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태선카드에서 원금과 1년 치 이자를 포함해 1조 6652억 원을 상환했습니다.”
쾅!
재만은 차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조직이 치밀하고 단단하다는 흑단 나무로 만들어진 책상이어서 망정이지, 다른 목재로 된 책상이라면 움푹 패었을 것이다.
고개를 푹 숙인 재만은 부르르 몸을 떨었고, 임비서는 괜히 불똥이 튈까 걱정하고 있었다.
“서영만 그 개 같은 새끼가….”
재만의 입에서, 격이 떨어진다고 절대 하지 않았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대외적으로 태선전자가 태선카드에 융자했던 돈은 1조 원이 끝이었다.
1년 치 이자를 붙인다 해도 천억 원이 붙고 끝나야 한다.
그러나 태선카드에서 상환한 금액은 오천억 원이 넘었다.
그 자금은 재만이 차명으로 보유하고 있던 비자금이었다.
진태도 출처를 알고 있던 돈이었고, 워낙 철저하게 숨겼던 돈이었기에 언제든지 재만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돈.
돈의 출처와 세금조사가 일어나겠지만, 그 정도는 막을 수 있다.
그 돈이 지금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게 되면서 비자금의 가치를 상실해버렸다.
거기에 더해 태선전자에 귀속될 것이 뻔한데, 이를 재만 개인의 재산으로 빼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만을 열받게 한 것은 이 모든 일을….
강빈이 꾸몄다는 것이다.
강빈은 이로써 자기가 담보로 잡았던 태선증권과 태선화재, 태선카드의 지분을 모두 가져갔고, 강빈이 담보로 잡았던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까지 가져갔다.
태선물산, 태선호텔에 이어 태선금융까지 모두 강빈의 손아귀에 들어간 것이다.
‘호텔은, 호텔만은 가져와야 했다.’
재만은 뒤늦은 후회에 잠겼지만, 이미 배는 떠나갔다.
똑똑.
그리고 눈치 없는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부회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재만과 똑 닮은 중저음의 목소리.
그의 아들이자 현 태선전자서비스의 사장, 범준이었다.
재만이 대답하지 않자 범준이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재만은 손을 머리에 파묻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범준이 눈알을 굴리다가 천천히 재만에게 다가왔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
범준은 대답 없는 재만을 힐끔 보다가 고개를 돌려 임비서에게 눈짓했다.
임비서가 입을 뻐끔거리는 수준으로 말하자 범준은 알아듣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안 들려. 뭐라는 거야?”
“지금…. 부회장님….”
“뭐라고?”
“그… 지금은 설명하기가…”
임비서가 말도 잘 못 하면서 재만의 눈치를 보고 있자 범준은 재만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길래 그러십니까.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법 의젓한 범준의 말에 재만이 고개를 들었다.
재만은 흐릿한 눈빛을 하고서 나지막이 말했다.
“서강빈이…. 태선금융 계열도 가져갔다.”
범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제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건 도를 지나쳤다.
범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미 막내 작은아버지는 물산에, 강빈이는 호텔에 이어 보험까지 가져간다고요? 회장님이 허락하셨을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지금까지 말이 없다. 이게 무슨 뜻인지 너도 잘 알고 있지 않냐.”
범준은 두통이 느껴질 정도로 이를 꽉 물었다.
이미 강빈이 투자회사로 대성을 해서 재만이 자본금으로 승계 싸움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 있던 것이 지분싸움이었는데, 이렇게 된다면 그마저도 힘들어 보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방법이 없어, 방법이….”
범준은 망설였다.
지금 자신이 오래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일을 말해도 될지.
고민은 오래되지 않았고, 범준은 입을 열었다.
***
일시적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태는 건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
팔에 링거를 꽂지 않고도 유유자적하게 자신의 저택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다.
산책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진태의 저택에 자리 잡은 마당은 축구장 하나만 할 정도로 넓었다.
거기에 잘 정돈된 산책로가 꽃과 나무에 어우러져 있었고, 겨울임에도 따뜻한 기후 때문에 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진태의 걸음걸이는 느릿느릿해 나는 보통의 걸음으로도 진태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바깥 공기라도 쐬자 하려고 했더니, 여기가 낙원이네요. 서울 한복판에 이런 집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 있으면 뭐든 못하겠냐.”
진태의 걸음걸이에 맞춰 나도 발걸음을 늦췄다.
“가끔 지팡이도 쓰시더니… 괜찮아지신 겁니까?”
“날마다 다르다. 오늘은 썩 괜찮구나.”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이 나이 먹고 살아 숨쉬는 게 다행이지.”
“기왕 다행인 거 십 년만 더 다행이면 안 되겠습니까? 아니다, 한 20년 뒤로 하시죠.”
십 년 뒤면 나도 마흔이 넘는 나이고, 이십 년 뒤면 강현재의 나이대가 된다.
그때까지 진태가 살아있길 바라는 것은 욕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가 조금 더, 살았으면 좋겠다.
진태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
“산송장으로 살아갈 생각 없다. 네놈은 할애비가 죽지 못해 살아가길 바라는 것이냐?”
“건강하라는 말이 그렇게 됩니까? 이게 다 할아버지 속이 좁아서 그런 겁니다.”
“속이 좁긴 누가? 지 죽이려던 놈을 살려 보내는 사람이 속이 좁은 거면 이 세상이 굴러갔겠냐.”
