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81화 (181/249)

#181화

진태는 퇴원한 지 이틀 만에 나를 호출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르게 저택 앞에서 나를 맞이했다.

최근 눈빛이 초점이 흐려지는 것 같아 걱정했는데, 오늘따라 눈가에 생기가 돌고 있었다.

“이 서진태를 기다리게 한 놈이 너 말고 누가 있겠냐.”

“아이고, 영광입니다. 그래서 몸은 좀 괜찮으시고요?”

진태가 퇴원하기 전까지 매일같이 태선병원을 찾았지만, 정작 의식을 차린 후에는 할 일이 있다며 내 방문을 거절했다.

채규에게 물어보아도 묵묵부답.

나는 하루가 멀다하고 진태의 호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태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이 나이가 들면 쓰러지기도 하는 거지. 쓸데없는 걱정하지 마라.”

“예, 예. 알겠습니다. 그래서 인천 별장에는 왜 다시 가자는 겁니까?”

“네가 말하지 않았냐. 인천 바다로 드라이브 가자고.”

“부가티에서 신차 나오면 가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직 1년 남았습니다.”

“내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참는 성격이더냐?”

“예?”

이건 가격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귓가가 찢어지는 듯한 배기음과 함께 진태의 차고에서 차 한 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저 차는….

“...출시가 1년 남은 차가 왜 제 앞에 보이는 거죠…?”

옆에 서 있던 채규가 설명했다.

“기술적인 부분은 조금 덜어냈습니다. 그래도 슈퍼카와는 성능이 궤가 다르다고 하고 타이어도 특수제작되었으니 즐기기에 무리 없을 겁니다.”

“그 질문이 아니었는데… 아무튼 대단하십니다. 할아버지.”

“이게 별거라고. 끌끌.”

내년까지 살아달라고 부가티 베이론을 언급한 거였는데, 이러면 말한 보람이 안 느껴졌다.

“차에 안 타고 뭐해? 할애비 배고파서 죽는 꼴 보고 싶어?”

“요새 죽는다는 말이 그렇게 무섭습니다.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입이 화를 부른다면 진작에 뒤졌다. 헛소리 말고 차에나 타.”

“예, 예.”

그래도 진태가 건강을 제법 되찾은 모습이라 마음이 놓였다.

부가티 베이론 안의 시트는 원래 갈색으로 알고 있는데, 그 짧은 시간에 주문 제작을 했는지 진태가 좋아하는 짙은 녹색이었다.

부가티답게 다른 슈퍼카 업체와는 달리 화려한 구성보다 단조롭고 중후한 느낌이 났다.

뒷좌석에 앉자 푹신한 시트가 내 몸에 달라붙는 것만 같았다.

“승차감은 일단 최고네요.”

“너, 뭐 하냐?”

먼저 뒷좌석에 타 있던 진태가 나를 보며 눈을 찌푸리고 있었다.

“예? 설마 이제와서 따로 가자는 겁니까?”

“아니. 약속은 지켜야 될 것 아니냐.”

“...?”

“운전, 운전 말이다. 네가 직접 운전하기로 하지 않았냐. 뒤에서 운전대라도 잡겠다는 거야?”

“아….”

진태의 병실에서 두서없이 주절거렸던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그때는 정말 별생각 없이 말했던 사실이었지만, 나는 지금 운전면허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음주운전, 인명 피해 사고, 사고 후 미조치, 음주 측정 거부, 난폭운전 이 모든 것을 한 번에 이루어낸 전(前) 서강빈 때문에 정지되었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그딴 식으로 운전한데다가, 처음엔 진태도 이 일을 덮었다가 아예 감옥에 보내기로 할 작정이었는지 손을 떼었고, 서강빈은 집행유예를 선고받았었다.

5년이 지났기 때문에 따려면 다시 딸 수 있었지만, 내가 직접 운전할 일도 없으니 방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내가 지은 죄도 아닌데 괜스레 죄송스러운 상황이었다.

