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영만이 내 집무실로 찾아온 것은 황비서에게 지시를 내리고 두 시간 뒤였다.
집에서 자다가 나왔는지 머리는 쑥대밭이었고 얼굴에서 붉은 기가 엿보였다.
“회사가 망할 지경인데 어제 과음이라도 하셨습니까?”
평소의 여유로운 모습은 사라지고 영만이 당황하며 말했다.
“아, 아니. 음… 사실 마셨다. 일이 잘 안 풀리니까 속이 답답해서.”
“큰아버지가 답답하다면 저는 속에서 화가 끓을 지경입니다.”
나는 담담한 말투로 영만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영만에게는 위기겠지만, 나에게는 기회를 애매한 태도로 넘길 생각은 없었다.
“제 돈 1조 7천억 원이 들어간 기업입니다. 그런데 부도 위기? 장난하시는 겁니까.”
“그… 미안하다. 믿고 맡겨줬는데.”
“예. 저는 큰아버지를 믿었습니다. 아니지. 믿는다는 말로는 부족하겠네요. 가족처럼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자 한 푼 안 받고 빌려줬지…. 내 탓이다.”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가볍게 두들기며 말을 이었다.
“만기일까지 3개월인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방법을 마련해보마. 어떻게든…”
“큰아버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이대로 가면 태선카드 부도납니다. 그리고 태선보험 주가는 밑바닥에 처박히겠죠.”
“아, 아직….”
“그렇게 믿음을 배신당하고 저는 융자금의 반이나 회수하면 다행일까요.”
“...그래도 보험이랑 캐피탈이 네 손에 넘어가는 것 아니냐. 나는 다 잃었어. 하하.”
영만이 실소하며 일그러진 웃음을 내보였다.
태선카드가 부도처리 된다면 나에게 담보로 잡혀있던 태선보험, 태선캐피탈의 지분이 넘어올 것이고 재만에게는 태선증권과 태선화재의 지분이 넘어간다.
태선카드의 지분도 재만에게 담보로 잡혀있었지만, 그건 제값도 받아내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재만은 그대로 태선카드가 갖고 있던 다른 태선금융 계열의 지분을 받아내겠지.
영만은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잃는 위기에 처했다.
지주회사도, 모태회사도 아닌 하나의 자회사 때문에.
그리고 나는 그런 영만에게 동아줄을 내려줄 생각이었다.
“저한테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나는 여전히 분노한 듯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큰아버지. 이번에 제가 실망이 큽니다.”
“알지, 내가 다 알지.”
“그래도 저희는 같은 태선가 사람 아닙니까.”
영만의 눈빛에 언뜻 의심하는 눈초리가 서렸다.
“동만이 형이나 정순이가 나갈 때는 가만 보고 있더니, 이제 와서 말이냐?”
“둘째 큰아버지나 큰고모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어서 못 본 척해야 했지만 큰아버지는 다르죠.”
영만에게 서서히 다가갔다.
가까이 가자 해독되지 못한 알코올 향과 역한 담배 냄새가 풍겨왔지만 참아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마지막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얼굴에 붉은 기가 더 도드라진 영만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의 지분은 바로 저한테 넘기세요. 어차피 태선카드 쓰러지면 그대로 제 몫으로 올 거 아닙니까. 만기일 돼서 처리하는 것보다 지금이 나을 겁니다.”
“그… 알았다. 하….”
영만은 한숨을 내쉬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내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백부님에게 진 빚도 제가 다 갚겠습니다. 담보로 잡혔던 태선증권, 태선화재, 태선카드의 지분은 저한테 주세요.”
“뭐…? 너 설마 내 지분 다 뺏어 먹겠다고 이러는 거냐? 너한테 다 주면 변하는 게 없는데 내가 왜.”
“흥분하지 마시고요.”
영만의 어깨를 타이르듯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여기까지가 제 조건입니다. 이제부터 제가 해드릴 것을 말씀드리죠.”
전생에서 죽도록 굴러가면서 느낀 것이 있다.
당근은 최대한 늦게 먹어야 가장 달콤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는 영만을 향해 말했다.
“태선카드. 제가 살려내겠습니다.”
