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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74화 (174/249)

#174화

영만이 강빈에게 1조 7천억의 융자금을 받고 태선카드의 회생에 나선 지 세 달이 지났다.

청년대상 대출상품과 더불어 낮은 금리로 이미지 쇄신에 성공하는 듯했으나, 기존의 문제였던 연체율은 해결되지 않았다.

다른 카드사들까지 낮은 금리를 내세우자, 카드 대출금 돌려막기가 더욱 성행했고, ‘스윗머니’를 이용한 불법 채권추심도, 이제 불가능한 상황.

영만은 1년을 버티면 추가 융자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3개월 만에 동이 난 것이다.

영만이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1년, 1년을 못 버티면….”

영만은 진태가 태선카드를 팔아치우라고 말했음에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복합적인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요지는 경영권 승계에 대한 욕심.

태선카드를 팔라는 것은, 진태에게 다시 지분과 재산이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했고, 이미 재만과 강빈이 유력한 상황에서 완전한 탈락을 뜻했다.

영만은 자주 혼잣말을 뱉었다.

지켜내야 한다, 태선카드는 지켜내야 한다고.

태선카드를 살려내는 것만이 영만이 승계권 다툼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었다.

그리고 이제 영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1년이 지나기 전에 추가 융자를 받아내는 것.

융자를 받아 강빈의 빚을 갚고, 그 융자는 기업평가가 좋아진 태선카드가 또 다른 곳에서 융자를 받아 갚는다.

영만은 자신을 절벽으로 내민 카드 돌려막기와 같은 원리의 융자 돌려막기를 떠올리고 있었다.

영만은 홀린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태선보험사 밖으로 나갔다.

영만이 향한 곳은 5년 동안 한국 최대 매출과 영업이익을 경신하고 있는 태선전자의 본사 건물이었다.

세 달전 재만을 매몰차게 대했던 자신이 떠올라 후회했다.

재만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했어도, 그렇게 대할 필요는 없었다고.

자신보다 큰 권력을 쥔 사람에게는 늘 웃는 낯에 자신을 숨겨왔던 영만이었지만, 그날만큼은 본심을 드러냈다.

영만은 고개를 한 번 젓고는 마음을 다잡고 태선전자의 최상층을 향해 움직였다.

비서의 안내를 받고 귀빈실에서 10분간 대기하는 동안 영만은 긴장되는 탓에 등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었다.

‘여기서 만약 재만이 형이 거절한다면… 다 끝이다.’

진태의 지시를 거스르고 자신의 아집만으로 태선카드를 끌고 왔기에, 태선카드 하나가 날아가는 것으로 안 끝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강빈에게 담보로 맡긴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의 지분.

그 지분이 없더라도 부회장직은 유지되겠지만, 그야말로 바지사장에 불과할 것이다.

‘그리고 능력 없는 자식 새끼한테 제 지분은 한 푼도 안 넘기겠지.’

영만은 진태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능력에 따라 자식마저 차별하는 독사 같은 사람.

영만이 현재 갖고 있는 금융계열 지주회사, 태선보험의 지분보다 진태의 지분이 조금 더 많았다.

그랬기에 진태의 명령을 거슬러선 안 됐지만, 그랬기에 자신의 고집으로 태선카드를 살려보려 한 것이기도 했다.

만약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진태가 갖고 있는 지분을 넘길 수도 있는 일이니까.

실제로 재만은 태선전자를 경영하면서 진태에게 추가로 지분을 넘겨받았다는 것을 영만은 알고 있었다.

영만은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오른쪽 호주머니에 있던 담배 하나를 꺼내어 물었다.

그리고 불을 붙이려는 찰나.

“꺼라.”

어느새 귀빈실에 들어온 재만이 한 마디를 뱉고 영만의 맞은편에 앉았다.

영만은 무표정한 재만을 바라보며 진태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떼어놓고 보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지만, 겹쳐보면 어딘가 비슷하게 보였다.

영만이 실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담배도 못 피우게 하네. 그때 많이 서운했나 봐?”

