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어제 오후 태선그룹 금융계열의 서영만 부회장의 비서직을 수행하고 있는 정 모 씨가 태선카드의 내부 실태에 대해서 고발했습니다. 정 모 씨의 주장에 따르면…”
정명한이 갖고 있던 증거들을 어제 한꺼번에 터트렸다.
태선카드와 스윗머니의 유착 관계, 추심 과정에서의 온갖 불법적인 행각들이 대부분의 언론사에서 다뤄졌다.
측근의 내부고발이었기 때문에, 지난번에 다뤄졌을 때보다 더 크고 빠르게 번져나갔다.
비판적인 여론이 들끓고 있는 와중에 ,태선카드 측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는 상황.
뉴스에서 전에 예고되었던 검찰 조사가 뒤늦게 시작되었음을 알렸고, 조사관들이 박스째로 서류들을 싣고 나가는 것이 보였다.
앵커가 이어서 말했다.
“이번 태선카드 특별감사는 신용카드 정책과 신용카드사에 대한 금융감독 기능이 제대로 작동되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2002년 5월 이후 강화된 카드 규제 정책의 실효성에 대한 의문과 여신전문금융업법에 의한 카드업 규제가 제대로 실시되었는지에 대한 비판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태선카드가 내보인 실적이 거짓되었다는 것까지, 검찰 수색 과정에서 드러났다.
카드사의 손익분기점은 대략 연체율 6퍼센트를 기준으로 잡는다.
태선카드가 밝혔던 이번 분기의 연체율은 5.5퍼센트.
겨우 적자를 면한 수준이었지만, 다른 카드사의 연체율에 비하면 월등히 낮은 연체율이었기에, 오히려 주가는 상승 중에 있었다.
그러나 검찰 수색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태선카드의 실질 연체율은 16퍼센트 정도로, 다른 카드사에 비해 여전히 낮은 수치이긴 하지만 누적된 적자는 기업규모가 크다 보니 만만치 않았다.
영만이 부회장으로 있는 태선금융 계열의 지주회사인 태선보험뿐만 아니라 태선캐피털에까지 자금수혈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부채가 쌓여 있었다.
게다가 불법 채권 추심이 밝혀짐으로써 이미지 쇄신도 힘든 상황.
이런 일에 진태가 도움을 줄 리 없으니, 영만은 놔두기만 해도 알아서 자멸할 것이다.
뒤에서 잠자코 서서 같이 뉴스를 보고 있던 영균에게 말했다.
“서영만 사장은 뭐 하고 있어?”
“집에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앞에는 기자들이 깔려 있어 감시를 해도 의미가 없더군요.”
“그럴 만하지. 그래도 예의주시 하고 있어. 발버둥도 안 치고 이대로 물러날 사람은 아니니까.”
“예. 그렇지 않아도 팀원 두 명은 늘 상주시키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게 된 영만이 이제 무슨 선택을 할지는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영만이 다시 일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
“부원장님. 저 서영만입니다.”
“하… 예. 부회장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시는 겁니까?”
영만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였다.
지금 통화하고 있는 사람은 금융감독원의 부원장, 김금보.
오랫동안 영만이 로비를 해오며 관계해왔던 사람이지만, 어제 이후로 도통 전화를 받지 않아 짜증이 치민 상태였다.
금보는 도리어 화를 내며 말했다.
“부회장님이 카드 상품 내건 거 승인 낸 게 저잖습니까. 안 그래도 위에서 저한테 책임을 묻고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전화를 거시는 겁니까?”
“위에서 뭐라고 하고 있습니까?”
“하… 이제 저희는 덮을 수 없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검찰한테 넘어간 사건 아닙니까.”
“방법…이 어떻게, 없겠습니까?”
“떼쓰신다고 방법이 솟아나면 제가 이러고 있겠습니까? 아닌 건 아닌 겁니다. 저도 부회장님 위해서 그동안 애쓴 거 아시잖아요.”
금호의 단호한 말투에 결국 영만이 한숨을 내쉬고 본론을 꺼내기로 했다.
이대로 간다면 태선카드의 부도뿐만 아니라 영만 산하의 모든 계열사가 줄줄이 도산될 위기에 처했다.
