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형이 직접 찾아오기도 하고 별일이 다 있네. 무슨 일이야?”
영만이 눈앞에 앉아 있는 재만을 보며 생글거렸다.
“내 제안을 거절하고 강빈이에게 손을 내밀었어…?”
재만은 평소와 같이 무덤덤하게 말하는 듯했으나, 끝에서 목소리가 떨렸다.
영만은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말했다.
“어릴 때부터 붙어 다니던 형보다 조카가 훨씬 낫더라. 걔가 무슨 조건으로 돈을 빌려줬는지 알아?”
GB인베스트먼트가 태선카드에 융자했다는 것은 이미 기사로도 나왔다.
1조 7천억 원의 자금 융통과, 담보로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의 지분을 잡았다는 것.
여기까지는 재만의 제안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같았다.
문제는 정작 중요한 것이 기사에서 보도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재만은 목소리를 가다듬기 위해 헛기침을 한 뒤에 말했다.
“...대체 금리를 얼마나 낮췄길래 나하고 상의도 없이 결정해? 나한테 말했으면 맞춰줄 수도 있었잖아. 이번엔 네가 너무 성급했다.”
“풉, 어, 얼마나 낮췄냐고? 푸하하.”
영만이 손으로 입을 가리더니 고개까지 숙여가며 깔깔댔다.
재만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영만의 태도에 화가 나면서도, 저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아함을 느꼈다.
영만이 가끔 선을 넘는 것 같은 행동을 하긴 했지만, 결코 선을 넘는 법은 없었다.
뒤에서 욕을 할지라도, 앞에서만큼은 누구보다 깍듯하게 대하는 것이 영만이었다.
그런 영만이 이런 반응이라니….
영만은 겨우 웃음을 참는 듯하더니 기침을 하고 다시 한번 크게 웃고 나서야 멈췄다.
“하아, 하. 오랜만에 웃었더니 이것도 힘드네. 아, 미안해, 형. 다른 의도가 있던 건 아니고 그냥 상황이 웃기잖아. 금리를 얼마나 낮췄냐니.”
“더 높은 금리를 받은 건 아닐 거 아니야. 아니면 기사에 실리지 않은 다른 조건이 있는 거야?”
완전히 웃음을 멎은 영만은 방금 전이 연기라고 생각될 정도로 무표정한 채로 말했다.
“기사에 나온 게 끝이야. 보험이랑 캐피탈 담보 잡혔고, 1조 7천을 빌렸어. 그리고 금리는.”
영만이 왼손을 들어 검지와 엄지를 붙여 동글게 말고는 말했다.
“빵이야.”
“빵?”
“제로라고. 제로.”
“그 돈이면 은행 금리만 받아먹어도 수백억은 그냥 들어올 텐데 금리가 없다고? 그게 말이….”
재만은 불현듯 그동안의 강빈의 행보들이 떠올랐다.
마치 신이 점지해주듯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해내며, 순식간에 자신의 강력한 경쟁자로 떠오른 강빈을.
또한 이번 융자를 통해 태선보험의 지분을 제 손에 넣으려 했던 자신의 계략이 머릿속을 스쳤다.
강빈과 재만, 둘 다 이루고자 하는 목표는 같았으나 위험을 감수하고 먼저 한 발 내디딘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재만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영만아. 지금이라도 나한테 융자받고 강빈이 돈은 돌려줘라. 금리도 낮춰줄게. 조카한테 돈을 빌린다니 이게 무슨 망신이냐.”
아주 잠깐이었지만, 재만은 영만으로부터 경멸하는 눈빛을 받았다.
영만이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이랑 강빈이가 뭐가 다른지 알아?”
“....”
“형은 나를 돈 나올 구멍으로 보고, 강빈이는 나를 피붙이로 보고.”
“그게 무슨 말이냐…?”
“무이자로 빌려주면 내가 1년 버티고 다른 데서 돈 끌어와서 메꿀 수 있다는 걸 강빈이가 모를 것 같아?”
현재 태선카드의 주가가 소폭 상승했고, 그에 따라 지주회사인 태선보험과 금융 관련 계열사들의 주가도 같이 회복했다.
