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말해봐라.”
진태가 눈을 흘기며 말했다.
제 호의를 거절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1년만 더 살아 계시면 안 되겠습니까.”
“뭐?”
“말 그대로, 1년만 어떻게든 그 목숨 붙들고 있으면 안 되냐는 말입니다.”
“....”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으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진태가 나에게 이 서류 가방을 건네는 이유가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유산상속.
진태는 나에게 제가 가진 것을 물려주려고 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 있다면 지금 내게 주려던 비자금으로 정계를 구워삶던,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바꾸던 직접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최근에 거절했던 비자금을 다시 내게 건네려는 이유는.
“꿈에 저승사자라도 나타난 겁니까? 조상님이 나타나 그곳으로 오랍니까? 갑자기 왜 이러시는 건데요.”
“강빈아.”
평소에도 낮은 톤의 목소리를 한층 더 낮추며 진태가 말을 이었다.
“나도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죽을 때가 오면 누가 말해주지 않는다 해도 알게 된다. 지금 내가 그렇게 느끼니까 꽤 신빙성 있는 말이지.”
“못 들은 말로 하겠습니다.”
“누가 지금 당장 죽는다더냐? 준비는 해야 될 것 아니냐. 준비는.”
“할아버지가 코끼리라도 됩니까? 죽을 때가 되면 묫자리 찾아가게?”
“이놈이 이제 못 하는 말이 없구나. 죽기 전에 돈 좀 쥐여준다는데 한다는 소리가 그거냐?”
나는 더 할 말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자 진태가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평소에는 늙은이 같은 소리만 뱉던 놈이 갑자기 애처럼 구는구나. 그래. 이 목숨, 1년은 붙들고 있으마. 이제 됐더냐?”
“말에는 힘이 있다 했습니다. 함부로 죽는다는 소리 좀 하지 마세요.”
1. “그래. 네 말대로 할 테니, 너도 내 말 좀 들어라. 억지로 쥐여줘야 네 마음이 편하겠냐?”
현실을 부정하고자 쓸데없는 고집을 부렸지만, 진태는 괜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가 죽음을 직감했다면 정말 찰나의 시간이 남은 것이겠지.
그리고 지금 진태에게 받는 것이, 그에게 무언가를 받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전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
내 재산이 태선그룹을 차지하기에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모였을 때 생각해두었던 것.
“재산을 증여할 때 세금은 각자 부담하게 해주세요. 이게 제가 원하는 겁니다.”
“... 뭐?”
우리나라의 상속세와 증여세는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리고 재벌 수준의 재산 증여에서는 더했다.
2000년도부터 적용된 법에 따르면 30억 원이 초과하는 경우, 50프로의 세율이 부과된다.
신고를 통해 세액을 공제받더라도 고작 3프로.
50프로의 3프로를 공제해봤자 48.5프로의 증여세는 고스란히 부과되는 것이다.
재산을 상속받기 위해서 대출까지 받는 나라가 한국 말고 또 있을까?
나의 경우 넘쳐나는 자금으로 상속세를 기꺼이 내면 그만이지만, 다른 진태의 혈육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가진 재산의 대부분은 태선그룹의 지분이지, 보유 현금 양은 그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그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재만도 오천억 원 가까이 되는 비자금을 모았던 것이고.
그런데 그 비자금이 영만을 돕다가 태선그룹의 지분으로 흡수되었다.
그동안 진태의 자식들이 진태에게 받은 지분들은 모두 차명으로 되어 있거나, 진태가 부담하는 형식으로 양도받았다.
내가 한 말의 요지는 마지막 상속의 경우 그들에게 직접 세금을 부과하라는 것이다.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한 내가 유리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니까.
“어렵다는 건 너도 알지 않냐. 공식적으로 내가 가진 지분과 세금부과가 필요 없는 지분은 거의 동률이다. 그걸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건 태선을 죽이는 일이야.”
진태의 말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진태가 갖고 있는 지분의 양이 생각보다 컸기 때문이다.
진태가 현재 공식적으로 갖고 있는 태선그룹의 지분은 12프로 정도.
거기에 비공식적인, 그러니까 차명으로 갖고 있는 지분이 동률이라면 24프로나 된다는 것이다.
전생에서도 진태가 갖고 있던 태선그룹의 지분은 12프로 정도였으니, 비공식적으로 갖고 있는 지분은 커봐야 3프로 정도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차명으로 그 정도 지분을 갖고 있으려면 상당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유가증권시장 상장기업의 경우 지분율 1프로 이상, 혹은 보유 주식 평가액 25억 원 이상을 소유한 사람을 대주주라고 한다.
코스닥의 경우 지분율 2프로 이상, 혹은 20억 원 이상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차명으로 대주주인 사람은 없었다.
영균이 직접 조사해서 보고한 것이니 한두 명쯤은 있을지 몰라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진태는 수많은 차명으로 12프로나 되는 지분을 쌓아 올렸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어마어마한 증여, 상속세를 피하기 위함일 것이고.
그리고 그 비공식적인 지분을 내 말대로, 세금을 먹이기 위해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면, 아무리 태선이라 할지라도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그 정도라고는 상상도 못 했네요. 제가 원한 건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다만 현재 할아버지 명의로 된 지분을 증여할 때, 도움을 주지 말라는 말입니다.”
“흠… 고려해보마.”
진태가 생각해 본다는 말은 허락할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걸 뜻했다.
