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진태의 저택을 빠져나온 영만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진태와의 독대는 한 시간도 안 되었지만, 그 시간 동안 워낙 긴장을 한 탓에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었다.
게다가 지금 영만이 하려는 일은 진태의 뜻에 위반되는 일이다.
그러나 영만은 자신의 결정을 되돌릴 수 없었다.
한평생 태선가의 사람으로서 늘 진태의 자리만을 바라오며 살아왔다.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엔, 자신의 삶이 너무나 아까웠다.
“부채 2조… 비자금에 다른 계열사 끌어모으면 3000억 원쯤 된다. 나머지만 어떻게든…”
영만은 이미 태선보험에서 약 2700억 원, 태선캐피탈에서 약 1200억 원의 자금을 빼돌려 태선카드의 부채를 막은 전적이 있다.
태선보험에서 1500억 원을 추가로 수혈받은 데다가 그동안 몰래 숨겨온 비자금까지 꺼내야 겨우 3000억 원.
카드사의 부채를 막기에는 역부족했다.
영만은 부채만 해결한다면 태선카드를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망설임을 뒤로 하고 휴대폰을 들었다.
“...형.”
“너랑 일없다.”
재만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영만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이번 한 번만 도와줘라.”
“하, 영만아. 네가 한 짓 뉴스에 실리고 태선 전체가 흔들렸어. 전자도 주가 회복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고.”
“그러니까 다시 일어나야 하지 않겠어?”
“나도 네가 이대로 무너지는 건 보기 싫다. 그런데 상황이 이런 걸 어쩌냐.”
재만이 보인 빈틈을 놓치지 않고 영만이 말했다.
“부채만 해결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어.”
“이미 신용평가 박살 나고 여론도 뒤돌았는데 어떻게 다시 살려?”
“형이 저번에 소개시켜 준 사람 기억나? 금감원 김금보 부원장.”
“그래. 안 그래도 일주일 전부터 계속 전화 왔더라. 받진 않았는데, 보나 마나 너 때문에 자기 핀치 몰렸다고 하소연하겠지. 지금 제 위치도 지키기 힘들어하는 사람이 아니냐?”
“부채만 해결하면 옷 벗을 각오로 평가 바꾼다고 했어. 부원장이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거 형도 알잖아.”
재만은 잠시 고민하는지 뜸 들였다가 말했다.
“...부채 막으려면 얼마가 필요한데?”
“1조 7천억….”
“...지금 나랑 장난치냐?”
“내가 꿍쳐둔 돈들 싹 다 털어서 남은 게 그 정도야. 보답은 확실하게 할게. 1조 7천억만 형이 대주라.”
“하… 그래서 조건은?”
재만의 말에 영만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재만이 보였던 빈틈은 결국 이 말을 꺼내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영만은 휴대폰을 멀리하고 한숨을 크게 내뱉은 뒤 담담하게 말했다.
“기업평가 바뀌고 안정권 들어가기까지 최소 1년이야. 1년 만기로 하고 삼천. 이 이상은 나도 힘들어.”
1년간 이자로 삼천억 원이라면 연이율이 15프로가 넘는다.
영만 스스로가 생각했을 때, 이 정도도 과하다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급하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재만의 욕심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년 만기로 십프로에 해줄게. 대신 네 명의로 된 보험이랑 캐피탈 전부 담보로 잡아.”
“이런, 씨…”
영만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영만이 금융계열 지주회사인 태선보험과 태선캐피털, 두 기업에 갖고 있는 지분은 현재 주가로만 재만이 빌려주기로 한 1조 7천억 원을 훨씬 상회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조 원이 넘었다.
영만의 명의로 되어있는 지분이기는 하지만, 진태가 자신이 준 지분을 파는 걸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법적으로 처리한다면 지분 양도과정에서 차익은 남겠지만, 재만이라면 태선보험의 주가를 낮추는 한이 있더라도 모두 가져갈 것이다.
게다가 이율을 줄여가면서 잡은 담보가 지분이라면, 마치 태선카드가 망할 것을 확신하는 것처럼 들려 기분이 더 더러워졌다.
영만이 휴대폰을 꽉 움켜쥐고 있는데 재만의 여유로운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렸다.
