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태선금융 계열 임원회의는 내가 의도했던 대로 진행되었다.
내가 영만의 지분을 모두 가져온 태선캐피탈, 태선화재, 태선증권의 사장 자리가 모두 교체되었다.
태선금융 계열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아닌, 태선경연에서 차출된 사람들로.
기업은 그대로 남아있으나, 윗대가리가 내 사람들로 채워졌으니 완전히 다른 기업이 된 것이다.
새롭게 사장직에 오른 사람들은 채규가 엄선하고 진태가 차출을 결정한 사람들로, 내 의견이 아니더라도 진행될 일이었다.
태선 경연에서도 이미 태선보험의 실적 저하와 그에 따른 구조조정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채규에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통보를 내가 해도 되겠냐고 물었고, 채규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기현은 이 정보를 토대로 좌중을 완전히 휘어잡았다.
임원진들, 특히 영만은 기현이 태선경연과 밀접한 인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제로 무시하던 태도를 곧장 바꿔서 기현에게 굽실대기도 했고.
진태의 자식들이 태선 경연의 중추인 채규에게만은 깍듯이 대하는 이유와 비슷했다.
기현의 인사 고과 발표는 사장에 그치지 않고 밑의 부사장, 이사까지 이어졌다.
나와 기현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찼던 회의실에 싸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실적 발표가 끝나자 기현이 두툼한 서류 뭉치를 교단 위에 올려놓았다.
아마 내가 언급했던 신용불량자 회생 제도와, 금리를 낮추는 대신 태선카드만 이용해야 하는 규제에 대한 내용들일 것이다.
“저번달말 금융위에서 시행된…”
얘기가 길어질 것 같자, 나는 적막한 분위기의 이사회실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기현이 발표를 멈추고 따라 나왔다.
“건물 앞까지 모시겠습니다.”
“아니야. 하던 일 마저 해야지.”
나는 어차피 태선금융의 최대주주일 뿐, 경영에 참여할 생각은 없었다.
내 사람인 기현을 위에 앉혀 놨으니, 언제든지 내 뜻대로 움직일 수도 있고.
“그럼… 저는 오늘부터 바로 실무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편한대로.”
“예. 회의 마저 하고 보고 올리겠습니다.”
“앞으로 나한테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 인사 고과나 네가 생각했을 때 큰 건에 대해서만 보고 올려.”
지금 내 산하에 있는 기업들은 태선호텔뿐만 아니라, 자회사들인 태선리조트, 태선골프, 태선관광…. 거기에 태선물산과 GB인베스트먼트까지 포화상태였다.
여기에 태선금융 계열의 기업들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신경 쓰실 일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래 주면 고맙고. 앞으로 잘 부탁할게. 유기현 사장.”
“예. 부회장님. 들어가십시오.”
기현은 거의 수직에 가깝게 허리를 숙여 나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그런 기현의 모습을 열려 있는 문틈 사이로 영만을 비롯한 모든 임원들이 쳐다보고 있었다.
기현이 일부러 문을 열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의도된 것이리라.
‘여우 같은 모습도 있네.’
괜히 채규가 자신이 키운 사람 중 최고라고 자신했던 것이 아니다.
내가 뒤돌 때까지 허리를 펴지 않는 기현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
해가 바뀌고 2004년의 1월이 찾아왔다.
이번 겨울은 대체로 온화한 날씨였지만 오늘처럼 가끔 눈이 내리는 날도 있었다.
난로로 집무실 안이 텁텁해서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눈송이가 얼굴에 닿아 녹아내렸다.
이제 막 시작한 새로운 해였지만, 벌써부터 많은 일들이 있었다.
국내에서는 YS카드가 현금서비스의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부도처리되면서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다.
태선카드는 GB인베스트먼트의 자금 수혈로 지급 능력이 보증된 것이나 다름없어 벌써부터 이용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물론 영만의 실수를 그대로 따라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현금서비스 제한을 걸고 제도 개편을 추진 중에 있다.
그리고 태선전자는 국내에서 최초로 상장한 지 30년 만에 1주의 가격이 50만 원을 돌파했다.
범준이 사장으로 있는 태선전자서비스도 연일 우상향하고 있었다.
태선물산이 겨우 따라잡았던 격차가 다시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괜찮았다.
주가 상승의 큰 영향을 주었던 태선반도체의 최대 주주가 나였고, 틈틈이 시장에 있는 주식들을 매수하면서 태선전자와 산하 계열사들의 주식을 확보하고 있었으니까.
하얗게 색칠되어가는 서울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는데 손님이 찾아왔다.
그동안 염색을 했었던 건지, 뿌리 부분만 하얗게 센 머리를 가진 중년의 여자.
눈을 그대로 맞고 왔는지 재작년 유행했던 밍크코트는 축축해 보였다.
이제는 지겹기만 한 여자의 이름은 서정순이었다.
정순은 황실장이 열어 준 문 앞에 망연히 서서는 퀭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오긴 오셨네요. 만기일이 벌써 이 주가 지난 것은 아십니까?”
“가, 강빈아….”
표정을 보아하니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만했다.
정순은 송파구와 성남시를 낀 그린벨트 구역의 땅을 사기 위해 나에게 300억 원을 빌려갔었다.
만기 일은 2003년의 말일, 그러니까 이미 작년에 갚았어야 했던 돈이다.
그러나 정순은 갚을 능력이 없을 것이다.
정순이 샀던 땅은 재작년 말만 해도 그린벨트 해제에 관련한 찌라시와 신도시 개발에 대한 기대감으로 대충 3, 40프로는 상승했었다.
이자 없이 빌려준 내 돈으로 100억 원의 차익을 벌어들인 셈이다.
