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준만은 자신의 방에서 장부를 쳐다보고 있었다.
장부의 커버는 글씨 하나 적혀 있지 않고 온통 검은색이었다.
그러나 안에 있는 내용은 세상을 뒤흔들만한 것이었다.
한 달 전, 진태에게 이 장부를 받았을 때를 회상했다.
진태의 건강은 이미 악화되어 있었고, 가족들과의 만남도 거절했다.
걱정이 깊어질 찰나, 진태가 준만을 불렀다.
서재에 들어가자 진태는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그대로 의자에 파묻히듯이 앉아 신문을 읽고 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신 겁니까…?”
“무슨 개똥 같은 질문이냐? 보다시피 산송장이다.”
준만은 진태에게 다가가 얼굴을 확인했다.
오랜만에 본 진태의 얼굴은 무척이나 수척해 있었다.
피골이 상접해있었고 주름은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 깊게 파여 있었다.
“아버지….”
“하나같이 울적한 소리만 내는구나. 영 재미가 없어.”
진태는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고, 준만은 전혀 웃을 수 없었다.
준만이 굳은 표정으로 서 있자 진태가 말했다.
“앉아라.”
“...예.”
준만이 자리에 앉자 진태가 슬쩍 책상을 향해 고갯짓을 했다.
책상에는 꽤 두툼한 책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이게 뭡니까…?”
“장부지 뭐긴 뭐겠냐. 네 거 해라.”
진태가 툭, 하고 뱉은 말이었기에 준마은 별생각 없이 장부를 열어보았다.
그리고 안에 적혀 있는 것들은….
“심순옥, 안기영, 손경수…. 이거 계열사 사장들 아닙니까? 그리고 신종원이면 저번 청와대 수석비서관이고…. 안송국은 지금 재무장관일텐데. 그리고 이 금액들은…. 이거 설마 로비 장부입니까?”
“아, 답답하네. 보면 모르겠냐?”
진태가 한쪽 눈을 부라리며 말했지만 이빨이 다 빠진 호랑이처럼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준만은 장부를 덮고 말했다.
“이걸 왜 저 주시는 겁니까. 형도, 누나도 아니고 저한테…. 전 이거 감당 못 합니다. 아버지.”
“내가 이유까지 설명해야 되겠냐?”
“설명해 주셔야 됩니다.”
준만이 짐짓 굳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거 못 받습니다.”
“흐흐. 예전 같으면 내 앞에서 얼굴도 못 들던 놈이 이제 제법이구나. 사리도 분별할 줄 알고. 그래, 못 먹는 건 안 받는 게 맞지.”
바싹 말라붙은 진태의 얼굴이 웃음으로 일그러지자 준만이 몸을 움찔했다.
진태는 갈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만이는 욕심이 많아 화를 부를 거고, 남순이는 마음이 여러 이걸 못 써먹을 게다. 재만이는 이 장부를 제 입맛에 맞게 잘 써먹겠지. 그놈은 정치하는 놈들의 마음을 살 줄 알아. 목줄을 쥐고 제 뜻대로 움직이는 건 나와 똑같지.”
“...그런데 왜 재만이 형이 아니라 저한테 주시는 겁니까?”
“태선을… 아니지, 나를 위해서다.”
“예…? 저한테 주는 게 아버지랑 무슨 상관입니까?”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미간을 좁히는 준만을 보며,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너한테 강빈이가 있지 않냐. 강빈이는 영만이보다 욕심이 많지만, 그 욕심을 이루어낼 능력이 있어. 가끔 남순이처럼 마음이 여리지만 무너지지 않을 만큼 강인하다. 그리고 청와대는 물론 일본 정부의 마음까지 샀던 놈이다. 장부를 써먹는데 서투르진 않을 게다.”