청년을 대상으로 한 저금리 상품으로 이미지 쇄신과 기업평가까지 같이 끌어올렸다.
영만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하더라도 이 현상이 지속된다면, 타 금융권을 통해 융자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강빈이는 나를 완전한 가족이라고 생각한다고. 돈 나올 구멍으로 보는 누구랑 다르게 말이지.”
“너… 그놈을 믿는 거냐?”
“못 믿을 게 뭐가 있겠어? 무금리를 저금리로 바꾸자는 친형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그래. 네 뜻은 잘 알겠다. 생각 바뀌면 연락해.”
재만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자신의 제안을 관철할 생각보다도 영만의 속내를 알아내는 게 목적인 듯했다.
집무실 밖으로 나가는 재만을 보고 나서야 영만은 소파에 몸을 기댔다.
“이 집안에서 누굴 믿겠냐….”
영만은 강빈의 제안을 곧장 수락하긴 했으나, 찝찝함이 가시지 않았다.
“그때, 그 자신만만한 표정. 분명 뭐가 있단 말이지.”
영만은 불안한 마음을 새로이 갱신된 기업평가 보고서를 보며 달랬다.
***
나는 방 안에서 마당을 바라봤다.
마당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 종이 인형을 연상시킬 정도로 흔들리고 있었다.
방 안은 통유리로 된 벽이 두들겨 맞는 소리로 가득 찼다.
태풍, 매미.
1959년 한반도를 덮쳤던 태풍, 사라 이후 한국에서 관측된 가장 강한 태풍이 덮쳐오고 있었다.
작년, 8만 명 이상의 이재민을 발생시켰던 루사 이후 불과 1년 만에 다시 찾아온 재앙.
추석임에도 많은 사람들의 발목을 잡을 정도로 매미의 강세는 위협적이었다.
내 시야에 닿지 않는 다른 지역들은 더했다.
전국 연안 여객선들의 운항은 통제되었고, 고리원전은 가동을 중단했다.
여수와 진주는 시가지가 침수되었고, 제주도에서는 불어난 물에 차들이 말 그대로 뒤엉켰다.
태풍으로 인한 사망자가 100명이 넘을 것이고, 피해 총액은 4조가 넘을 것이다.
이 모든 일이 나와 무관했지만, 내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내려앉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진석에게 연락해서 오늘이 지나고 전국 각지에 세워진 비즈니스 호텔들을 임시거처로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태선건설에는 이재민의 집을 보수 공사 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에릭에게 전화했다.
“대표님. 괜찮으시죠?”
“다른 지역에 비하면 서울은 심각하진 않아. 나는 괜찮은데 문제는 다른 지역이지. 피해액이 꽤 클 거야.”
“작년에도 이런 태풍이 오더니, 연속으로 이게 무슨 일이래요.”
“그러게.”
창밖에서 여전히 거친 바람이 빗방울과 함께 몰아치고 있었다.
“에릭. GB 이름으로 이번 재난에 기부하려고.”
“...규모는요?”
“이번에 한국 지사에서 벌어들인 돈 전부.”
“그거 꽤 되지 않아요…?”
반년 전, 내 지시로 GB인베스트먼트 한국 지사는 건설과 시멘트, 철강에 관련된 기업들의 주식을 쓸어 담았다.
매미의 피해복구 과정에서 위 기업들의 매출 상승은 당연하게 이루어질 것이고, 추석 연휴가 끝난 뒤 곧장 강세를 이어갈 것이다.
정확한 수익률은 아직 산정할 수 없으나, 투자금만 1조 원 가까이 되었으니 최소 수천억 원의 이득이 발생한다.
“예, 뭐. 대표님 돈이니까요. 그리고 저도 한국 좋아합니다. 아이 러브 코리아.”
“매미가 지나가고 강세는 단기에 그칠 거야. 최대한 빨리 매도 처리하라고 지시해.”
“알겠어요. 그래도 좋은 일 한다고 하니까 기분은 좋네요. 아!”
