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정순은 입을 벌린 채 터벅터벅 거리를 걸어갔다.
아까부터 뻐근한 느낌이 드는 눈에서는 더 이상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눈물이 말랐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다…. 다… 흐윽.”
위태로운 발걸음으로 정순이 도착한 곳은 강남구에 위치한 그녀의 집이었다.
그녀의 집은 서울 내에서도 도봉구보다 3배가 비싸다는 강남구에 위치했지만, 이 집마저 곧 팔아야 할 처지였다.
강빈 뿐만 아니라 은행과, 태선호텔의 전 임원들, 재계 인사들까지 찾아가며 대출받은 돈이 어마어마했다.
별장은 이미 처분한 지 오래였다.
평생을 놀고먹을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이제 그녀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정순이 문을 열자 곧장 원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이야? 전화는 왜 안 받아?”
“....”
정순은 휘청이며 구두를 벗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원기는 거실 소파에서 손깍지를 낀 채 무릎을 떨고 있었다.
“표정이 왜 그래? 강빈이는 뭐래?”
“...여보.”
“당신… 왜 그러는데, 말을 해야 알 거 아니야.”
“....”
“아니지? 아니잖아. 돈도 많은 애가 고모한테 그깟 푼돈도 못 빌려주겠어? 그리고 현철이가 이번 분기만 지나면 발표 난댔어. 그러니까 만기일만 조금 늘려서…”
“다 끝났어.”
현실을 부정하려는 듯 조잘대던 원기가 말하려던 입을 그대로 둔 채 멈췄다.
“강빈이가… 강빈이가… 흐윽, 끅.”
정순은 사랑하는 남편의 얼굴을 봐서일까, 멈춘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어대다가 입을 열었다.
“송파구, 성남 땅 이미 자기 땅이래. 그렇게 만들겠대…. 그리고 새엄마한테 받을 지분도 가져갈 거래. 안 그러면…. 법정 싸움 걸 거고, 반드시 이기겠대….”
“그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감히 부장판사한테 법정 싸움을 걸어…?”
원기는 두 눈을 희번뜩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정순이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당신도 알잖아…. 걔가 쓰는 로펌이 한국에 지사 낸 것도 다 걔 때문인 거. 우리가 대형로펌을 어떻게 이겨, 당신도 이제….”
말을 잇지 않아도 정순이 어떤 말을 하려는지 원기는 알 수 있었다.
권력도, 힘도 잃고 이제 자리밖에 남지 않은 부장판사.
언제 좌천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에서 강빈과 그의 로펌을 이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태, 재만과 함께 한국 재계 서열 톱에 있는 것이 강빈이었다.
원기가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다.
“그럼 어떻게 하자고! 어! 이 집도 담보 잡혀 있는데 그럼 밖에 나가서 동냥이라도 할까? 어!”
정순이 와락 인상을 찡그리며 원기의 가슴을 쳐댔다.
“왜 소리 질러! 왜! 당신이 뭔데, 뭘 잘했는데. 그 땅 사자고 한 것도 당신이잖아. 그런데 왜 소리를 질러!!”
정순이 가슴을 내려칠 때마다 원기는 뼈마디가 욱신거리는 것 같았다.
정순은 밖에서는 늘 앙칼진 모습이었지만 가족에게만큼은 늘 다정한 사람이었다.
이게 정말 아파서인지, 모든 재산을 잃게 된 상황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다 끝났네…. 인생.”
원기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다.
***
“회장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1시간 전, 채규로부터 진태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소와 같이 식사를 하던 도중 퓨즈가 나간 것처럼 갑자기 앞으로 고꾸라졌다고 한다.
뒤로 넘어지지 않아 다행히 뇌진탕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다.
태선병원에 도착하자 나를 알아보고 사람들이 다가왔다.
“서강빈 부회장님? 맞으시죠?”
“병원에는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저씨! 나 TV에서 봤어요. 저 사인해주세요.”
“부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병원 관계자도 있었고, 일반인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꼬마 아이도 한 명 있었다.
평소라면 이미지 관리를 위해서라도 간단한 인사 정도는 해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차실장.”
“예.”
영균은 곧장 내 말을 알아듣고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을 통제했다.
다른 경호팀원들도 내 뒤로, 옆으로 붙어서 완전히 호위하는 형태가 되었다.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들렸지만 무시하고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VIP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 층, 한 층 올라갈 때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진태가 없더라도 계획은 완성되어 있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 내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는 걸까.
진태는 그저 내 목표를 위하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에 불과하지 않았던가.
엘리베이터가 건물 최상층인 21층에서 멈춰 섰다.
문이 열리자 보안 요원들이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나를 알아본 요원들이 말없이 고개만 숙여 인사했고 나는 빠르게 그들을 지나쳤다.
진태가 머무르고 있다는 VIP실은 왼쪽 끄트머리에 위치했는데, 다른 VIP실 2개를 합친 크기로 약 100평 정도의 크기였다.
그리고 진태라면 자기 자신이 머무를 때를 대비해서 그런 사치스러운 방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뭐든지 최고가 아니라면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문앞에 서 있는 사람은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진태의 전속 경호팀이었다.
이름이 채보라고 했던가.
곰만 한 풍채를 갖고 있는 남자가 나를 알아보고 비켜서서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산소호흡기를 얼굴에 단 채 누워있는 진태가 보였다.
“할아버지….”
