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이 모자란 새끼야.”
영만의 발이 명한의 정강이를 가격했다.
“내가!”
다시 한번 정강이를 발로 차고,
“일 처리 똑바로 하라고 했지!”
이번엔 주먹이 명한의 명치에 꽂혔다.
“재활용도 안 될 쓰레기 같은 새끼가.”
영만은 그럼에도 분이 안 풀렸는지 집무실 책상 위에 있던 값비싼 물건들을 모조리 던졌다.
명한은 고통에 꺽꺽대며 바닥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어제 한국 3대 방송국 중 하나인 SCB에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에 대한 부작용과 그에 따른 자살 건에 대해 자세하게 다뤘다.
스윗머니의 협박으로 인해 고발조차 하지 못하던 태선카드의 채무자들이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다른 방송국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언론사들이 현재 카드대란에 대해 다루고 있었다.
태선카드사의 코앞에서 불법적인 채권 추심을 멈추라는 시위가 벌어졌다.
한 커뮤니티를 통해 시작된 태선카드 불매운동은 이제 막 시작되었지만, 얼마나 크게 번질지 아직 감도 안 잡히는 상황이다.
어제부터 오늘까지 태선카드로 결제한 상품을 취소하거나, 그동안의 불법추심 과정에 대해 소송이 온 것만 숫자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오늘 아침,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뉴스가 전파를 탔고, 태선카드의 주가는 하한가를 찍은 상황이었다.
영만은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명한의 머리에 서류뭉치를 던지며 말했다.
“SCB 국장한테는, 연락은 왔어? 지들이 받아 처먹은 게 있는데 갑자기 터트린 이유가 있었을 거 아니야.”
“... 자기들도 막아 보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합니다. 윗선에서 내려온 거라서 어쩔 수 없었다네요.”
영만은 이마를 짚고 쓰러지듯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SCB는 대외적으로 공영방송을 표방하고 있지만, 사실상 국가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런 SCB 국장 위에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 청와대 안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영만이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밖에 없었다.
영만이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의 폴더를 열어 번호를 눌렀다.
그리고 잠시 뒤.
“이 실장님…. 저 영만입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본론부터 꺼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양해해주십시오.”
“말씀하시죠.”
“회장님과 독대 가능하겠습니까…?”
“회장님이 지금 누굴 만날 상황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이거 잘못하면 태선카드가 날아갑니다. 느긋하게 지켜볼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회장님께 여쭤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영만은 초조한 마음에 신경질적으로 몸을 긁어댔다.
그러길 잠시, 채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그때 약속한 바와 같이 어떠한 도움도 줄 수 없다. 네가 벌인 일의 책임은 네가 져야 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셨…”
“이 실장님!”
영만이 벌떡 일어나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이 실장님이 한 번만 회장님 설득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청와대에 연락 한 번만 넣어달라고 해주세요. 예?”
“부회장님. 저는 회장님의 지시를 따를 뿐, 어떠한 방향도 제시하지 않습니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럼 저보고 이대로 무너지라는 소립니까? 평생 태선을 위해 노력해온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영만아.”
수십 년 전 유년의 자신을 불렀던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자, 영만이 움찔했다.
채규는 그때와 같이 부드러우면서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 말 똑똑히 들어라. 회장님은 지금 너를 도와줄 생각도 없고, 가치도 느끼지 못해. 네가 벌이는 일들을 그냥 묵인하셨던 이유? 그게 너를 믿어서 그런 것 같으냐?”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당연히 저를 믿으셔서…”
“회장님 얼마 안 남았다. 태선의 당장 이득보다 태선을 이끌 사람을 정하는 게 시급한 일이라고.”
“그럼 저를 일부러 내치기 위해서 그러셨다는 말입니까…?”
“내치기 위해서? 네가 한 짓들을 회장님이 지시라도 했다는 말이냐?”
채규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어있었다.
영만은 자신이 고등학생일 때, 경호원들을 시켜 동급생을 팼다가 채규에게 불려갔던 기억이 떠올랐다.
욕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두려운 게 진태밖에 없던 그 시절의 영만이 유일하게 굽혔던 사람이 채규였다.
채규는 영만뿐만 아니라 그의 남매들에게 눈치 보지 않고 거침없이 충고하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채규가 차갑지만 영만의 속내를 꿰뚫어 보듯 말했다.
“너랑 너희 남매들이 부회장 달고 회장님은 경영 문제에 거의 손대지 않았어. 너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기회가 있었다. 네가 정말 회장님의 인정을 받고 네 몫을 받아 가고 싶다면, 너 스스로 쓸모 있다는 걸 보여줘라.”
“...알겠습니다. 회장님의 도움은 바라지 않을게요. 대신 이번에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이실장님이 조언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영만의 말이 끝나고 수화기 너머 종이를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멈추고 채규가 말하기 시작했다.
“회장님과 별개로 네게 도움을 주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다.”
“예…. 다음부턴 제힘으로 헤쳐나가겠습니다.”
“일단 언론사에서 다루는 주제를 태선카드에서 신용카드의 문제로 확대시켜라.”
“그것도 카드 시장 전체가 휘청일 텐데 문제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전체가 휘청여야 태선카드의 문제가 덮이지. 그리고 정부 쪽에서 카드 사업을 없애진 못해. 우리나라처럼 내수 주도형 경제 성장 국가에서 신용카드는 필연적으로 필요한 사업이다. 여론이 좋지 않더라도 정부는 신용카드 사업을 살릴 수밖에 없어.”