“지금 태선카드 부채만 2조 원 가까이 됩니다. 이게 드러나면 카드고, 금융이고 도미노로 쓰러져요. 큰 걸로 몇 장 드릴 테니까 이번 분기까지만 평가 좋게 해주세요.”
“아니, 서 부회장님! 사람이 어찌 그리 단순합니까. 그동안 상품 승인 내고 평가까지 가라로 써온 게 드러나서 제가 옷을 벗거나, 제 아래 한 놈 보내거나 기로에 놓여있는데 그딴 소리가 나옵니까?”
“김부원장님. 큰 걸로 열 장 드리겠습니다. 정말 방법이 없겠습니까?”
“하….”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뱉은 금보가 이어서 말했다.
“일단 자금 수혈부터 받으십시오. 제가 도와준다고 해도 기업부채가 그 모양이면 저도 막기 힘듭니다.”
“지금 보험이다, 캐피탈이다 싹 다 긁었습니다. 더 이상 긁어 올 때도 없어요.”
“태선의 다른 계열은 뭐 한답니까? 아무리 계열 분리를 했다지만 제 식구 도산되는 건 막고 볼 것 아닙니까.”
금보의 말을 듣고 영만이 제 혈육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을 도와줄 법한 인물은 없었다.
각자도생이 신조인 남매들이 자신의 영락을 반기면 반겼지, 도와줄 것 같진 않았다.
그나마 생각나는 사람은 남순이었지만, 불법적인 일에는 질색하는 그녀이기에, 이번 일에 도움을 바라긴 힘들었다.
입술을 질끈 깨문 영만이 말했다.
“일단 부채만 막으면 이번 분기 넘기는 겁니다?”
“뭐… 일단은요. 그리고 큰 거 열 장으로는 안 되겠습니다.”
“예?”
“이번 일 끝내면 저도 옷 벗어야 될 텐데 겨우 그걸로 되겠습니까? 큰 걸로 삼십 장. 그 정도는 받아야 하겠습니다.”
고작 평가 한 번 좋게 내주는데 삼십억 원을 달라고 한다.
영만이 치가 떨려 눈을 까뒤집었다가 겨우 진정하며 말했다.
“확실하게 처리만 해준다면… 그렇게 하죠.”
“예. 일단 부채부터 막으세요. 그것도 안 되면 시작도 없습니다.”
***
황실장이 태선백화점 부회장실 앞에 서 있었다.
“좋은 아침.”
“아, 부회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무슨 일이야?”
“정명한 상무가 찾아왔습니다. 표정이 워낙 다급해서 부회장님 오시면 바로 말씀드리려고 대기 중이었습니다.”
“전화를 하지.”
“이른 시간에 실례되는 행동이잖아요.”
작은 배려가 몸에 배 있는 황실장을 보며 웃어 보였다.
그리고 이제는 만삭에 가까운 배를 슬쩍 보고 말했다.
“휴가는 왜 안 갔어?”
“음… 아직 할 만하다고 판단했습니다.”
“황실장이 가끔 보면 융통성이 없네.”
“예?”
“이번 주까지 밑에 비서진들한테 업무 넘기고 다녀 와. 황실장이 휴가를 언제 가든 반년은 회사 못 나오게 할 테니까 그렇게 알고.”
“부회장님….”
어차피 휴가를 갈 거라면 빠르게 갔다가 복귀하는 게 나로서도 편하다.
집무실에 들어가고 얼마 안 되어 명한이 들어왔다.
명한은 무언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들어오더니 나에게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약속한 대로 증언했습니다. 부회장님도 약속 지켜주세요.”
“그날 바로 10억 원 보내지 않았습니까?”
“구 사장이 도주했습니다. 아마 해외로 도피할 것 같은데, 그 전에 저를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어제도 대포폰으로 살해 협박 문자가 날아왔습니다.”
“지금 그럼 하려는 말이…”
“예. 제 목숨이 위험합니다. 부회장님. 살려주십시오.”
명한을 지그시 바라봤다.
초조해하는 기색이나, 어딘가 퀭해 보이는 눈빛을 보아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럼 원하시는 게 뭡니까?”