“지금은… 면허가 없습니다. 한 달만 기다려주시죠.”

“에잉, 쓸모없는 놈. 쯧쯧.”

진태가 혀를 차며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누가 출시되지도 않은 차를 1년 먼저 갖고 올지 알았겠습니까….”

‘하이퍼카’의 굉장한 소음을 도로에 흩뿌리며 도착한 곳은, 이전에도 진태와 갔었던 ‘수정식당’이었다.

타고 온 차와 비견될 정도로 수정식당은 여전히 초라한 간판에 허름한 내부였다.

“김씨! 나왔소.”

진태에 말에 ‘김씨’라 불렸던 예의 거구의 남자가 나올 줄 알았으나, 모습을 드러낸 건 파마머리를 한 노년의 여자였다.

일흔쯤 되었을까, 염색을 해서인지 나이대를 알아보기 어려웠다.

“아이고, 서회장님 아니십니까. 축의금까지 받아놓고 인사를 못 드렸네요.”

“김씨 부인 되시오?”

“예. 제가 해식 씨 부인되는 사람입니다. 그간 너무 감사하다는 말씀을 못 드려서 아쉬웠는데 다행이네요.”

“감사할 게 뭐가 있나. 자네 시어미가 사람을 보는 안목이 있던 게지. 그보다 김씨는 어디 가고?”

“해식 씨는… 작년 가을에 돌아갔습니다. 저희도 몰랐는데 폐암에 걸렸었다고 하네요. 검사를 받았을 땐 이미 말기라고….”

“저런….”

김씨 부인을 바라보는 진태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으나 이내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가 살아오면서 목도한 죽음만 수십, 수백 번은 되리라.

나는 애도의 의미로 잠시 고개를 숙여 눈을 감았다.

김씨 부인이 내온 것은 먼저 내온 것은 숭늉이었다.

내 입맛에는 그때와 다를 것 없는데 진태는 아닌 모양이었다.

“이거, 왜 이렇게 싱거워? 소금이라도 쳐야겠어.”

“숭늉에 싱거운 게 어디 있습니까. 그리고 건강도 안 좋으신데 덜 짜게 드셔야죠. 그냥 드십쇼.”

“에잉….”

진태는 인상을 찡그리다가도 숟가락을 들어 숭늉을 먹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세 숟가락 정도 퍼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입맛에 안 맞으시면 소금 가지고 올까요?”

“아니다. 배가 찼어.”

“....”

진태는 예전에도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지만, 삭전 숭늉을 먹는데 대식가, 소식가가 따로 어디에 있겠는가.

심지어 세 숟가락 중 밥알은 포함되지도 않았다.

“출발 전에는 배고파 죽을 것 같다던 분이 어떻게 된 겁니까?”

“요새 입맛이 오락가락해서 그런다. 왜? 불만이냐?”

“하…. 서회장님한테 제가 어떻게 불만을 표출하겠습니까. 배부르시면 그냥 갈까요?”

“아니다. 너는 배고플 거 아니냐.”

“... 알겠습니다.”

그렇게 나 혼자 식사를 시작하고 진태는 바라보고 있는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같이 먹다가 이런 적은 있어도, 처음부터 나 혼자 먹으려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적당히 보시면 안 됩니까? 먹다 체하겠습니다.”

“밥도 안 먹는데 오락거리는 있어야 될 것 아니냐. 네 얼굴이 재밌게 생겨서 그런 거니 신경 쓰지 말거라.”

“어디가서 잘생겼다는 말을 들으면 들었지, 그런 말은 처음 듣습니다?”

“그럼 돈많은 놈한테 누가 못생겼다고 손가락질을 해?”

“예, 예. 그 재밌는 얼굴 많이 구경하십쇼.”

그렇게 진태는 나를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고, 나는 실한 고등어 살을 발라 먹기 시작했다.

“복스럽게도 먹는다.”

“....”