영만이 태연해 보이는 말투를 가장한 이유는 재만의 속내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재만은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을 하고서 말했다.

“서운할 게 뭐가 있냐. 우매한 동생이 안타까울 뿐이지.”

“그래서 잘못을 바로잡으러 이렇게 찾아왔지. 하하.”

재만이 숨을 깊게 들여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너 잘못한 거 없다. 피붙이라도 이해득실 따져가는 곳이 태선가 아니냐.”

“그, 그렇지? 하하. 말이라도 그렇게 해줘서 고마워, 형.”

“그런데 영만아.”

“응…?”

“나는 내 손에 쥔 것을 도로 가져가는 사람이 정말 싫다.”

“누, 누가 감히 서재만의 것을 탐내?”

영만은 화들짝 놀란 척 연기했지만, 재만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알고 있었다.

뻔했으니까.

그리고 재만도 영만의 연기를 알아챘는지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나는 남에게 빼앗긴 것은 두 배로 챙겨야 직성이 풀려. 돈 빌리러 온 거지?”

“무슨! 내가 돈 필요할 때만 형 찾아오고 그런 줄 알아? 그냥 저번 일도 마음에 걸리고 얼굴 본 지도 꽤 돼서 찾아온 거지.”

“태선카드가 제 몸을 갉아먹다 못해 네 보험까지 먹어 치우려고 하는데 이럴 시간이나 있냐?”

“형….”

현재 태선카드의 대외적인 평가는 좋다 못해 하늘을 날아갈 기세였다.

신문에서는 카드사의 저금리 시장을 이끌어간 게 태선카드라며 치켜세워줬고, 대학교에서는 신입생환영회 이전에 태선카드 발급행사를 진행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로 인해 매출은 크게 늘었으나, 연체율은 줄어들긴커녕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론이 조금 잠잠해지기 시작하면 ‘제2의 스윗머니’를 만들어 강제로 채권추심에 들어가려고 계획했었다.

문제는 그럴 새도 없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부채가 늘어났다는 것.

뒤늦게 카드 발급을 축소하고 대출 부담을 늘리려고 금리 인상에 들어갔지만, 연체율이 손익분기점을 넘길 만큼 낮아지려면 아직 시간이 필요했다.

재만은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얼마가 필요할 것 같냐.”

“저번에 말한 것만큼은 아니야. 강빈이 투자금 받고 기업평가도 재정 불안정에서 벗어났고.”

“벗어날 예정인 게 아니고 벗어났다고?”

“....”

재만은 영만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부분을 알고 있는 듯했다.

영만은 더 속여봤자 자신을 깎아내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 아직 재정 불안정 평가를 받고 있어. 연체율이 늘어나긴 했는데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야. 여론 잠잠해지면 채권추심도 더 강하게 할 수 있을 거고.”

“그때처럼 조직 끌어다 쓰다가 걸려서 아버지 속 뒤집히게 하려고?”

“이번엔 법에 저촉하지 않는 단계에서만 할 거야. 전에는 내가 무식했다는 거 인정하고 있어.”

재만이 영만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 얼마가 필요한데?”

“음…. 1조 5천억…?”

“...너 대체 기업 운용을 어떤 식으로 하는 거냐? 세 달 동안 1조 7천을 해 먹고 또 그만한 돈이 필요하다고?”

“하… 부채 막고 보험에서 빼 온 거 돌려막고 김부원장한테 윗사람들 먹이라고 소고깃값 던져주고. 뒤처리하는 데만 몇천 깨진 줄 알아?”

재만은 영만을 보며 한쪽 눈을 치켜뜨다가 말했다.

“얼마를 빌려 가든지 그때랑 내 조건은 똑같다. 아니지, 금리는 조금 건드려야겠어.”

“빌려준다는 거지? 잘 생각했어. 나 이번에 진짜 열심히 해볼게.”

“담보는 태선화재랑 태선증권, 태선카드 지분까지 싹 다 잡아.”

