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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78화 (178/249)

#178화

태선물산 구내식당에 들어가자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저희가 나타나면 직원들이 편하게 밥을 먹겠습니까.”

준만은 내 말을 듣지 않은 척 환한 웃음을 지으며 직원들의 인사를 받아주고 있었다.

“식권 발급은 하셨습니까?”

“응? 그게 뭐냐.”

준만은 식권을 난생처음 들은 듯 의뭉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말 그대로 식권이요, 식사하는데 필요한 티켓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 게 왜 필요해? 우리 회사 직원들 밥 먹이는데.”

“그럼 직원이 아닌 사람들은 어떻게 구분하고 밥을 주고 있겠습니까?”

“흠… 그것도 맞는 소리긴 하네. 그럼 지금까지 우리 직원들이 돈 주고 회사 밥을 먹고 있었다는 말이지?”

“저희 직원들은 매달 식권을 발급받습니다.”

태선물산의 구내식당에 온 적은 처음이지만, 구내식당은 처음이 아니었다.

전생에 다녔던 성공투자증권사에서도 구내식당이 있었다.

준만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했다.

“알아서 잘 돌아가고 있네. 그보다 식권은 어디서 발급받는데?”

“황실장에게 두 장 받아왔습니다.”

나는 주머니에 있던 식권 두 장을 흔들거렸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하자고 했던 건 준만이지만, 당연히 식권 발급은 안 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역시 우리 아들이 준비성은 남다르네. ”

내가 자연스럽게 식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자 준만이 뒤따라왔다.

준만은 식판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폈다.

“거기에 음식을 담아서 자리에 가서 먹는 겁니다.”

“그렇구만. 구내식당에서 나 몰래 밥이라도 먹었던 거냐?”

“음, 뭐. 그렇다고 하시죠.”

태선물산의 구내식당은 뷔페식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불고기, 된장찌개 같은 한식부터 시작해 간단한 토스트 같은 것도 보였다.

둥글게 배치된 테이블 위에 가득 놓인 음식들은 아직도 김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간단하게 무침 반찬들과 밥을 푸고 자리에 앉았다.

준만은 아직 음식들을 보며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내가 자리에 앉은 뒤로 주변에 앉아있던 직원들은 눈치를 보더니 슬금슬금 자리를 옮겼다.

“저 때문에 그러는 거면 괜찮아요. 편하게 드세요.”

“하하… 밥을 다 먹어서요. 부회장님, 맛있게 드십쇼!”

그냥 상사도 아니고, 기업의 두 수뇌부가 한자리에 있으니 편할 리가 있나.

다음부터는 준만이 오자고 해도 만류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물론 나와 달리 어릴 때부터 유복하게 자라온 준만은 눈치 하나 보지 않고 싱글거리며 내게 다가오고 있었다.

“생각보다 괜찮은데? 가끔 같이 오는 것도 괜찮겠어.”

“....”

준만은 식판을 식탁에 올려놓고 멀뚱히 앉아 있었다.

“수저는 안 가지고 오셨습니까?”

“응? 그런 것도 내가 직접 가지고 와야 되냐?”

“... 제가 가지고 올게요.”

멀뚱히 앉아있는 준만이 오늘따라 꺼벙해보였다.

수저를 준만의 식탁 오른편에 놓아주며 말했다.

“그보다 무슨 바람이 들어서 이곳에 온 겁니까? 좋은 식당 다 제쳐두고.”

“기업가가 이런 모습도 보여줘야 밑에 사람들이 가깝게 느끼지 않겠냐?”

준만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를 힐끔거리며 제 숟가락에 놓인 게 무엇인지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이 태반이었다.

준만과 내가 식당에 등장했을 때보다 사람 수가 확연히 줄어든 것도 눈에 띄었다.

“불편하게 느끼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집에서 밥을 먹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들어온 느낌이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뭐 나쁠 건 없지?”

“지금 말고 아버지랑 할아버지의 관계가 멀었을 때를 생각해보세요.”

“....”

준만은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진태와 준만의 관계가 원활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준만에게 진태는 누구보다 두려운 대상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면 안 되지. 오늘만 여기서 먹자.”

“그것참 감사한 말이네요.”

다행히 준만은 고집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진태라면 밑에 놈들 신경 쓸 게 뭐 있겠냐며 성질을 냈을 것이다.

준만이 숟가락으로 국을 푸다 말고 말했다.

“오늘 금융계열 임원회의있다며. 밥 먹을 시간은 충분하고?”

“빠듯하긴 한데… 조금 늦추면 됩니다.”

“네 큰아버지가 그걸 두고 본다고?”

“아버지. 이제 금융에서 제 말 거스를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태선보험을 제외하고 태선금융 계열의 핵심이 되는 모든 계열사가 내 손에 들어왔다.

영만을 부회장 자리에 유지시키는 것도, 내려오게 하는 것도 모두 내 재량이었다.

“위치 하나에 죽고 사는 게 네 큰아버지다. 초장부터 너무 들쑤시지는 마.”

“그러니까 더 그 자리에 절절하게 매달리도록 만들어야죠.”

“네가 알아서 잘할 거라 생각한다만… 나는 아직도 저번 일을 생각하면 몸이 떨린다.”

준만이 말한 ‘저번 일’이라는 것은 경주와 정순이 손을 잡고 진태를 죽이려고 한 것이다.

치밀하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지만, 자칫 나까지 휘말릴 수 있었던 사건.

이가 조금 갈렸지만 나는 이제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겁이 나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누구보다 아버지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하하. 그랬지. 네가 아니었다면 아직도 태선증권 사장노릇을 하고 있었을 거다. 하지만…”

“저 의심 많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차출해 준 차실장 보셨잖아요. 누구도 제 허락 없이 털끝 하나 못 건드립니다.”