영만은 눈을 크게 뜨고는 벙찐 표정을 지었다.
“방법이 있는 거냐…?”
“방법이랄 게 있습니까. 재정건전성이야 자본금 때려 박으면 튼튼해지는 거죠.”
영만이 벌렸던 입을 다물고 눈을 끔뻑이며 나를 바라봤다.
현재 태선카드가 부도 위기에 처한 가장 큰 이유는 부실채권에 의한 재정 불안정이다.
태선카드는 연체율 13프로에 추정 부실채권만 약 2프로에 달한다.
말이 2프로지, 금액적인 면을 본다면 이천억 원이 넘는다.
카드사의 부실채권이 다른 금융계 기업보다 높은 이유는, 높은 금리를 갚을 수 없다는 불안감에서 온다.
그리고 나는 그 해결 방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장기간 채무 불이행자나 신용불량자를 대상으로 일정 기간 연속해서 변제하는 사람에게 금리 혜택을 주고, 태선카드 외에 다른 카드사 이용을 막아 카드 돌려막기를 방지하는 것.
그 외에도 증권가에서 일했던 경력으로 정당하게 채무 상환하는 방법은 많았다.
내가 이런 생각에 잠겨있을 때, 영만은 생각을 정리했는지 말하기 시작했다.
“곱씹어서 생각해봤다. 지분을 다 가져가고 네 자본금을 넣겠다면 태선카드도 네가 갖겠다는 말과 뭐가 다르냐?”
“어차피 이대로 가면 큰아버지가 부회장으로 계신 금융계열의 지분 대부분은 잃지 않습니까. 뭐가 두려운 겁니까.”
“그러니까 네 입에 지분 다 떠먹여 주고 나는 퇴장해라?”
영만이 원하는 게 뭘까 줄곧 고민해왔다.
일반인은 이룰 수 없는 부를 이미 축적했으며, 태선에서 부회장직까지 맡고 있는 그가 위험부담까지 떠안으며 발버둥을 친 이유.
내가 내린 결론은 영만은 자리에 대한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지분까지 빼앗긴다면 진태는 물론, 주주총회에서도 그의 부회장 자리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현재 태선보험의 지분은 영만이 21프로, 진태가 23프로, 자사주 9프로, 임원들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이 11프로에 진태의 자식들이 나눠갖고 있는 지분이 10프로, 나머지가 일반 주주로 구성되어 있다.
임원들과 진태의 자식들의 결정은 진태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으니, 사실상 퇴출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에게 주는 마지막 제안.
“부회장 자리. 유지시켜 드리겠습니다.”
어린 조카의 입에서 나온 건방진 말을 듣고도 영만은 기분 나쁜 표정을 짓긴커녕 기대감에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어떻게, 어떻게 할 거냐. 내가 어떻게 하면 이 자리 붙들고 있을 수 있냐. 지금 아버지가 눈에 불을 켜고 있을 텐데.”
나는 영만이 잡은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그래서 백부님이 아니라 저에게 지분을 넘기라는 겁니다. 태선보험 안에서 제 입김이 세져야 회장님도 제 결정을 납득하지 않겠습니까.”
“그럼 네가… 내 부회장 자리를 지지해주는 거냐?”
“예. 큰아버지가 계속해서 금융 부회장 자리를 맡으세요. 제가 그렇게 만들 겁니다.”
“강빈아…!”
영만이 나를 끌어안자 알코올 향이 더 진득하게 느껴졌다.
나는 쓴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끌어안고 있던 영만을 슬며시 밀치며 말했다.
“큰아버지. 부회장도 연임하시는데 태선보험의 지분은 있어야 마음 편하지 않겠어요?”
“너… 어디까지 나를 배려해주는 거냐. 이렇게 착한 조카를…. 내가 앞으로 더 잘하마. 내가 태선보험 다 끌어올린 건 너도 알 거다. 앞으로…”
감상에 젖어서 제멋대로 지껄이는 영만의 말을 다 들은 뒤에 말했다.
“물론 그냥은 못 드리는 거 아시잖아요. 큰아버지도 아시다시피 저는 사업가입니다.”
“그, 그렇지. 하하.”