“영만아. 내가 너 도와주는 돈 쉽게 구한 거 아니다. 전자 운영하면서 꼬박꼬박 모은 돈이야. 너도 그 정도 리스크는 짊어져야지.”
“... 생각해볼게. 일단 제안이라도 고마워.”
“그래. 다른 거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형제 좋은 게 뭐냐? 이럴 때 서로 도와야지.”
영만은 대충 전화를 마무리하고 뇌까렸다.
“하… 돕기는 개뿔.”
영만은 차 안에 들어가 잠시 흥분을 가라앉힌 뒤에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
다음 상대는 그녀의 막내 여동생인 남순이었다.
전화를 걸고 얼마 되지 않아 남순이 받았다.
“남순아. 나 영만이 오빠.”
“응. 알아.”
“요새 잘 지내고 있어? 아버지 건강 악화되시고 통 못 봤네.”
“나야 잘 지내지. 그런데 오빠는 아닌 것 같더라. 기사 봤어.”
“으, 응. 사실 오빠가 요새 조금, 아니 많이 힘들다. 그래서 말인데…”
“오빠.”
남순이 제 말을 끊자 영만은 당황스러웠다.
단 한 번도 말을 끊기는커녕, 자신이 말하지 않더라도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게 남순이었다.
영만은 긴장된 채로 이어지는 말을 기다렸다.
“안 그래도 연락하려고 했는데, 돈 받아내려고 조직까지 동원했다며. 자살한 사람들까지 있다는데…. 그만하면 안 돼?”
“남순아. 내가 이율을 속인 것도 아니고 서류에 다 명시된 사실들인데 사인한 건 그 사람들이야. 너,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한다.”
“법 지키라고 말하진 않을게. 어느 정도 편법은 용인해야 되는 걸 아니까. 그런데 사람을 죽게 만드는 건 아니지.”
“그래. 네 말대로 조심할게.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겠냐?”
“다시 카드사 살리려고 하는 거지? 그럼 나는 못 도와줘. 다른 사람 알아봐.”
남순은 영만이 이해할 수 없는 면에서 고집이 있었다.
그리고 한 번 고집을 부릴 때면 그 누구도, 심지어 진태마저 남순을 이기지 못했다.
영만은 말이라도 더 꺼내 볼까 하다가 고개를 젓고 말했다.
“...알았다. 다음에 연락하마.”
재만도, 남순도 영만의 제안을 거절했다.
동만과 정순은 도와주기는커녕 능력도 없으니 예외로 치고, 남은 것은 같은 부회장 라인에 준만과 강빈뿐.
준만은 그동안 자신이 천대해 왔던 것이 있으니 제안하기가 꺼려졌고, 남은 사람은….
“그 애송이가 전에 나와의 일을 생각해보겠다고 했지….”
강빈은 일전에 영만이 손을 잡자고 했을 때 생각해보겠다고 했다.
거절하려는 듯한 뉘앙스도 아니어서 더 마음이 갔다.
영만은 휴대폰을 쥐었다가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
“제약사 주식들 전부 정리 끝났어요. 결과부터 말씀드리자면 총투자금 108억 달러에 수익금은 약 33억 달러입니다.”
“고생했다. 그 정도면 선방했네.”
이른 아침 에릭은 전화로 사스와 관련된 제약사 종목들을 모두 정리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반년도 안 되는 투자 기간으로 4조 원 가까이 수익을 얻었으니 만족할 만했다.
“대표님…. 선방 수준이 아니라요.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파이낸셜 타임스 같은 대형 경제지에서도 저희를 다루고 있어요. 사스가 표면화되기 두 달 전에 제약사 주를 싹쓸이한 투자회사라고요. 제가 거절할 정도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하고 있다니까요.”
에릭이 인터뷰를 거절할 정도라면, GB인베스트먼트가 어느 정도의 인지도를 쌓았는지 알 것 같았다.
에릭은 내가 한국에 있어서 잘 모르지만, 미국 증권가에서 GB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전했다.
“그 유명세를 이용해서 말인데, 에릭. 네가 직접 가야 할 곳이 생겼어.”