“음….”

준만은 여전히 걱정되지만 내 결심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말을 삼켰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저를 위해 키워 온 사람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예. 유능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직접 금융 계열을 관리감독할 겁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계열사 사장 자리에 제 사람을 올린 적은 있어도, 누군가를 내준 적은 없었어. 어떤 사람일지 나도 궁금하구나.”

준만의 얼굴에서 걱정이 사라지고 흥미로워하는 것이 보였다.

“조만간 소개해 드릴게요.”

***

기현이 태선보험의 본사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깔끔한 수트를 차려입었고, 머리는 그사이에 한 번 더 이발을 했는지 더 짧아져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에서 언뜻 채규가 보이는 것도 같았다.

나는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던 차를 세운 뒤에 내렸다.

나를 본 기현이 고개를 숙였다.

“먼저 들어가 있지. 왜 벌써 나와 있어?”

“첫 출근이니 부회장님 먼저 들어가시고 뒤따르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들어가지.”

이미 정해진 임원회의 시간보다 30분이나 지체됐음에도 기현은 걱정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태선보험의 이사회실에서 임원회의는 한참 진행 중이었다.

기현과 함께 내가 나타나자 그 넓은 이사회실에 정적이 흘렀다.

먼저 일어나 우리를 반긴 건 영만이었다.

“다들 인사 안 하고 뭐 해? 금융 계열 살려줄 구세주가 오셨는데.”

영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임원들이 나를 반겼다.

“꼭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투자로 크게 성공하셨다고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사에서만 보던 분을!”

영만이 흡족한 미소를 띠고는 내게 다가왔다.

“오느라 고생했어. 일단 오늘은 분위기만 둘러봐. 앞으로 자주 봐야지.”

영만의 말에 대답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옆에 있던 기현이 영만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오늘부터 업무 들어가겠습니다.”

“응? 자네는 누군가?”

“반갑습니다. 오늘부터 태선보험에서 사장직을 수행할 유기현이라고 합니다.”

기현은 마치 상사가 아랫사람을 대하듯 영만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영만은 그 손을 가만 내려보다가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강빈아. 이분은 누구신데 내 앞에서 이러고 있냐? 어이, 젊은 양반. 당신 누구야?”

“유기현입니다.”

“내가 그 말 하는 게 아니…”

“방금 들으셨잖아요. 태선보험 사장이라고.”

내가 공언하듯 말하자 영만이 눈이 파르르 떨렸다.

“무, 무슨 소리야. 지금 태선보험에는 오태석 사장이 있는데.”

“태선보험 실적 아시지 않습니까? 하방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하는데 저는 죄 없는 직원들에게 전가하긴 싫습니다.”

태선보험이 작년에 비해 하반기에 실적을 못 낸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유는 있었다.

자회사인 태선카드가 부도 위기에 놓이며 지급 능력이 의심되었고, 재앙급 태풍, 매미로 인해 손해보험까지 적자를 보면서 유치했던 고객들이 대거 이탈한 것이다.

태선보험의 문제라고만 할 수는 없겠지만,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했다.

나에겐 좋은 고동이 되었고.

“태석이 나만 믿고 여기까지 올라온 놈이야. 하루아침에 그럴 수는 없다. 일단 전무 쪽이나 다른….”

영만은 말을 하다 말고 빠르게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다양한 얼굴을 한 임원들의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모두 같았다.

화살의 방향이 자신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영만에 대한 불신.

영만이 자초한 일이었지만 내가 의도했던 일이기도 하다.

오태석이라는 사람이 영만 곁에서 오랜 세월 헌신해왔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저는 무능한 사람이 기득권이라는 이유로 가만히 앉아있는 꼴은 못 봅니다. 게다가 여기 있는 유기현, 아니 유기현 사장은 이채규 실장님 밑에서 배운 아주 유능한 사람입니다. 이제 큰아버지는 저만 따라오시면 됩니다.”

영만이 대답하지 않자, 그대로 지나가려는 나를 영만이 붙잡았다.

“너, 설마 이러려고 나를 부회장 자리에 앉혀 놓은 거냐? 나를 허수아비로 세우고 뒤에서는 사람 쓰려고?”

영만이 붙잡은 팔을 떼어놓고 말했다.

“제 돈이 얼마가 들어갔는데 사장 자리 하나 제 마음대로 못한다는 겁니까?”

“뭐…?”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는 사람들은 대략 30여 명.

모두 태선금융 계열의 중추가 되는 임원진들이다.

이 자리에서 주인이 바뀌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평소와 같이 지나가는 듯한 어투로 말했다.

“언제라도 그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려놓으시죠. 주주들과 임원들이 과연 누구 손을 들어줄지 궁금하다면 말입니다.”

그 말에 몸을 떤 것은 영만뿐만이 아니었다.

앞에서 앉아 있는 임원진들이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하며 긴장한 티를 내었다.

옆을 보자 기현이 그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태선 경연(經硏)에서 인사 고과를 진행했습니다.”

‘태선경연’은 ‘태선 경제연구원’의 준말이다.

태선기획과 함께 계열에 속하지 않고 진태 직속의 기업.

태선 경연은 민간 싱크탱크로서 경제 분석과 그에 따른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표방하는 업무였지만 주로 하는 일은 따로 있었다.

태선 그룹 내의 계열사들에 대한 인사 고과와 더불어 구조조정까지 진행한다.

기현이 말하자, 눈앞에 있는 임원들이 벌벌 떨기 시작하고 영만이 째진 눈이 벌어지는 이유다.

이미 기현에게 보고받았던 나는 팔짱을 끼고, 이어질 기현의 말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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