영만이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지었다.
“갖고 계신 태선전자 지분 0.8프로와 태선물산 지분 1.1프로. 저한테 넘어올 태선보험 지분과 바꿉시다.”
영만뿐만 아니라 준만, 남순, 재만이 갖고 있는 지주회사들은 모두 얽히고설킨 지분 관계에 놓여있다.
그중 영만이 갖고 있는 지분은 태선전자와 태선물산.
각각 1프로 정도밖에 안 되는 지분이지만, 두 기업의 규모를 생각할 때 결코 작지 않다.
두 지분을 합친다면 태선그룹의 지주회사 중 하나인 태선보험의 지분 21프로와 맞먹는 정도니까.
영만은 고민하는 기색을 보였지만, 연기일 것이다.
여기서 그가 내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승계 자리에 욕심을 내었던 영만이지만, 그 자리는 이제 완전히 물 건너갔다.
부회장 자리라도 지켜야 되는 상황에서, 태선물산과 태선지분의 지분은 당장이라도 팔아야 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진태의 지시 때문에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것도 불가능한 상황.
그것을 내가 태선보험의 지분으로 바꿔준다고 했으니 그에게 이보다 달가운 소식은 없을 것이다.
영만이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 차액은 어떻게 할 거냐? 네가 몇십억 정도 손해를 볼 텐데.”
“큰아버지.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흠흠. 그럼 혹시….”
“같은 태선가의 사람끼리 그 정도 정은 있어야죠. 마음고생도 심하실 텐데 신경 안 쓰이게 잘 처리하겠습니다.”
“네가 내 은인이다. 우리 집안의 복덩이가 다름 아닌 너구나! 서강빈!”
다시 한번 크게 팔을 벌리고 있는 영만에게서 한 발짝 물러나서 말했다.
“태선보험의 지분은 큰아버지한테 드렸더라도 나머지 계열사들의 지분과 권리는 이제 저한테 있는 거 아시죠?”
“그, 그렇지. 그래도 내가 부회장이니까 잘 경영해보마.”
“아니요. 큰아버지가 이번에 거하게 말아 드시지 않았습니까.”
“뭐, 뭐?”
영만이 태선금융 계열의 부회장 자리를 이어가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 계열사의 경영권을 갖게 둘 생각은 없었다.
이번에 내가 가져온 태선캐피탈, 태선화재, 태선증권은 내 사람으로 채울 것이고, 영만의 독재를 막는 방파제로 작용시킬 생각이었다.
태선보험도 언젠가 내가 차지해야 될 기업인데, 영만이 망치도록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영만이 앞으로도 맡을 부회장 자리는 어디까지나 ‘임시’자리니까.
“제가 경영 잘하고 큰아버지를 잘 보좌할 수 있는 인재를 뽑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다.”
영만은 눈에 띄게 표정이 굳었지만,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는 거다.
태선화재, 태선카드의 경우 태선보험이 모회사이지만 태선증권과 태선캐피탈은 명목상으로는 태선금융 계열에 들어가 있으나 모자회사 관계는 아니었다.
따라서 법적으로 상호주식취득이 허용되었고, 실제로 상호간 주식을 갖고 있었다.
나는 태선보험의 엄연한 주주일 뿐만 아니라, 자회사 4개의 경영권을 쥐고 있는 실권자나 다름없었다.
지금 가장 급한 문제는 태선카드다.
영만이 내 제안을 받아들인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고.
현재 태선카드의 부채를 막기 위해서 꽤 큰 자금이 들어가야 할 테지만, 안정되고 나면 채권은 고스란히 나에게 돌아오게 돼 있다.
무엇보다 GB에 쌓아둔 내 자금은 태선카드의 부채를 막는 정도로는 마를 일이 전혀 없다.
자본금이 부족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하는 영만과는 완전히 다른 상황.
‘내 돈 1조 7천억과 서재만의 1조 5천억까지 말아먹은 건 여전히 대단하지만.’
어쨌든 그 돈도 부실채권만 해결되면 결국 내 손에 들어오게 되어있다.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이로써 영만이 갖고 있던 태선가의 지분을 내가 차지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