준만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럼 강빈이한테 직접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강빈이는 너처럼 여유가 없다. 무엇에 그리 쫓기는지 닥치는 대로 일을 해내고 있지 않냐. 그런 놈에게 더 여유를 뺏을 수는 없지. 이 장부는 네가 적당한 때에 강빈이한테 주거라. 그러려고 너한테 주는 거다.”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강빈이를 챙기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진태가 시선을 준만을 넘어, 허공에 고정한 채 말했다.
“강빈이가 그러더구나. 허허.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나. 할아버지가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제가 이루겠다. 그리 말하더구나.”
“...그래서요?”
준만은 진태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알지 못했고, 이해하지 못했으며, 궁금하지도 않았다.
준만은 진태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자리에 대한 욕심은 있었으나, 물질적인 욕심은 크게 없었다.
태선그룹 물산 계열의 부회장 직을 맡으며 성취를 느꼈던 것도 가족과 사람들의 인정 때문이었다.
준만은 진태가 살아온 삶이 지독하게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태는 자신의 삶을 이제 강빈에게 물려주려고 한다.
“그 아이, 올해 서른둘입니다. 마음가짐이 조숙하다 해서 그런 짐을 짊어지게 둘 수는 없습니다. 강빈이는 원하는 삶을 살게 할 겁니다.”
“내가 강빈이의 선택을 강요할 수 있을 것 같냐? 아니, 내가 부탁한다 한들 그놈은 제 갈 길을 갈 놈이야. 그건 너도 알지 않냐.”
준만은 말없이 진태를 바라봤다.
진태의 말이 맞았다.
강빈은 누가 뭐라 해도 제 뜻대로 세상을 살아갈 놈이었다.
그런 강빈이 진태가 걸어온 길을 걸어가겠다면 순전히 자신의 의지일 것이다.
진태가 말했다.
여전히 가래가 끓는 듯한, 듣기 싫은 목소리였지만 준만은 귀를 기울였다.
“그놈이 말하더구나. 내가 기업가로서는 최고일지 몰라도, 애비로서는 영 아니라고. 그 말을 이제 알겠구나.”
“예. 아버지로서 좋은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하하. 그거에 대해서만은 할 말 없구나. 특히 너한테는 더 했지.”
“세상에 어떤 아버지가 아들이 멍투성이가 되어 돌아왔는데 왜 때리지 않고 맞았냐고 질타를 합니까. 심지어 때렸던 사람이 제 형들인 건 아셨습니까?”
사람은 부모 앞에서 언제나 어리다.
준만은 제때 하지 못했던 뒤늦은 얘기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정순 누나는 저를 옷장에 가둬 두고 세 시간이나 방치했습니다. 그때 제가 어떤 심정이었는지 아십니까. 세상에 나 홀로 남은 기분이었습니다. 아, 나를 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구나. 이대로…”
“...”
“우물에서 허우적거리며 발버둥 치는데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옵니다. 죽을 것만 같아 겨우 숨을 뱉어내고 있는데 그치들은 웃음거리로 삼은 겁니다. 여름이 끝날 때까지 그 지옥 같은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
“그런 제가 제대로 된 경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생전 경험해보지 못하고, 누구도 관심 없던 증권사라니요. 심지어 태선이 창업한 곳도 아니었지요. 기업명에 태선만 달랑 붙여 놓고 그것도 책임지라는 아버지의 말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냐면…”
진태는 한참을 준만의 말을 듣고 있다가 말했다.
“준만아.”
진태는 자신이 수십 년 전에 했어야 할 말을 하기로 했다.
마지막에 왔기 때문에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 나약한 피붙이는 필요 없었던 존재였기에.
나이가 들어서 이상한 바람이 분다고, 진태는 그렇게 생각했다.
“미안하다.”
“이제 와서…!”
“용서하지 마라. 나를 아비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응어리진 삶을 살아가진 말아라. 노여움은 삶을 갉아 먹는 벌레일 뿐이야. 네 삶을 살아라.”
“... 하, 하하.”