강빈에게 저당 잡힌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을 제외하면 영만의 남은 모든 것이었다.

그러나 영만은 태선카드를 되살리지 못하면 어차피 전부 잃는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알겠어….”

재만이 영만에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영만아. 1조는 태선전자에서 줄 거고, 오천억은 출처를 밝히면 안 되는 돈으로 따로 줄 거다.”

“... 무슨 소리 하는지 잘 알겠어.”

“일단 채권단 설득은 이번 주 내로 끝내고 바로 태선카드에 투자 진행하라고 할게. 그리고 오천억은….”

***

태선전자가 공식적으로 태선카드에 1조 원의 자금수혈을 했다는 사실이 뉴스에 보도된 지 벌써 4개월이 지났고 겨울이 찾아왔다.

오랜만에 폭염이 없는 시원한 여름이 지나고 찾아온 12월은 뉴스에서 이상 고온이라고 보도될 정도로 비교적 따뜻한 날씨였다.

지난주에 이어 어젯밤 비가 왔을 뿐, 눈은 오지 않았다.

그리고 황실장은 출산 휴가를 끝내고 무사히 복귀했다.

황실장이 밝은 미소를 지으며 서류철을 들고 눈앞에 서 있었다.

“오자마자 일이 바쁘네.”

“저야 좋죠. 집에서 쉬는 것보다 부회장님 지시로 일하는 것이 몇 배는 더 즐겁습니다.”

“말솜씨가 늘었어.”

내 말에 황실장이 옅게 웃음을 터트렸다.

“태선카드는 상황 어때?”

명한이 포섭한 태선카드의 임원과 영균의 조사를 통해 재만에게 오천억 원의 추가 융자를 받은 것이 확인되었으나, 출처는 알 겨를이 없었다.

출처를 안다고 해서 내가 건들 수 있는 문제도 아니었고.

만약 법에 저촉되는 방법으로 모은 돈이라 할지라도 진태가 묵인한 돈일 터였다.

혹은 진태를 통한 돈이거나.

비자금에 대해 생각하면 진태가 나를 데리고 갔던 인천 별장이 떠올랐다.

진태는 그 별장을 내 명의로 넘겼다고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진태가 쓰는 사람이 그곳을 관리하고 있었다.

진태를 넌지시 떠본 결과 비자금일 확률이 높았으니, 재만의 비자금 조성에도 진태가 연관되었을 것이라는 게 내 결론이었다.

황실장이 서류를 넘기며 말했다.

“정부에서는 지속적인 카드대란에 대책 마련을 위해 정책을 내고 있지만 실효성은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상황을 예측하고 규제를 풀었던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따르고 있고요.”

“알고서 푼 건 맞지. 발생한 세금이 얼만데.”

신용카드를 통해 GDP 상승과 함께 세금징수가 원활해졌고, 자금의 순환으로 인해 내수시장은 되살아났다.

결국 400만 신용불량자를 만들어냈지만 말이다.

1999년에 현금서비스 한도 폐지와 더불어 신용카드에 대한 규제가 상당수 완화된 이후 카드사들은 공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갔다.

카드대란이 일어난 지도 벌써 2년이 흘렀지만 그 방향성에는 변함이 없었다.

태선카드는 늘어나는 연체율을 무마시키기 위해 신용등급을 낮추고 고금리의 상품을 출시했고, 이는 당연히 해결방법이 되지 못했다.

재만에게 조달받은 1조 5천억 원이 무색하게 태선카드는 부도 징후를 보이고 있었다.

철야 회의는 우선적으로 깔아두고, 유능했던 임원들이 퇴사했다.

대주주가 주식을 처분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 에릭을 통해 모두 사들인 상태였다.

황실장이 서류를 내밀며 말했다.

“서류에 기입된 차트와 같이 기업평가는 재정 불안정을 넘어 부도 예정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드디어 일을 터트릴 때가 됐다.

“GB 한국지사에 연락 넣어서 태선금융 계열 전부 매수하라고 전해. 그리고 서영만 사장 불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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