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아침부터 나를 찾아온 남자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 보았다.
관리를 잘 받아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뭉툭한 코, 짙은 팔자주름이 시선을 끄는 얼굴.
영만이 입가를 씰룩거리며 다가왔다.
“저희가 오늘 만나기로 했었습니까?”
“하하. 우리가 약속하고 만나는 사이야? 아니잖아.”
굳이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 나는 시선을 다시 눈앞의 서류로 옮겼다.
컨벤션센터 시공과 관련한 내용으로 요지는 정부 허가와 비용적 측면이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영민이 내 뒤로 슬쩍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동만과 얼굴을 마주 보았다.
“무슨 일입니까?”
“거참, 큰아버지가 왔는데 무슨 반응이 이렇게 시큰둥해? 나 그럼 섭섭해?”
“...우선 앉으시죠.”
“그래. 하하.”
영만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려는 것을 툭 쳐서 제지하고 소파로 걸어갔다.
얼마 전, 명한을 통해 태선카드의 임원들 소수를 영입했다.
그들은 영만이 태선카드의 채권추심과정에서 지시했던 불법적인 일들에 대해 진술을 약속했고, 영만을 감시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영만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겠지만, 지금도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내 귀로 들어오고 있었다.
영만이 투자금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손을 벌리고 있다는 것과 진태한테 찾아갔다는 것까지.
영만이 소파에 살포시 앉으며 깍지를 끼고 말했다.
“강빈아 저번에 제약회사에 투자해서 크게 벌었다는데 사실이냐?”
“그럼 블룸버그나 월스트리트저널에서 허위로 기사를 냈겠습니까?”
미국뿐만 아니라 이번에 제약사 투자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경제 외신들이 앞다투어 다뤘다.
에릭이 인터뷰가 질린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영만은 머쓱한지 코를 한 번 매만지고는 말했다.
“역시 투자에 소질이 있다니까.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하.”
영만의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준만과 달리 욕심만 앞서는 영만이 내 아버지였다면, 이곳까지 올라오는 데 더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나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말했다.
“그보다 일은 잘 무마되셨나 봅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이 큰아버지 집 앞을 기자들이 둘러싸고 있다는 뉴스였던 것 같은데요.”
“하하. 회장님을 뭐로 보는 거냐. 전화 한 통이면.”
영만이 입꼬리를 크게 올리며 손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역시나 그만한 건을 무마시키려면 진태의 힘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했을 것이다.
지금 불안한 건강 상태로 나조차 만나기 꺼리는 것이 진태인데, 어째서 영만을 위해 그렇게까지 할까 의문이 들었다.
‘하긴 아픈 손가락이라고 해도 자식은 자식이니까.’
동만은 자신이 선택한 아내가 진태를 죽이려 했고, 정순은 이에 가담했다.
그러나 영만은 본인이 무능력할 뿐, 진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으니 아비로서의 도리는 하는 것일 터다.
그건 그거고, 진태가 상황은 무마시켜줬지만 여기저기 손 벌리는 꼴을 보니….
“돈 빌리러 오신 겁니까?”
영만은 내 대답에 긍정이라도 하는 듯 시선을 피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지만 이것도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백부님이나 남순 고모한테는 연락하셨고요?”
"에이, 기왕 손잡는 거 내가 제일 믿는 사람한테 가야지 않겠냐?”
“그 사람이 저는 아닐 거 아닙니까.”
“....”
“남순 고모는 성정을 봐서 거절하셨을 것 같고, 백부님은 조건을 따졌을 것 같은데, 마음에 안 드신 겁니까?”
고개를 숙이고 있던 영만은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말했다.
“네 귀신같은 촉은 피하기 힘들구나. 네 말이 맞다. 나한테 1조 7천억을 빌려주는 대신 보험이랑 캐피탈 지분을 담보로 잡자더라. 금리는 십 프로를 받고.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될 건 또 뭡니까?”
“뭐…?”
“어차피 발생한 차익에 대한 지분은 큰아버지 것 아닙니까. 제값 주고 지분을 산다는데 뭐가 나쁜 겁니까?”
영만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네 백부가 가만히 있을 것 같냐? 어떻게든 그 지분 전부 다 받아낼 거 너도 알고 있잖아.”
영균의 조사에 따르면 영만이 보유한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의 지분을 합친 가치는 적게는 2조 원에서 많게는 2조 6천억 원 정도로 상정된다.
그리고 재만이라면 태선보험의 주가를 낮춰서라도 모두 자신이 거머쥘 것이다.
실제로 카드사는 내리막길을 달려가고 있었고, 지금도 도산한 카드사들이 생겨나고 있는 실정이었다.
굳이 재만이 손쓰지 않더라도 담보로 잡은 지분은 모두 재만에게 갈 것이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면.
“제 조건도 들어보시겠습니까?”
영만은 경직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1조 7천억 원을 빌려주고 상환기간은 1년. 담보로 잡을 건 큰아버지가 보유한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탈의 지분 전체입니다.”
“가, 강빈아…? 그럼 네 백부랑 다를 바가 뭐냐.”
“가장 중요한 게 다르죠.”
재만은 작은 변수라도, 작은 이득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하는 습성이 있다.
그에 대한 방증으로, 담보로 영만의 지분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십 프로의 금리를 걸었다.
태선카드가 되살아난다는 가정하에, 금리의 이득을 취할 수 있고, 태선카드가 망한다면 늘어난 금리만큼 가져올 수 있는 담보도 커지니 재만으로서는 이득밖에 없는 거래.
그러나 이기기만 하는 테이블에 판돈을 올려놓는다 한들, 상대방은 콜을 외치지 않는다.