영만은 벙찐 표정으로 서둘러 펜을 꺼내 받아적기 시작했다.
채규의 말은 큰 파도로 작은 풍랑을 덮자는 말이었다.
태선카드의 문제를 신용카드 전체의 문제로 확대시켜 책임을 분산시키자는 것.
다른 카드사들이 태선카드처럼 조직까지 동원해 추심하진 않았으나, 적당히 위법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었다.
그것을 뭉뚱그려 합친다면….
영만이 감탄한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숨길 생각만 했지, 부풀릴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역시 이실장님입니다.”
“아직 얘기 안 끝났다.”
“예. 말씀하십시오.”
“SCB 총괄하는 게 외교부의 윤기춘 팀장이야. 다른 언론담당관들도 윤기춘하고 얽혀있고. 그 위에 몇 명 더 있겠지만 일단 윤기춘하고 줄 이으면 어느 정도 해결될 거다. 연락해서 다른 카드사들까지 싸그리 보도하라고 해. 그리고 채무자들과 법정 싸움은 절대 지지 마라. 여기서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순간 덤터기 쓰는 건 태선카드가 될 거야.”
“명심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될지 갈피가 잡히자 영만은 그제서야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질 수 있었다.
영만은 수화기 너머에 있는 채규를 향해 고개까지 숙인 뒤 말했다.
“도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빚은 나중에… 꼭 갚겠습니다.”
“부회장님.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그리고 다른 분들에게도 한 번은 도움을 드릴 겁니다. 그래야 공평한 기회겠죠.”
“... 알겠습니다.”
영만은 혹시나 채규가 자신의 밑으로 들어오려는 걸까, 했던 생각을 도로 접었다.
수십 년을 진태 곁에서 미동도 없이 자리를 지킨 사람이 채규였다.
영만의 눈앞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서 있는 명한이 보였다.
“한심한 새끼…. 지금부터 내가 하는 얘기 잘 들어. 우선…”
***
태선카드의 불법 채권 추심 의혹이 불거지고 두 달이 지났다.
태선카드뿐만 아니라 다른 카드사들의 추심 행위도 속속들이 밝혀지며, 신용카드 전체의 문제가 되었다.
각 카드사에 과징금이 부여되었고, 경고 조치가 이루어졌지만 그야말로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태선카드, 하나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과, 태선카드에서 수수료 대폭 인하와 사용한 금액별 등급제 등 여러 가지 프로모션을 선보이자 대중들은 다시 태선카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죽었음에도 어이가 없을 정도로 태선카드는 다시 잘나갔다.
예상은 했다.
영만과 태선카드가 이렇게 쉽게 무너질 리가 없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두 달 동안 영만을 무너뜨리기 위한 계획을 더욱 철저하게 준비했다.
“차실장님. 오늘 터트리세요.”
“하필 오늘 말입니까?”
수화기 너머 영균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판교에 있는 태선호텔의 분점.
그리고 오늘은 태선호텔 판교점의 준공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네. 오늘이어야 합니다. 태선호텔의 준공식 기사가 나온 다음 곧바로 진행하세요.”
“...알겠습니다.”
평소에 내 지시에 의문을 갖지 않던 영균도 의아했는지, 망설이는 기색이 눈에 선했다.
태선카드와 태선호텔이 같은 계열사가 아니더라도 태선은 태선이다.
태선카드의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밝혀지고 있는데, 같은 그룹 안에 있는 태선호텔이 준공식하는 꼴을 좋게 볼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슈는 순간이고, 인식은 오래가지 않는 법이다.
굳이 태선호텔의 준공식이 열리는 오늘, 기사를 터트리는 이유는 더욱 이목을 끌기 위해서.
태선호텔이 억울하게 같이 비판을 받더라도, 태선카드는 확실하게 끌어내릴 것이다.
준공식에는 국토부장관, 문체부장관, 경기도지사, 성남 시의원, 분당 구의원 등 정부 인사들을 포함해 국내 10대 그룹들의 총수들 중 절반 이상이 모였다.
오늘을 계기로 이 사람들은 또 하나의 연줄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나 정작 이 사람들을 준공식에 모이게 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황실장. 회장님은 결국 못 오신대?”
“네. 오시고 싶어 하셨지만 아무래도….”
말끝을 흐리는 황실장을 보고 주변을 살폈다.
정재계 인사들뿐만 아니라 수십 명의 기자들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며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태는 아마 자신의 건강상태가 언론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것 같다.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추측성 기사로 일축하면 되지만, 초췌한 몰골의 사진이 언론을 탄다면 막기 힘들 테니까.
진태를 태선호텔 판교점의 첫 손님으로 맞이하겠다는 약속은 이로써 이룰 수 없게 되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조금 쓸쓸해지려는데, 셔터 소리가 거세지는 소리와 함께 진석이 등장했다.
미리 황실장을 시켜 언론사의 초점도 내가 아니라 진석에게 맞춰 달라고 지시했기 때문에, 반응이 내가 등장할 때보다 시원시원했다.
진석이 태선호텔의 총경영자를 맡고 있으니, 오늘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다.
게다가 태선카드 일을 터트린다면, 오늘 눈치 없이 태선호텔의 준공식을 연 나도 어느 정도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기자들이 진석에게 시선이 몰린 틈을 타, 정재계 인사들에게 다가갔다.
이제 한 시도 쉬지 못하고 이어질 승계 싸움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줄 사람을 찾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