“당분간 해외에 나가 있을 생각입니다만… 구 사장이라면 어떻게든 추적해서 저를 찾을 겁니다. 부회장님이 전용기가 있다고 들었어요. 도와주십시오.”
“도와드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대신 해줘야 할 일이 있어요.”
“뭐든 하겠습니다.”
손깍지를 끼고 명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태선카드 임원들도 서영만 사장의 실태를 다 알고 있을 겁니다. 그들을 증언하도록 설득하고 증거를 받아내세요. 할 수 있겠습니까?”
“해보기야 하겠습니다만… 쉽진 않을 겁니다.”
“30억 원 추가로 지급하겠습니다. 그 돈으로 회유해보고 안 된다면 태선카드가 끝날 때 그들도 함께할 거라고 하세요.”
태선카드에서는 이미 구조조정이 일어나고 있었고, 임원들마저 그만두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도 자신들의 위치가 위태롭다는 것은 충분히 알 터, 이 정도 조건이라면 충분할 것이다.
“일단 알겠습니다. 설득해보겠습니다.”
“예. 그리고 경호원 한 명을 붙여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부회장님.”
명한이 허리를 90도에 가깝게 숙였다.
***
영만은 감히 고개를 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수그린 채 몸을 떨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실크로 된 검은 가운을 입고 링거를 팔에 꽂은 진태가 앉아 있었다.
“고개 들어라.”
“회, 회장님….”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한 진태의 목소리에 영만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한 진태의 얼굴은 더없이 딱딱하고 차가웠다.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기에, 조금은 유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은 영만의 온전한 착각이었다.
진태가 천천히 말했다.
“네놈 꼬라지를 보니까 잘못한 줄은 아는 모양이야.”
“아직, 아직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자금 수혈만 진행하면 금감원 김부원장이 나선다고 약속받았어요.”
“안타깝구나.”
“예…?”
“네가 돈을 제대로 만질 줄 알았다면 물산? 전자? 어떻게든 넘겼을 게다. 그런 좋은 몫을 갖고 본전은커녕 시궁창에 처박아?”
“회장님, 아직 안 끝났습니다! 조금만 시간 주시면…”
“아니다. 네놈을 그 자리에 앉힌 내 실수야.”
영만은 얼굴을 붉힌 채, 입만 뻐끔거릴 뿐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진태가 눈을 흘기며 말을 이었다.
“할 깜냥이 안 되면 그만둬야지. 더 심각해지기 전에 팔아치워. 카드는 이제 들고 있을 게 못 된다.”
“아버지… 아무리 그래도 태선을 붙인 기업을 팔다니요.”
진태가 제 팔에 꽂혀 있던 링거를 거칠게 뽑아내며 말했다.
“이름 더럽히는 기업은 필요 없다. 당장 없애. 한국에서 살 놈들 없으면 해외 시장에 넘길 거다.”
한국에서 카드대란이 일어나고, 카드사들이 도산되기 시작하자 외국계 기업들이 탐내기 시작했다.
“연체율이 15프로가 넘어가는 태선카드는 좋은 값에 팔릴 게다. 자리는 물리지 않을 테니 보험이나 잘 챙기고 있어.”
영만은 이제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연체된 돈만 다 받아낸다면 기업가치 10조 원에 가까이 되는 태선카드를 완전히 버리고 나머지 계열사들에 만족할 것이냐, 혹은 어떤 방법을 써서든 태선카드를 지켜낼 것이냐.
태선카드를 팔게 된다면 진태의 성격상 영만에게 돌아갈 몫은 제로일 것이다.
영만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승계와는 영원히 멀어질 것이고.
진태가 나지막이 말했다.
“일단 지금 기사는 다 내려주마. 네놈 하나 죽고 끝날 문제가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진태가 기사를 내린다는 말은, 지금 이 상황 자체를 무마시키겠다는 말과 비슷할 것이다.
영만은 진태가 가진 힘에 새삼 놀라면서도, 태선카드를 어떻게 지킬지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진태의 얼굴을 조심스레 쳐다보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무섭고 정정해 보였던 진태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롭고 노쇠해 보였다.
진태가 링거를 뽑은 팔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까지 보자 영만은 생각했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