전생에서 아버지란 사람은 집안에서 내쳐진 사람이었고, 요절한 어머니의 친부는 단 한 번도 집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는 없는 존재나 다름없을 터, 이제 와서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진태의 자글자글한 주름이 자세히 보였다.
눈은 거의 잠겨있지만 조금은 떠져 있었다.
“의식은 있습니다. 아까 왔다 간 의사 말에 따르면 몸에 문제는 없다고 하네요.”
그제야 옆에 서 있는 채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담담한 그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몸에 문제가 없는데 왜 쓰러집니까? 산소마스크는 왜 달고 있고요. 다른 의사 불러서 다시 확인…”
“부회장님.”
차가운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제서야 채규가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한국 제일의 의사가 왔다 갔습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채규는 이런 사람이었다.
스스로가 불안해도 결코 밖으로 표출해서는 안 되는 사람.
“예.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진태에게 다가갔다.
진태의 몸이 아주 조금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할아버지. 제 말 들리세요?”
내 말에 진태가 눈을 찌푸렸다.
지금 진태가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천하의 서진태가, 이게 뭐 하는 겁니까. 일어나셔야죠.”
다시 한번 눈을 찡그리는 진태.
진태가 누워있는 침대에 걸터앉아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부가티 있지 않습니까. 폭스바겐 들어가더니 몇 년 동안 차를 안 낸다고 불평하시던.”
“....”
“그 부가티가 내년에 차를 하나 내놓는답니다. 이름은 부가티 베이론이라는데 뜻은 몰라도 멋대가리는 있지 않습니까? 이게 그렇게 빠르다네요. 그래서 이 차는 슈퍼카도 아니고 하이퍼카라고 한답니다.”
“....”
“제가 할아버지 드리려고 예약까지 해놨어요. 빠르면 내년 초에 받을 수 있다네요. 차 받으면 제가 직접 운전해드릴게요. 할아버지가 그렇게 좋아하시는 인천 바다로 드라이브도 가고요.”
진태는 여전히 대답 대신 눈을 살짝 찡그렸다.
“대답은 잘하시네. 그렇게 누워 계시는 동안 차 타고 어디 갈지나 생각해 보세요. 집에 틀어박혀 있으니까 이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아, 마당이 넓은 건 알겠는데 진짜 바깥 공기 좀 쐬자고요. 알아들으셨으면 눈 두 번만 찡그려주세요.”
진태가 두 번 눈을 깜빡였고, 그제야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일 다시 올게요. 쓰러지신 동안 매일같이 찾아올 겁니다. 제 얼굴 질리도록 보기 싫으시면 얼른 일어나세요. 잠도 좀 주무시고, 건강도 좀 회복하시고. 예? 잘난 손자 말 좀 들어주세요.”
진태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아 웃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실장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무슨 일 있으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대로 병실 밖으로 나가려다가 뒤로 돌았다.
창밖에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이 진태를 비추고 있었다.
묘하게 어우러지는 그 광경을 잠시 눈에 담다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진태가 몸을 회복한 것은 3일이 지난 후였다.
진태가 산소마스크를 벗고 일어나자마자 한 것은 그의 재산조사였다.
수면 위에 있는 재산뿐만 아니라, 차명, 혹은 소유주가 없는 재산들까지 모두.
채규는 이유도 묻지 않은 채 알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리고 이틀이 흘렀다.
채규 직속의 직원들이 진태의 서재를 들락거리며 진태의 재산과 관련된 자료들을 가져오고 있었다.
서재 한쪽에는 진태의 명의로 된 통장과 태선그룹 임원들의 이름을 빌려 만든 통장들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땅과 집문서들 또한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쌓여가고 있었다.
시가 30억 원 이상, 100억 원 이상, 500억 원 이상….
금액별로 쌓여가는 서류들을 모두 한곳에 모은다면 웬만한 성인 남성의 키를 훌쩍 넘어갈 것이다.
그런 어마어마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음에도 진태의 시선은 신문을 향해 있었다.
“그놈 말이 사실이었구만. 부가티, 그 망할 놈들이 드디어 차를 내놓는다네.”
현장을 지휘하던 채규가 진태의 말을 듣고 옅게 웃었다.
“드라이브 가기 좋은 곳들을 물색하겠습니다.”
진태는 씨익 웃으며 부가티의 신차 모델의 사진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러더니 콧방귀를 뀌었다.
“이런 망할 놈들. 복권에 세율을 30프로나 높여? 쯧. 개천에 용 날 일은 없겠어.”
진태가 보고 있는 신문은 일주일도 더 된 기사였다.
강빈의 말을 듣고 부가티의 신차 출시 소식이 있는 기사를 읽었던 것이다.
진태는 그러면서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채규야. 옥희한테 더 신경을 못 써준 게 후회가 된다.”
채규가 하던 일을 멈추고 진태에게 다가갔다.
진태가 채규에게 옥희의 얘기를 꺼낸 것은 처음이었다.
“너무 일에만 치중했어. 그러니 마음의 병을 얻은 게지. 한 마디, 한 마디라도 내가 고운 말을 했더라면 그렇게 갈 일이 없었을 텐데….”
“회장님…?”
채규를 호명한 진태는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채규가 아닌 그 누구에게라도 하소연을 하고 싶었다는 듯.
그리고 진태의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채규는 진태가 하도 역정을 내서 눈이 충혈된 것을 본 적은 있어도, 이런 모습은 생경했다.
“왜 안 하시던….”
채규는 말하는 것을 멈췄다.
진태가 어린아이처럼 꺼억꺼억 흐느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