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내게 다가오는 채규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였다.
하얗게 센 눈썹과 머리, 깔끔하게 면도된 턱수염.
육안으로나, 실제로나 환갑을 넘은 나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정갈하면서도 무게감 있는 그의 태도 하나하나가 그의 위치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채규가 내 앞에 다가와 낮은 톤의 목소리로 말했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내가 태선증권의 본부장에 있을 때만 해도 채규는 손자를 대하듯 편안하게 나를 마주했었다.
그러던 내가 태선물산에 이어 태선백화점 부회장 자리에 오르자 그때부터는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준만과 영만은 물론 재만까지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람이 채규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채규의 시선으로 불과 서른을 넘긴 핏덩이에 불과한 나를 진태의 자식들과 동일선상에 두고 대했다.
거기에 사람을 쓰는데 까다롭기로 소문난 진태가 수십 년간 자신의 곁에 둔 사람이다.
그것만으로 채규가 얼마나 유능한 사람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채규라면 내가 원하는 사람을 차출할 수 있으리라.
“금융 계열에 유능한 경영인이 필요합니다.”
내 말을 듣자마자 수첩을 꺼내 무언가 써 내려가는 채규를 보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필요한 사람의 조건을 여럿 생각해두었지만, 다 지웠다.
그리고 채규는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꺼냈다.
“제가 생각하는 두 명입니다. 면접을 통해 결정해도 되고, 지금 이 자리에서 결정하셔도 됩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하고 싶습니다. 이채규 실장님이 생각하시기에 괜찮은 사람으로 결정해주십시오.”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흐흐.”
옆에서 나와 채규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진태가 끼어들었다.
“채규가 태선에서 안 해본 일이 없는데 그중 가장 잘했던 게 인사과 일이었다. 지금 사장 자리 앉힌 놈들 태반이 채규 안목이야.”
“어찌 보면 할아버지보다도 권력자겠는데요?”
“그럴지도.”
내가 우스갯소리를 하자 진태가 맞장구를 치며 웃어댔다.
채규 혼자 진지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이채규, 오늘따라 왜 이렇게 굳었어?”
“그…. 하하.”
채규가 옅게 웃고는 이어서 말했다.
“회장님. 부회장에게 사실대로 얘기해도 되겠습니까?”
“에잉, 너는 다 좋은데 재미가 없어. 사람이 위트니 유머니, 어? 그런 게 있어야 한단 말이지.”
나는 둘의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지금 무슨 대화를 하고 계신 겁니까?”
채규가 진태에게 눈짓을 보내고 진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규는 그제서야 경직된 얼굴을 풀고 말했다.
“사실 부회장님 직속으로 키운 사람이 있습니다.”
“예? 저도 모르게 말입니까?”
내 직속이라면 적어도 나는 알고 있어야 되는 것 아닌가.
채규가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3년 전에 결정하신 사안입니다.”
3년 전… 3년 전이라면 내가 태산물산의 사장으로 부임할 당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진태가 나를 위해 준비한 사람이라.
진태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얼굴은 그때보다도 더 주름이 깊었고, 검버섯이 번지고 있었으나 표정만은 그때처럼 즐거워 보였다.
“할아버지.”
“가기 전에 쓸만한 놈 하나는 붙이고 싶었다. 실력 있고 절대 너를 배신하지 않을 그런 놈. 채규도 욕심내던 놈이었지.”
채규를 슬쩍 보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제가 키운 사람 중 가장 출중한 친구입니다. 지금 당장 태선의 어느 계열사에 붙여도 괜찮을 정도로요.”
진태가 선택하고, 채규가 인정한 사람이라.
그런 사람이 나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닮고 싶었던 사람, 되고 싶었던 사람이 자신이 없을 때를 위해 준비했다는 말에 몸이 굳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절로 나올 것 같았지만 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었다.
진태가 가장 듣고 싶어 할 말.
“할아버지가 이루고자 하셨던 모든 것을 제가 이루겠습니다.”
태선을 한국 정상에 올려놓고도 진태는 만족하지 않았다.
한국을 넘어 세계 어느 기업이라 할지라도 감히 내려다보지 못할 정도로 태선을 키워내는 것.
진태의 소망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루고자 하는 일이기도 했다.
진태는 옅은 기대감이 서린 눈으로 아득히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태를 향해 진심을 담아 허리를 굽혔다.
***
“유기현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2003년 12월 8일, 올겨울 첫눈이 내렸고 기현이 찾아왔다.
채규가 보내온 자료에 따르면 마흔이 넘는 나이였지만, 외관상으로는 내 또래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만큼 자기관리에 있어 철저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다부진 눈매와 살짝 내려앉은 입꼬리로 사나워 보였지만, 그만큼 강인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네. 반갑습니다. 서강빈이라고 합니다.”
기현은 내가 내민 손을 양손으로 한 번 꽉 잡았다가 풀며 말했다.
“말 편하게 하십시오. 저는 부회장님 사람입니다.”
“음, 네. 그렇게 하지.”
편하게 말하는 것은 익숙해져 있었지만, 채규가 직접 키운 사람이라고 하니 거부감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것이다.
“이실장님 밑에서 일했다며.”
“예. 10년 전부터 이채규 실장님을 따라다니며 실무를 익혔습니다.”
“10년? 실장님 말로는 3년 전부터라고 하던데, 아닌가?”
