일 진태를 찾아가며 서서히 끝이 다가왔음을 혼자 받아들였다.
남순은 눈시울을 붉히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진태가 이번엔 영만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못난 놈.”
“아버지…?”
“금융에 쏟아부은 돈으로 탑을 쌓았으면 하늘보다 높았을 게다. 그걸 다 말아먹고 조카한테 빌붙어?”
“에… 예?”
영만이 째진 눈을 커다랗게 뜨며 당황했다.
“너한텐 한 푼도 주기 아깝다. 허나 정순이나 동만이보단 나은 놈이긴 하지. 태선보험 지분만 내주마. 그거 하나에 만족하며 살아라.”
“아버지…. 아시잖아요. 전자나 물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회사가 태선보험입니다. 화재, 손보, 거기에 캐피탈에 남은 금융 싹 다 합쳐야 겨우 전자랑 비슷하다고요. 그런데 보험 하나만 내주다니요. 아무리 제가…”
“닥쳐라.”
영만이 떨리는 입술을 천천히 닫았다.
진태는 그런 영만에게 동요도 없이 말했다.
“자식들 보기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반성하는 기미도 없구나. 화재랑 손보는 네 자식 새끼들 이름으로 남길 테니 그렇게 알거라.”
“...예. 알겠습니다.”
영만은 딸과 아들이 각각 한 명씩 있었다.
둘 다 이름 정도는 알았으나, 해외에 나가 사는 것으로 알고 있었고 딱히 기억에 남는 인물들이 아니었다.
진태가 입원했을 때는 물론, 나조차 본 적 없을 정도로 영만의 자식들은 태선가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니면 영만이라는 사람 자체에 질렸을 수도 있고.
아무튼 영만의 표정을 보아하니, 자식에게 넘겨진다고 해서 제 몫이 되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영만은 그렇게 한 발자국 물러나고 진태는 준만을 바라봤다.
“준만아. 네가 늦게 개화한 게 안타깝구나. 아니지, 내 안목이 덜떨어진 모양이구나. 늦게 받은 물산을 끌어 올리느라 고생했다.”
순식간에 목소리를 부드럽게 바꾼 진태에 영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준만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아니더라도 물산은 이미 한국 최고 아니었습니까.”
“그래. 그리고 한국을 넘어 세계에서 알아주는 곳이 되었지.”
준만은 내 얼굴을 슥 쳐다봤다가 다시 진태를 보았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계열사 임원들 이름으로 된 지분 중 대다수는 내 것이라는 걸 너도 알 게다.”
태선물산을 비롯해 태선건설, 태선중화학 등 물산 계열 임원들이 보유한 지분은 대부분 진태의 소유였다.
탈세의 목적으로 그저 이름만 바꿨을 뿐.
물산 계열뿐만 아니라 태선그룹의 다른 계열의 기업들도 다를 것 없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범준이 멍청한 표정을 지은 채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눈치는 생겼는지 대화에 끼어들지는 않았다.
“내 명의와 차명으로 된 지분 모두 넘기마.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준만이 태선물산의 사장으로 취임하고, 부회장으로 진급하며 받은 지분과 진태가 갖고 있던 모든 지분을 합한다면 누구도 경영권을 위협할 수 없다.
태선물산이 이제 온전히 준만의 기업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준만은 덤덤해 보였다.
“예. 잘 이끌겠습니다.”
“전혀 떨지 않는구나. 좋다. 그리고 재만이.”
재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진태 앞에 섰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반평생을 태선에 헌신해 왔는데 더 말할 필요도 없겠지. 전자 지분 다 넘기마.”
“감사합니다!”
재만이 대뜸 허리까지 굽혀가며 진태에게 감사를 표했다.
태선물산의 경우 태선건설, 태선중공업, 태선중화학. 이 3개의 자회사만을 보유하고 있었고, 태선물산을 포함해 이 세 개의 회사의 기업가치를 합쳐야 겨우 태선전자와 맞먹었다.
재만은 방금 그런 태선전자의 진태가 갖고 있던 모든 지분을 손에 넣은 것이다.
그리고 이건 진태가 재만에게 주는 마지막 안배다.
지금 당장 재만의 힘이 커진 건 뼈아팠으나, 가장 중요한 변수가 사라졌다.
태선전자의 성장은 전생보다 더 빨라졌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태선전자의 중추역할을 하고 있는데 태선반도체의 최대 주주다.