에릭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손해보험이 피해가 꽤 크겠던데요. 심지어 태선손해보험은 상장까지 하지 않았어요?”
태선손해보험은 태선보험의 자회사로, 상장한 지 3년 정도 된 기업이었다.
생명보험을 담당하는 태선보험보다 기업 규모는 작지만, 그래도 태선의 이름에 걸맞게 업계에서 늘 두 손가락 안에 드는 기업이었다.
그런 기업이라 할지라도 매미로 인한 지급액이 상당할 것이기 때문에 단기적인 약세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뭐, 태풍처럼 지나갈 일이겠지만.
“지급액이 최소 수백억은 되겠지. 기업 하나에 천억이 넘진 않을 거고.”
“그 정도만 해도 보험사 차원에선 큰 피해죠. 그리고 대표님한테는 꽤 좋은 소식 아니에요?”
에릭에게는 한참 전에 영만에게 융자했다는 것과 내 의도를 알렸다.
금액이 꽤 크기도 하고 에릭에게 숨길 것도 아니었다.
에릭한테 말한 내용은 이랬다.
태선손해보험의 손실은 태선보험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고, 영만이 태선카드에만 집중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태선카드의 전망도 밝지 않다.
최근 태선카드의 위기는 완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내가 당장 자금을 융통했기 때문일 뿐,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손익분기점을 한참 넘긴 연체율.
태선카드는 불법 채권추심을 통해 연체율을 어느 정도 완화시켰었지만, 명한의 진술로 기사가 터지고 소극적으로 변했다.
그 상황에서 경제적 능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청년, 대학생들을 상대로 금리가 낮은 상품을 출시했으니 연체율이 금방은 줄어들지 않을 것이다.
영만이 그런 상품을 출시한 이유는 아마 태선카드의 이미지 쇄신과 그로 인해서 은행의 융자를 받으려는 것이겠지.
나에게는 어차피 이자를 받지 않으니, 1년간 내게 융자받은 돈으로 자금 운용을 하다가, 그 뒤 만기일에 맞춰 내 빚을 갚고 다른 은행에 융자받을 심산인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영만의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이다.
내 돈을 갚게 될 만기일보다, 태선카드가 추가 융자를 필요로 하는 시점이 더 빨리 올 테니까.
에릭에게 대답했다.
“태선의 금융계열 전체로 따졌을 때 손해보험 하나의 손실은 미미해. 중장기적으로 봤을 때 큰 폭의 주가 하락도 없을 거고. 태선카드 스스로 무너져야 돼.”
“그것도 1년 안에 무너져야 하죠. 대표님이니까 당연히 그럴 거고요.”
“뭐, 무너지지 않아도 큰 손해는 아니니까.”
내가 영만에게 쥐여준 시간은 1년이고, 이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이미 나의 영향으로 간극은 일어났고, 전생과 같은 시기에 태선카드가 무너지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기회가 꺾인다면 그다음을 노리면 된다.
미래가 바뀌기 시작했다고 해서, 큰 줄기는 아직 변한 적이 없으니까.
아직도 이 세상은 나에게 유리하게 굴러가고 있었다.
에릭에게 이어서 말했다.
“서영만 사장이 추가 자금을 융통해서 빚을 메운다면, 1조 7천억. 딱 그 돈만큼의 금리를 잃는 거야.”
“아니죠. 대표님이 그 돈을 굴린다면 10조가 되어서 돌아올지도 모르는데요.”
다 알면서도 능청을 부리는 에릭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자금 굴릴 곳이 없지 돈이 없냐. GB에 쌓여가는 돈이 얼만데 그 돈이 없어서 투자를 못 해?”
“하하. 제가 모르겠어요? 그런데 가끔은 그리워서요. 한국에서 갖고 있는 자금을 전부 쏟아부어서 수백프로의 ROI를 냈을 때가요.”
에릭을 처음 만나서 ‘크리스맨 뱅크’ 투자를 맡겼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투자자본수익률(ROI)은 수백, 수천 프로에 달했으니까.
“우리가 그만큼 올라온 거지.”
“하하. 저도 지금이 더 좋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 그리울 뿐이에요.”
에릭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