하필 입안에 음식이 가득 차 있을 때, 진태가 마치 강아지에게 하듯 말했다.

나도 모르게 기침이 나올 것 같아 물을 마셨다.

진태가 보고 있어선지, 요리사가 바뀌어서인지 그때보다는 맛이 없었다.

그래도 식사를 남기는 것은 이곳까지 데려온 진태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이제 가자.”

“예.”

김씨 부인은 보이지 않았고, 진태는 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밖으로 나가자 찬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래도 한겨울치고는 적당히 찼다.

채규가 진태에게 다가와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이제 어디로 갈까요.”

“네놈한테 준 별장도 가 봐야지.”

“산 타야 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진태의 별장은 기이하게도 차를 타고는 갈 수 없었다.

산 입구에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긴 하지만, 별장까지 올라가려면 도보로 10분은 올라가야 했다.

내 기준으로 10분이고, 진태는 내 부축을 받고 올라가더라도 최소 30분은 걸릴 것이다.

최근에 쓰러지기까지 한 진태가 감당할 수 있을까 걱정되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갔을 때 경주가 차를 바꿔치기까지 했으니,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걱정되기도 했고.

그러나 이어지는 진태의 말을 듣고 내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별장까지 도로를 냈다.”

“....”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게 실제로 적용하라는 말이었습니까?”

“크흠.”

진태는 헛기침을 하고는 먼저 차에 탔다.

차를 타고 가니 5분도 걸리지 않아 별장 앞에 도착했다.

도로를 뚫은 만큼 경계도 강화했는지,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난 것 같았다.

경호팀장의 인사를 받고 우리는 별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채규가 서류가방을 들고 같이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바다가 보이는 테이블 앞에 앉자 채규가 그 가방을 내게 건넸다.

“이게 뭡니까?”

“보면 알 게다.”

진태는 말을 하고 차를 호로록 마셨다.

가방을 들어보니 제법 묵직한 것을 보아 종이 한두 장이 들어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봐도 되는 것들입니까?”

“상관없지.”

가방을 열어 서류들을 꺼냈다.

앞으로 1년도 안 돼서 신도시 개발할 땅문서, 강남 안에서도 노른자에 위치한 집문서….

그리고 모든 문서의 소유자는 ‘유기현’이었다.

“...이게 무슨 뜻입니까.”

“깨끗한 것들이다. 청탁할 때 써도 뒤탈이 없는 것들이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네가 직접 주지 말고 기현이 통해서 줘라. 기현이도 받아들인 거다.”

“이걸 왜 저한테…. 이러려고 저한테 보내신 겁니까?”

“강빈아. 기현이는 능력 있는 놈이야. 그건 내가 보증하지. 그리고 그런 능력 있는 놈일수록 뒤처리도 깔끔하게 할 수 있는 거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러니까 진태가 3년 전부터 나를 위해 키워뒀다는 ‘기현’은 나를 대신해 감옥에 들어갈 대타자였다는 말인가.

위에서도 나의 대체로 받아들일 정도로 능력을 만들어 낸 거고.

“그딴 일 만들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늘 소신껏 살아왔고, 그 소신에 감옥 들어갈 일은 없습니다.”

“죄를 지어야만 간다고? 정말 그렇게 생각하냐.”

“....”

“지금 내가 밥상 잘 차려 놓았다 하더라도, 정권은 언젠가 바뀐다. 굴복하지 않으면 들어가야 하고, 소신을 지켜도 들어갈 수 있는 게 감옥이야. 뭐, 나는 그런 적 없지만 보험 하나 들어서 나쁠 것 없지 않냐.”

진태의 말은 2020년까지는 유효하지 않았고, 그 이후에는 유효했다.

2020년까지 어떤 정권이 권력을 손에 쥘지 나는 알고 있었고, 미리 붙어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적어도 지금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알아는 두겠습니다. 그리고.”

열려 있는 서류 가방을 그대로 덮었다.

그리고 다시 채규에게 내밀었다.

“제가 받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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