재만이 지분을 한 번에 쓸어 담았다고 해서 게임은 끝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자신의 다른 남매와는 다르게 단 한 기업의 지분만을 받았지만, 재만은 누구보다도 만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광대 찢어지겠다. 이놈아.”
“하하하.”
진태는 그런 재만을 보고 고개를 젓고는 이번엔 범준을 봤다.
“너도 고생했다. 뭘 한 건지는 모르겠다만.”
“예?”
범준은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자신의 성과가 온전히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태선전자서비스가 태선전자의 성공에 편승했다는 것을 진태가 모를 리가 없다.
“네가 이끄는 게 이름이 뭐냐. 전자…?”
“...전자서비스입니다.”
“그래 전자. 거기는 네 몫으로 넘겨주마.”
전자서비스 자체는 규모가 작고 평범한 수리업체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전자 산하의 계열사들을 관리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에 범준은 부들거리고 있지만, 별말 하지 않는 것이고.
이제 태선전자 전체가 재만네 가족한테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범준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자식도 아닌 손자가 저 정도의 기업을 받는 것도 꽤 큰 성과였지만 범준은 만족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원인은 아직 내 이름이 호명되지 않았기 때문이겠지.
내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범준의 시선이 내 몸을 훑는 게 느껴졌다.
‘한심한 새끼….’
아직도 범준에게 죽은 것만 생각하면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어이가 없었다.
화도 나지 않을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라서.
나를 제외하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증여받을 재산에 대해 고지받았고, 진태의 시선이 이제 나를 향했다.
“너는… 태선보다 그릇이 크다.”
“아버지!”
“할아버지…?”
“그게 무슨….”
진태의 말에 따른 반응은 내가 아니라 재만, 범준, 영만이 차례대로 대신했다.
진태는 그 모든 반응을 무시하고 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그러니 나에게 굳이 무언가를 받아낼 필요도 없겠지. 네가 가진 게 크고, 네가 품을 게 크니까 말이다. 내 말이 틀리냐?”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굴었던 세 명은 그 상태 그대로 멈췄다.
평소에 진태가 나를 아껴왔던 것을 알기 때문에, 세 명의 얼굴에는 모두 의아함이 비쳤다.
아니, 범준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맞습니다.”
그러자 준만이 나섰다.
“아버지, 강빈이가 그동안 태선에 얼마나 헌신해 왔습니까! 하다못해 범준이도 기업을 받았는데, 아무것도 안 남기신다니요.”
“작은아버지!”
예상치 못한 표적이 된 범준이 눈을 부라리며 재만을 노려봤다.
“제 어디가 모자란다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예?”
준만은 범준을 무시하고 진태에게 항변했다.
“그럼 그때 저한테 넘기신…”
준만의 팔을 잡고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을 향해 가는 진태와 이런 식으로 망가진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진태 말고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내 뜻을,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이들에게 숨기지 않기로 했다.
그럴 필요가 없었다.
진태에게 한 걸음, 두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멈춰 서서 말했다.
“가진 것 없이 시작한 할아버지가 홀로 태선을 이 자리에 올려놓았듯, 저도 제 힘만으로 태선을 갖겠습니다.”
“가진 후에는.”
“태선을 세계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누구도 감히 비할 수 없을 만큼 높이 올리겠습니다.”
“믿으마.”
어차피 태선호텔은 판교점을 세우며 늘린 지분이 모두 내 몫이 되면서 지분 50프로를 넘겼다.
태선금융은 보험을 제외한 회사들이 내 몫이나 다름없었고, 영만의 목줄도 내가 쥐고 있었다.
준만이 받은 태선물산은 온전히 나를 지지할 테니 내 것이나 다름없었다.
태선전자는 재만에게 넘어갔고, 태선백화점은 남순에게 넘어갔다.
내가 진태에게 받을 수 있는 거라 해봐야 내가 차지하지 못한 태선호텔의 지분이리라.
진태에게 받을 수 있는 마지막이 겨우 그런 것이라면 받지 않겠다.
나는 더 이상 누군가의 도움 없이 내 힘만으로 태선그룹을 손에 쥐겠다.
그렇게 생각했고, 진태는 내 속내를 읽었다.
“이런 건방진 새끼…. 네가 태선을 가져?”
범준의 목소리가 들렸고,
“아버지. 지금 무슨 얘기를 하는 겁니까. 제가 아니라 강빈이를 후계자로 지목한다는 겁니까?”
재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둘 다 시기에 가득 찬 추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