“3년 전에 부회장님 직속으로 확정됐습니다. 실무를 익히기 시작한 게 10년 전입니다.”
서당 개도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데, 채규 밑에서 10년이면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 당장 실무 들어가도 지장 없다는 말이지?”
“예.”
“좋아. 일단 직급은 태선보험의 사장으로 들어갈 거야. 하는 일은 밑의 계열사들, 증권, 화재, 캐피탈, 카드를 관리하고, 뒤로는 서영만 부회장을 견제하고 감시하면 돼. 할 수 있겠어?”
“예. 어떤 일이든 맡겨주시면 성과로 보이겠습니다.”
하는 일은 부회장급에 준하고, 실제 부화장 위치에 있는 사람을 견제해야 된다는 말에도 기현은 긴장하는 기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도 아니고 성과로 보이겠다니.
오만일지, 자신감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진태의 말에 따르면 답은 후자일 것이다.
“쉽지 않을 텐데, 질문은 없어?”
“없습니다. 필요하시면 하겠습니다.”
“하하. 그래. 일단 자신감은 좋네. 원하는 건 있어?”
“태선보험의 사장 자리만으로도 과분합니다. 제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신다면 언제든지 다른 사람으로 대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딱 제 능력만큼 주어지면 됩니다.”
“좋네.”
다른 사람이라면 아첨이라도 하나 싶을 정도로 교과서적인 말이었다.
그러나 기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할게. 지금은 태선보험의 사장이지만, 실력을 증명하고 나를 따라온다면 나중에는 태선의 중추 역할을 내어주겠다고.”
나는 진태와 다르다.
자식을 낳고자 하는 열망도 없었고, 혈육을 이용해 그룹 중추를 맡길 생각도 없었다.
내가 차지할 태선을, 내가 이끌 태선은 오로지 실력자들로 구성될 것이다.
기현이 그중 한 사람이 되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그럼 아까 말했던 것을 정정해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이 자리에 만족하지 않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부회장님을 모시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나도 부탁 하나 하지.”
“뭐든 실행하겠습니다.”
“말투랑 인상은 조금 풀자. 너무 기계적이야.”
“...알겠습니다.”
예전 같으면 기현같은 딱딱한 말투가 내 취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에릭과 준희를 내 사람으로 쓰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이런 말투가 불편했다.
기현이 얼굴을 찌푸리기 시작했는데, 아마 인상을 부드럽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안 되는 거 억지로 하지는 말고….”
“...알겠습니다.”
***
황실장과 영균을 데리고 태선백화점에 도착했다.
황실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오늘은 휴무일 아니었습니까? 그리고 저희를 시키시지 직접 오신 이유가….”
“자기가 쓸 물건은 자기가 골라야지. 차실장도 뒤에서 멀뚱히 서 있지 말고 잠깐 와 봐.”
근육으로 인해 터질 듯 부풀어있는 검은 정장을 입은 영균이 뚜벅뚜벅 걸어왔다.
다행히 직원을 제외한 사람들은 오늘 올 예정이 없었다.
영균이 다가와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우직하게 서 있는 영균과 고개를 갸웃하며 서 있는 황실장을 번갈아 보고 말했다.
“오늘 백화점 전세 냈어.”
“네?”
토끼 눈을 한 황실장을 보며 말했다.
“그동안 고생 많았고, 앞으로도 고생하라는 의미에서 주는 보상이야. 가지고 싶었던 거, 관심도 없었던 거 신경 쓰지 말고 전부 골라.”
“...부, 부회장님. 백화점을 전세까지 하려면….”
사실 태선백화점을 전세하는데 비용은 한 푼도 안 쓸 수 있었다.
남순에게 말을 꺼내자마자, 곧장 마음껏 이용하라는 허락을 받았으니까.
그럼에도 휴무일에 나와야 되는 직원들을 챙겨주라고 전세비를 냈다.
그랬기 때문일까.
유일한 손님인 우리를 바라보는 직원들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나는 지갑에서 검은색 카드를 꺼내어 황실장에게 주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프론트에 서 있던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 한 분만 와주실래요?”
프론트에 서 있는 여직원은 빠른 걸음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네! 부회장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제가 카드를 드릴 텐데 여기 두 사람이 각자 10억 원씩 긁을 때까지 잘 감시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거절하셔도 됩니다. 대신 수락하시면 직원분도 가방 하나 정도는 긁으셔도 됩니다.”
“당, 당연하죠. 할게요, 아니 하게 해주세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영균은 처음 보는 벙찐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고 황실장이 자신도 모르게 내 팔을 잡으며 말했다.
“10억 원이라뇨, 부회장님…. 그 정도로 사치 부릴 것도 없어요.”
“남편분 것도 사고, 부모님 것도 사고, 아이 것도 사면 남는 것도 없겠네. 최소 한도가 10억 원이고 고르고 싶은 게 있으면 더 골라.”
“그, 그….”
“나한테 이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닌 거 알잖아.”
“네…. 감사합니다.”
겨우 납득한 표정을 짓는 황실장과 달리 영균은 단호한 표정을 짓고는 말했다.
“제 팀원들 것도 사도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한도 없어. 마음껏 사.”
“감사합니다!”
영만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영균은 1등 공신이었다.
그가 오늘 수백억 원어치를 긁더라도 나는 유쾌하게 넘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