“듣고 보니 그렇네요. 방금 한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진태와 함께 걸어갔다.
혼자라면 10분이면 돌았을 산책로를 30분을 넘게 걸려서 돌았다.
그리고 진태가 말을 꺼냈다.
“영만이 걸 전부 네 몫으로 돌렸더구나.”
“전부라니요. 태선보험은 큰아버지 몫으로 남겨두었습니다.”
“팔다리를 다 가져가 놓고 머리 하나 두었다고 살려두었다? 허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보다 재밌는 일이 있었는데….”
진태는 가물가물한 듯 발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다.
이전에는 이런 모습을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당황스러웠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 무시하고 다른 얘기를 꺼내던 사람이 진태였다.
그런 그가 이런 허술한 모습이라니.
걱정이 스치고 있을 때 진태가 생각났다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재만이한테 재밌는 짓을 했어. 그 놈 성격에 열이 꽤 받았을 텐데 말이야.”
나는 영만을 시켜 재만의 비자금을 세상 밖으로 꺼내게 만들었다.
영만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으나, 내가 걸었던 조건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그 돈으로 재만이 수갑을 찰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정도로 허술한 돈이었다면 영만에게 주지도 않았을 거고.
나에게 5천억 원은 1년, 아니 몇 개월이면 복구할 수 있는 돈이겠지만 재만에게는 작지 않은 타격일 것이다.
승계 싸움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해졌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그보다 그것과 관련해서 진태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백부님이 꺼낸 비자금.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던 돈이었습니까?”
“만드는 방법은 내가 알려줬지. 왜, 너도 궁금하냐?”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말했다.
“그런 돈 없이도 충분한 거 아시잖아요. 저는 오점 같은 거 안 만들 겁니다.”
“패착이 되어야 오점이지. 들키지도 않으면 그건 오점이 아니다.”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그렇지 않아도 투자와 사업에 필요한 자금은 넘쳐납니다.”
“그래. 확실한 돈이지. 그런데 강빈아.”
“예.”
“주는 사람이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황도 고려해야 될 때가 올 게다.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지 않느냐.”
진태가 어떤 말을 하는 건지는 알고 있다.
비자금은 주는 사람은 물론, 받는 사람도 출처를 따지지 않는 돈이다.
내역이 없어야 하는 정재계 간의 로비라던가, 출처를 남기지 않고 돈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더해 재벌에게 붙는 어마어마한 상속세를 피하기 위해서 쓰인다.
태선가라면 진태에게 상속받을 때 최소 수천억 원에서 수조 원에 이르는 상속세가 붙을 것이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비자금 조성이었다.
공적인 법인회계 처리를 거치지 않는 돈에 상속세는 붙을 수 없으니까.
진태의 자식들에겐 쉽게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일 것이다.
나와는 상관없는 얘기고.
“저는 받을 것보다 갖고 있는 게 더 많습니다. 중국, 미국, 일본, 유럽 등 세계 각지에 있는 현물만 해도 수조 원은 될 겁니다.”
구글과 중국 3대 IT기업, 테슬라 등 잠재적 가치를 생각하면 수백조 원 이상일 것이다.
이미 갖고 있는 돈으로 충분한데 뒤탈을 남길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법 다 지키고 세금을 1원까지 정확하게 낸다 한들, 넘쳐나는 게 돈이었다.
“태선을 이끌 사람이 후환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깨끗하게 오래 살랍니다.”
“그래. 내 길이 있다면, 네 길도 있는 거겠지. 별로 걱정되지는 않는구나.”
“걱정은 해주셔도 됩니다. 장차 태선을 이끌라면 할아버지의 힘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네 백부가 들으면 뒷목 잡고 쓰러질 얘기구나. 흐흐.”
옆에서 보는 진태의 눈은 그저 평범한 노인의 묵빛을 내고 있었다.
“그래서 말인데, 부탁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못 들어 줄 게 뭐가 있겠냐?”
“태선금융을 관리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태선호텔의 경우, 준만을 통해 경영자를 뽑았다.
진석은 현재 태선호텔의 사장으로서 전혀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성과를 내고 있었다.
태풍 ‘매미’가 발생할 때, 가장 처음 이재민 대피소로 개방했고, 각지에 비즈니스호텔을 세움으로써 인지도는 다른 호텔업체와 비할 바가 안 될 정도로 높았다.
태선호텔 판교점도 내 기대 이상의 수익을 올리며, 승승장구 중이었다.
내가 갖고 있는 미래의 지식과 진석의 경영 능력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으며, 온전히 내 기업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태선보험은 아직 영만이 남아있었다.
실권은 내가 갖고 있지만, 그를 컨트롤할 수 있는 사람은 필요하다.
태선그룹과 관계없는 사람을 불러온다고 해서 그가 영만을 누르고 다른 계열사를 관리할 수 있을까?
내가 내린 결론은 불가능이다.
태선보험의 사장 자리에 위치하면서 영만을 견제하고 다른 계열사를 관리할 능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을 쥐고 그 자리에 들어와야 한다.
그리고 그 권력을 쥐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사람이 바로 내 눈앞에 있었다.
“보험에서 경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힘이 있는 사람을 원하는구나.”
“눈치는 여전하시네요.”
“.... 채규야.”
뒤에서 묵묵히 서 있던 채규가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