진태는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고, 아닌 건 아니라고 딱 잘라서 거절했으니까.
“그것만으로 감사합니다.”
진태에게 살짝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강빈아. 오늘부로 이 별장에 있는 사람들은 네 밑의 사람이 될 게다.”
“...예.”
이 별장에 올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다.
나한테 이미 이 건물과 근처 부지의 소유권은 있었으나, 여전히 진태의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어 내 소유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엇이 묻혀 있든 당장 나에게 필요한 것도 아니었고.
어쨌든 오늘부로 이 별장은 확실하게 내 것이 되었다.
내가 이 별장 밑을 파볼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은 안 들었지만, 정말 어쩌다가 모든 것을 잃게 되었을 때 최후의 보루쯤으로 여기면 됐다.
“인사 관련 처리는 나중에 황실장 통해서 하겠습니다.”
“이미 네 사람들이니, 네가 직접 지시하거라. 나를 통할 필요 없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진태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젓고 이어서 말했다.
“됐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할애비는 여기 더 머물다가 가련다. 너는 먼저 돌아가라.”
“저도 같이 있겠습니다.”
“됐다, 이놈아. 지금은 혼자 있고 싶구나.”
진태가 의자를 돌려 바다를 향하게 했기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내일도 저택으로 찾아가겠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
“대답 안 하시면 허락하신 걸로 알겠습니다.”
“네놈이… 네놈이 언제 허락을 받았다고 이제와서… 흐흐. 웃긴 놈이야.”
진태의 목소리는 가래가 낀 듯 탁했다.
내 모습이 보이지 않을 진태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발걸음을 돌렸다.
***
2004년 3월 5일. 근 100년 만에 기록적인 폭설이 전국을 강타했다.
국도와 지방도로는 물론, 항공까지 모든 교통수단이 멈췄다.
뉴스에서는 고속도로에 차를 방치한 채 빠져나오는 사람들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대전광역시와 경상북도 지역은 50cm에 가까운 적설량을 기록했고, 서울도 18cm로 3월 적설량 최대기록을 깨뜨렸다.
“이날이 그날이었네….”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2004년에 유례없는 폭설이 내렸다는 것은 기억하고 있었다.
집앞의 마당에는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나와 제설기구를 들고 길을 내고 있었다.
진태의 별장을 다녀오고 벌써 두 달이 지났다.
그리고 나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진태의 저택을 찾아가고 있었다.
내가 찾아가지 않으면 진태가 죽기라도 할 것처럼 필사적으로.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나조차 모르고 있었으나, 이런 내 노력이 진태가 아직 숨을 쉬고 있는 이유라고 믿었다.
그러나 차가 움직이지도 않는 상황에서 진태의 저택을 방문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빨라야 내일 새벽은 되어야 도로가 겨우 뚫릴 것이고, 그조차도 차가 운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내 속내를 알았을까.
진태에게 전화가 왔다.
채규를 통하지 않고 직접 전화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할아버지. 오늘은…”
“됐다. 오기 부리지 말고 오늘은 집에 있거라. 그 말 하려고 전화했다.”
여전히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목소리였다.
나는 상관없었지만, 누구라도 듣기 싫다고 말할 그런 목소리.
“새벽이라도 도로 뚫리면 가겠습니다. 그렇다고 기다리진 말고 주무시고 계시고요.”
“기다리긴, 무슨. 됐다. 내일도 눈이 내린다고 하니, 그치면 그때 오거라.”
“알겠습니다.”
“끊으마.”
“... 할아버지. 적어도 오늘은 아닙니다. 아시겠죠?”
“이 자식이…. 끊으마.”
“예.”
짧은 전화 통화를 끝냈다.
그리고 그날, 진태는 다시 한번 쓰러졌다.
***
창밖에선 여전히 폭설이 내리고 있었다.
하이얀 세상이 뿌옇게 번지기 시작했다.
커다란 먼지가 눈에 떨어진 것처럼.
“채, 채규야….”
옆에 서 있을 자신의 수하 이자 오랜 세월을 함께 해 온 사람을 불렀다.
“회장님!”
뿌연 세상에서 누군가 달려오는 것을 눈에 담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회장님!”
털썩.
살아 온 세월만큼 노인의 무게는 덜어졌기에 소리는 크지 않았다.
의식이 멀어져감을 느꼈지만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 ……”
채규의 목소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말은 알아듣지 못했다.
자신의 몸이 누군가가 들어 올려 침대에 눕혔다.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고, 죽게 되는 날이 오늘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오늘 떠나기엔 아직 마무리되지 않은 일이 있었다.
주변에선 달그락거리는 소음과 다급한 말소리들이 들렸으나, 무엇이 소음을 내고 누가 말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독하게 시끄러웠다.
“...조용하거라.”
소음이 멎었다.
그리고 누군가가 진태의 몸을 들었고, 어딘가에 앉혔다.
팔뚝이 한번 뜨끔했고, 바퀴가 굴러가는 듯한 작은 소음이 들렸다.
공기가 바뀌고, 자신의 목에 따뜻한 것이 둘러졌다가, 찬 바람이 몸을 시리게 했다.
“사위가 눈에 잠겨있을 텐데 어디를 가려고…?”
“.... …! ……”
자신의 목소리도,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을 토해내듯 뱉어냈다.
“서재로 가자. 그리고 폭설이 끝나면 아이들을 불러 다오.”
진태는 지독한 피로감을 느끼며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