준만은 한 손을 얼굴에 얹은 채 실소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말했다.
“저는 아버지와 달리 잘 살아갈 겁니다. 그리고 제 아이들도. 잘 살아갈 겁니다. 제가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재만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이어서 말했다.
“강빈이가 원하는 게 아버지가 이루고자 했던 일이라면. 그것도 제가 도울 겁니다.”
준만의 손이 검은 장부를 향해 나아갔다.
회상을 끝낸 준만은 장부를 손에 들어 조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장부를 책상 서랍 안에 넣고 열쇠로 잠갔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부회장님.”
가라앉은 채규의 목소리였다.
준만은 불안한 마음을 뒤로 하고 애써 밝게 말했다.
“네. 서준만입니다.”
“회장님이… 부르십니다.”
***
폭설이 끝나고, 진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제설이 겨우 끝난 도로를 가로질러 진태의 저택으로 향했다.
자동차에서 내려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데, 범준도 마침 차를 타고 도착했다.
평소 같으면 지랄 같은 말을 뱉었을 범준은 나를 한 번 흘길 뿐 별말은 없었다.
그렇게 나와 범준은 한 마디도 말하지 않은 채 진태의 서재까지 걸어갔다.
진태는 서재 가장 깊은 곳에서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그 모습에 발걸음을 멈춰 선 나와 달리, 범준이 다가갔다.
“할아버지!”
범준의 말에 진태가 눈을 반쯤 떴다.
“범준이냐.”
“예, 예! 범준입니다. 괜찮으신 거예요?”
“야, 이놈아. 하나같이 물어본다는 게 괜찮냐는 거다. 내가 또 말하리?”
“아, 아닙니다. 괜찮으시면 됐습니다.”
진태는 졸린 사람처럼 눈을 천천히 깜빡이며 말했다.
“강빈이는? 아직 안 온 게냐?”
“예?”
범준이 축 처진 눈매 그대로 멈췄다.
그런 범준을 그대로 지나쳐 진태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진태의 손을 잡고 말했다.
“저 여기 있습니다.”
“그래. 보인다. 뿌옇지만 보여.”
진태가 내 손을 잡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덮었다.
거칠고도 차가운 손이었다.
“춥지 않으십니까.”
“춥다.”
“난로를 더 가져오라고 하겠습니다.”
이미 진태의 사방에 난로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방 안은 후덥지근했다.
진태가 내 손을 꽉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껍데기가 아니라 속이 춥다.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닐 텐데 뼈마디가 다 시려.”
“진통제라도…”
“이미 맞았다. 그래서 내가 이리 멍청하게 눈을 뜨고 있지 않냐.”
뇌의 시상하부가 노화되면 심부의 체온 조절 능력이 떨어진다.
잠들면 심부 체온의 온도가 더욱 떨어지기 때문에 아침잠이 없는 노인들이 대다수인 것이다.
그리고 진태는 그 정도가 심했는지, 몸을 떨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면 오늘 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내일이 되어도 좋고, 모레도 상관없습니다. 힘드시면 말씀하세요.”
그때, 발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다급하면서도, 결코 경박하지 않는 발소리를 내는 사람들이야 뻔했다.
태선가의 혈족들.
진태의 몸이 떨림을 멈췄다.
처음부터 그럴 수 있었다는 것처럼 당연하게.
그리고 진태는 눈을 완전히 떴다.
생기가 보이지 않는 눈빛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버지!”
구두를 신고 달려오는 남순이 보였고,
말없이 근엄한 표정을 지은 채 걸어오는 재만이 보였다.
영만은 째진 눈을 실룩거렸고, 준만은 멍한 눈빛을 하고서 걸어왔다.
진태의 자식들 중에선 재만, 영만, 준만, 남순이 모였고, 손자들 중에선 나와 범준만 이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진태가 얘기를 시작했다.
“오늘 너희들을 모두 불러 모은 이유는 유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