“대표님이 가라면 어디든 가야죠. 이번에는 같이 가시나요?”
“아니. 한국 일이 바빠서 나는 자리 못 비울 것 같아.”
“아참, 황실장님이 곧 출산이라면서요. 물산 일 때문에 바쁜 거예요?”
에릭의 말에 실웃음이 나왔다.
황비서가 나의 태선물산 사장 대리 역할로 많은 일들을 하긴 했지만, 대체할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태선중공업에서 전무 이사역할을 수행하고 있던 사람을 데려와 황실장이 하고 있던 일을 임시로 위임했고, 최종 컨펌은 내가 내리고 있는 중이었다.
결과적으로 바뀐 것은 크게 없었다.
“하하. 그건 아니고, 태선가 내의 일도 그렇고, 호텔도 판교점 짓고 나서 많이 바빠졌어.”
“태선가 내라면… 태선카드 말씀하시는 거죠? 저도 기사 봤어요. 그런데 그 사단을 겪고도 아직 정상 운영하고 있는데 말이 돼요?”
“그러게…. 태선은 태선이라는 거지.”
에릭의 말마따나 태선카드는 검찰의 압수수색과 언론사의 공격을 직격으로 맞고도 아직까지 건재했다.
그러나 아직 영만을 무너뜨리려는 내 계획은 실행 중에 있다.
명한을 시켜 임원들의 증언이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고, 아직 남아 있는 패도 있다.
에릭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래서, 제가 하명을 받고 찾아갈 곳이 어디입니까?”
“너 요새 사극이라도 보냐? 하명이라는 말을 구두로 들을 줄은 몰랐네.”
“가끔 한국문화가 그리워서요. 한국 친구가 GB택배 통해서 ‘태조 왕건’ 보냈는데 재밌더라고요.”
에릭이 미국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국에서도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는 걸 잊고 있었다.
조만간, 한국으로 한번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에릭, 네가 갈 곳은 이제 익숙한 실리콘밸리야.”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다녀왔어요. 페이지가 대표님 뵙고 싶다고 전해달라는 걸 깜빡했네요.”
“구글도 방문할 때가 되긴 했지. 마지막으로 보고 벌써 몇 년이 지났으니까.”
“실리콘밸리면 부담 없이 갈 수 있죠. 기업투자죠?”
“응. 그곳에 올해 창업한 자동차기업 하나가 있어.”
“... 실리콘밸리에 자동차기업이요? 그리고 올해 창업을 했다고요…?”
에릭이 의문을 표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에 위치한 실리콘밸리에 있는 기업들은 대부분 IT산업과 벤처기업들이니까.
게다가 자동차기업은 제조 자체에 높은 기술력이 필요하고, 긴 역사가 곧 브랜드 가치로 이어지기 때문에 신생 기업은 살아남기 힘들다.
그런 모든 역경을 뛰어넘고 전 세계 자동차 제조회사 중 최초로 시총 1조 달러를 뛰어넘은 기업이 바로 테슬라였다.
테슬라는 2003년 7월, 마틴과 마크가 설립한 자동차 기업이다.
에디슨과 대립했던 인물로 널리 알려진, 세계적인 물리학자 니콜라 테슬라의 이름에서 따온 사명이다.
두 창업자는 전자책 단말기를 개발해내 이미 2억 달러에 기업을 인수시킨 전적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단말기를 개발해내며 배터리에 주목했던 창업자들은, 이것이 휘발유의 대안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들은 납축 배터리를 사용해 전기 자동차를 제조하던 업체를 찾아가기도 하고, 관련 업체들에 투자를 하기도 하면서 결국 ‘리튬이온배터리’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즈니스모델 구축까지 끝낸 테슬라에게 남은 것은 투자자 유치.
1년 뒤 그들이 찾아갈 투자자는 페이팔의 창립자이자, 어린 나이에 백만장자가 된 일론이다.
일론은 650만 달러, 한화 약 78억 원을 투자하면서 테슬라의 주식 20프로를 소유한 최대 주주이자 회장이 되었다.
수화기 너머 에릭에게 대답했다.
“네 프리미엄을 두둑이 챙겨 줄 기업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