재만에게 이득밖에 되지 않는다면, 영만으로서는 손해밖에 없는 거래니까.
그러니 나는 재만보다 더 큰 판돈을 테이블에 올렸다.
“무이자로 하겠습니다.”
“뭐?”
“1조 7천억 원에 대해 담보만 잡고 이자는 안 받겠다고요.”
영만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겨우 억누르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
재만은 그에게 손해밖에 없는 제안을 했다면, 나는 그에게 이득밖에 없는 제안을 던졌으니까 당연한 반응이었다.
1조 7천억 원은 현재 은행 금리만 따졌을 때 연 5~600억 원 정도는 되었다.
재만이 내건 조건은 1700억 원이었고.
태선카드가 1년간 현상 유지만 하더라도 최소한 그만큼의 이득이 뒤따라오는 것이다.
물론 나는 태선카드가 바닥에 처박히고 영만의 지분이 내 손에 들어올 것을 알고 있다.
영만의 입장에서는 내가 완전히 호구로 보였겠지만, 나 또한 마찬가지다.
영만이 움켜쥐고 결코 토해내지 않을 지분을 가져올 기회였으니까.
영만이 겨우 웃음을 참아내고는 말했다.
“역시 조카밖에 없네. 계약은 언제 할까? 나는 오늘이 좋은데.”
***
GB인베스트먼트의 이름으로 영만에게 1조 7천억 원의 자금 수혈을 하고 한 달이 지났다.
태선카드의 자금난이 완화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태선카드에서 새롭게 출시한 상품들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주로 생활자금이 필요한 대학생이나 사회초년생을 대상으로 한 상품으로, 금리가 낮아 벌써부터 인기였다.
이미 카드 돌려막기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저런 상품이라니.
적어도 태선카드가 내년 안에 기사회생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진태의 서재를 방문했다.
건강상의 이유로 침실에 누워있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진태는 여느 때처럼 서재 깊은 곳에서 신문을 펼쳐 읽고 있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낯간지러운 말을 하려거든 돌아가라.”
“여전하시네요.”
“네놈도 여전하구나.”
처음에는 나를 적대시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의 투박한 말투가 이제는 정겹게 들렸다.
진태는 어느새 신문을 내려놓고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강렬하고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은 이제 사라지고, 지극히 평범한 노인 한 명이 보였다.
그제야 진태도 결국 한 명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태의 맞은편에 있던 의자를 들고 진태의 옆으로 갔다.
진태가 질색하며 말했다.
“뭐 이리 바짝 붙어?”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잖아요.”
“내가 죽기라도 하더냐? 안 하던 짓을 다 하고 말이야.”
“그러게 진작에 부르시지 그러셨습니까. 이게 대체 얼마 만입니까.”
“가만 앉아 있어도 흐르는 게 시간이다. 네가 내 나이 돼 봐라. 네가 한 말이 얼마나 우스운 말인지 알게 될 게다.”
진태는 모난 말을 뱉으면서도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치 한순간이라도 진태의 모습을 눈에 담으려는 나처럼.
그렇게 한참을 서로 바라보다가 진태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안 하던 짓을 했더구나.”
“셋째 큰아버지한테 융자한 것 말하는 겁니까?”
“그래. 괜한 짓을 했어.”
“그러는 할아버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내가 무엇을 말이냐.”
“셋째 큰아버지 기사 막고 태선카드 흔들리는 거 부여잡으신 게 할아버지 아닙니까. 이전 같았으면 그런 적자기업은 곧장 쳐내셨을 텐데요.”
진태는 시선을 위로 올려 닫혀 있는 천장을 잠깐 보고는 나지막이 말했다.
“강빈아. 나도 나이가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늘 팔팔 끓었던 기운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어. 6시가 되면 칼같이 뜨이던 눈은 이제 겨우 앞을 분간한다.”
“할아버지….”
“영만이, 그놈? 능력이 안 된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 예전 같았으면 내가 태선카드를 가져와서 키우면 될 문제였어. 하지만 이젠 나에게 그런 시간이 없다.”
“태선에는 좋은 인재들이 많지 않습니까. 굳이 셋째 큰아버지가 아니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정순이, 동만이가 그렇게 나가고 많게만 느껴지던 자식들이 이제 겨우 넷이다. 구실을 못 하는 놈이라도 제 몫은 챙겨줘야지.”
영만의 몫이라… 진태가 챙겨줄 내 몫은 과연 어느 정도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진태는 나이가 들어서인지 감정적으로 변했다.
오직 태선의 이득만을 위해 결정하고 움직여 온 진태라면, 내 몫이 기대되었지만, 자식들에게 공평하게 배분한다 하면 손자인 내가 받는 몫은 잘해야 소수점 한자리의 지분이겠지.
진태의 거친 웃음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녀석아, 이 귀여운 녀석아. 설마 네놈이 받을 유산이라도 걱정한 게냐?”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이런 뻔뻔한 놈!”
진태가 몇 번 그랬듯, 장난삼아 손찌검이라도 할까 싶어 몸을 움츠렸지만 진태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대신 진태는 이빨까지 드러내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네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지. 능력이 앞에 오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욕심. 걱정하지 마라. 네 몫은 이미 정해져 있어.”
내가 걱정하지 않을 정도의 몫이라면 과연 어느 정도일까.
그 누구도 아닌, 태선의 주인인 진태가 한 말이기에 잠깐 마음이 붕 떠버렸다.
진태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궁금하냐?”
대답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답했다.
“아니요. 저는 더 보여줄 거고, 더 인정받을 겁니다. 그러니 제 몫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