물론 정순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땅을 계속 붙들고 있었고 지금 시세는… 30억 원이 조금 넘는 수준.
당한 게 정순뿐만 아니었는지 정재계, 연예계의 인사들까지 수천억 원의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가 연일 보도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주까지 안 오시면 제가 직접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수고가 덜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요?”
“고, 곧 개발 제한이 풀린대. 조금만 시간을…”
“그래요? 저한테는 좋은 소식 아닙니까. 이미 제 땅이 된 곳들인데.”
“그… 그렇지. 음….”
계약 당시 정순에게 융자하며 담보로 잡은 것은 그녀가 산 땅과 그녀가 순례에게 상속받을 지분이었다.
순례의 지분이 워낙 적다 보니 현재 주가로 모두 받아낸다 치면 조금 부족하긴 해도 얼추 300억 원에 맞출 수는 있을 것이다.
그리고 땅문서는 아직 넘겨받지 않았지만, 법적으로 이미 내 소유나 다름없었다.
“우선 들어오세요. 밖에서 뭐 하는 겁니까.”
“으응. 그럴게, 그래야지.”
표독스러운 눈빛은 어디 가고 쫄딱 젖은 생쥐 꼴이었다.
정순이 소파에 앉으려 하자 제지하고 황실장에게 말했다.
“밑에 깔고 앉을 담요라도 하나 가져다줘.”
“알겠습니다.”
황실장이 담요를 가지러 나가고 나는 집무실 가운데에 있던 난로를 소파 쪽으로 옮겼다.
정순이 몸을 덜덜 떨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
정순이 이런 걸로 고마워할 인물이던가.
새삼 돈이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떠올랐다.
황실장이 이내 제법 넓은 담요를 갖고 와 소파에 깔았다.
“이곳에 앉으시면 됩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평소 상냥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황실장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정순이 태선물산에 찾아와 나와 준만에게 노발대발한 것을 옆에서 봤었으니 당연한 반응이려나.
정순은 소파에 앉아 난로를 쬐며 내 눈치를 살폈다.
“저, 강빈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뜸을 들이세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저… 기간을 올해까지만 늘려주면 안 될까?”
뻔하디뻔한 말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이어지는 말도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아니면 상반기까지만이라도…. 이거 진짜 확실한 거거든? 내가 수익금도 너한테 다 줄게. 내가 투자한 돈만 찾으면…”
원금만 찾겠다느니, 기간을 늘리겠다느니, 도박쟁이가 할 법한 말들이었다.
“고모. 재차 말하지만 이미 법적으로 저한테 넘어올 땅들입니다. 제 로펌과 그때 충분히 얘기 나누시지 않았습니까?”
GB인베스트먼트의 전문 회계법인이자 로펌인 앤 무어는 오직 나만을 위해서 한국에 지사를 냈고, 지난 정순과의 계약도 이곳을 통했다.
철저하게 일하는 곳이기 때문에 이미 정순에게 법적고지도 끝냈을 것이고, 정순이 산 땅의 명의는 아직 그녀겠지만, 그녀에게는 땅을 팔 권리도 없었다.
정순이 끝까지 버틴다 하더라도 결국 나에게 넘어올 땅이라는 것이다.
“알지, 그때 다 계약했던 거 토씨 하나하나 다 기억하지. 그러니까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아니겠니? 응?”
그래도 저번의 뻔뻔한 모습보다 발전은 한 모양이었다.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지 정도는 식별하는 것을 보니.
그렇다고 적선할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에게 동정심을 느끼겠는가?
일단 나는 아니다.
“음… 저는 뒤늦게라도 계약이행을 하려고 오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는 말씀이시죠?”
“응….”
“이행할 마음도 없으시고요?”
“그건…!”
정순이 불안함을 느꼈는지 몸을 움찔했다.
“시간이 지나도 땅값은 만기일 기준으로 시세 측정되는 건 아실 겁니다. 시간 질질 끌어봐야 소용없다는 말이에요. 그 땅은 이미 제 땅이고 고모한테 기부할 생각 없어요.”
“강빈아, 강빈아…!”
“마지막으로 충고 하나만 드리겠습니다.”
정순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진심에서 우러나온 충고.
“땅 말고도 고모가 할머니에게 받을 지분 있지 않습니까. 로펌에서 계산해보니 지금 주가로 딱 250억 원 정도가 나오더군요. 고모 성격에 끝까지 버티실 것 같은데 하지 마세요.”
“....”
“법정 싸움 가봐야 누가 이길지 뻔한 싸움일 텐데…. 소송비용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흐흑.”
그때 정순이 어울리지도 않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연기인지, 진심인지는 알 겨를이 없었으나 참으로 보기 싫은 광경이었다.
그게 보기 싫어 작은 선의는 베풀어주기로 했다.
“땅값 30에 상속지분 250해도 20억 원이 남는 건 아시죠?”
정순이 그린벨트 구역 땅을 사기 위해 나에게 빌려갔던 돈은 300억 원.
담보로 잡아둔 모든 것을 받아낸다 해도 20억 원이 남는다.
“하… 제가 손해 보는 사업을 하는 사람은 아닌데 이번은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팁이라고 생각할게요. 그걸로 끝냅시다.”
“강빈아…. 나 여기 모든 돈을 다 쏟았어. 네 고모부 돈이랑 수경이, 수애, 싹 다 여기에 걸었다고. 고모, 고모 얼굴 한 번만 보고 조금만 도와주면 안 되겠니?”
“도와드렸잖아요. 한 번. 그리고 말입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계약 이행 중에 허튼짓하면 나머지 20억 원도 강제집행 들어갈 겁니다. 가족끼리 못 볼 꼴 보이지 말자구요.”
흐느끼는 소리를 뒤로하고 책상으로 걸어갔다.
밖에선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