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새해가 밝았고, 전생과 달리 진태는 아직 죽지 않았다.
올해도 역시 새해 조찬은 없었다.
진태가 병원에 가는 일은 없었으나,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눈에 띄게 줄었고, 공식행사에 나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일각에서 진태의 건강 위기설이 돌았으나, 태선의 힘으로 찍어 눌러 찌라시 정도로 인식되었다.
갈수록 노쇠해지는 것이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어쩌면 올해도 순탄하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작은 희망이 생기긴 했지만, 나조차 진태를 만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내가 지금 태선에서 보유하고 있는 지분은 태선반도체, 태선택배와 태선호텔 계열의 지분들, 조금씩 갖고 있는 다른 계열의 지분들까지 모두 합한다면 태선그룹 전체의 7퍼센트를 넘는다.
진태나, 재만이 보유하고 있는 지분이 대외적으로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크게 뒤처지지는 않을 것이다.
태선호텔의 규모도 나의 투자로 인해 순탄하게 커져가고 있었고, 암암리에 매수하고 있는 태선그룹의 주식들도 점차 쌓여가고 있었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무기는 GB인베스트먼트의 투자로 벌어들인 자본이다.
웃돈을 얹어서라도 태선그룹의 주식을 꾸준히 사들이고 있었기 때문에, 내 지분은 갈수록 높아질 것이다.
남은 것은 오직 시간과의 싸움.
패권 싸움의 승자가 되기 위해서 진태가 쓰러지기 전에 더욱 많은 것을 받아내야만 한다.
3월이 되고 노무현이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노무현은 취임사에서 새 정부를 ‘참여정부’로 명명했으며,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한일 경제협력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전생대로라면 ‘재벌 개혁’을 내걸었겠지만 천일그룹의 천경식과의 단일화로 인해서인지, 이에 대한 말을 아꼈다.
전생에서 나온 재벌 개혁과 관련된 정책으로는 상속세제 개편과 사주 일가의 지배력 확대에 금융계열사의 자금을 동원하는 행위를 규제하는 등이 있었지만, 결국 흐지부지되었었다.
집권 이후 카드대란과 함께 사스로 인해 경기가 곧바로 하강했기 때문이다.
시기에 따른 운이 나빴다고 할 수도 있고, 개혁을 표방했으나 경제부처에 관료 출신 인사를 기용하는 등 우유부단한 모습이 문제라고 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정권 변화로 인해 내가 손해를 크게 보지는 않으리라는 것이다.
그리고 사스가 표면화되어 심각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GB를 통해 매수했었던 제약사들은 적게는 6퍼센트에서 크게는 30퍼센트까지 이득을 보았다.
그중 특출나게 올랐던 것은 미국의 머크 제약회사.
사스 백신을 개발했다는 풍문이 돌고 시총 2150억 달러의 기업이 일주일 새 무려 55로 폭등했다.
아쉬운 점은 머크의 주가가 상승세였기 때문에, 다른 제약사들에 비해서 적은 양의 주식을 매수했다는 것이다.
총 제약사 매수금액 108억 달러 중 머크에 투자한 금액은 11억 달러 정도.
단기간의 투자치고는 꽤 큰 이득을 보았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에릭은 전화를 받자마자 하품을 하고는 말했다.
“아, 죄송해요. 제가 어제 잠을 못 자서….”
머크의 주가는 어제 가장 높은 수치로 폭등했고, 나는 여기서 정리하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제약사 주식들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종목이었기 때문에, 이득을 봤을 때 빠지는 게 확실하다.
나한테도 꽤 큰 투자이기 때문에 더 큰 이득을 바라는 것보다, 확실한 이득만을 취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에릭은 나의 판단을 믿고 곧장 전량 매도에 들어갔지만, 수십억 달러 규모의 주식을 한꺼번에 처분하려다 보니 쉽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제약사들에 투자했던 거금이 순식간에 빠진다면 주가 하락도 자연스레 따라오기 때문에, 적당히 치고 빠지는 식의 매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에릭은 이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어느 정도를 매도하고, 다시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처분할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오로지 에릭의 몫이었다.
밤새 컴퓨터 화면만 보고 있느라 잠을 못 잔 것일 테고.
“고생했어. 직원들은 왜 안 시킨 거야?”
“1분 1초에 수십억이 왔다 갔다 하는데, 누굴 믿겠어요? 피곤하긴 해도 제가 하는 게 차라리 마음 편합니다. 하하.”
“하긴, 나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너 말고 다른 사람은 믿기 힘들지. 아, 준희는 어때? 전에 보니까 감은 있던데.”
“준희 감 있죠. 대표님이 마카오에서 초장부터 큰 금액의 거래를 시켜서인지 몰라도 겁도 없고요. 그렇지 않아도 제 일을 분담하고 있어요. 이번에는 단기간에 몰아치는 투자니까 제가 진행했지만 준희도 기회가 되면 한 번 맡겨봐야죠.”
준희의 어리숙한 얼굴이 떠오르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GB에서 움직이는 돈을 보면 떨릴 만도 할 텐데, 에릭의 입에서 겁이 없다는 말이 나왔으니 과감한 면도 있는 모양이다.
에릭은 지금도 매도를 진행하고 있는지, 다급한 목소리와 타자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이 지장 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을 확인했으니, 전화를 끊고 눈앞의 서류에 다시 집중했다.
‘400만 신용불량자의 시대’.
어제자 나온 신문의 헤드라인이다.
다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던 신용불량자의 수가 400만을 넘어섰다.
한동안 뉴스채널은 물론 언론사까지 카드대란과 관련된 얘기는 함구했는데 이제 더 이상 막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신문에는 태선카드, YS카드, LB카드 등 대표하는 카드사들의 온갖 부정적인 모습이 서술되어 있었다.
소득이 없고 신용도가 낮은 사람들에게조차 카드 발급을 진행했고, 이에 소득 자체가 없는 사람들마저 우선 카드를 만들었다.
문제가 된 것은 상품이나 서비스 결제가 아닌, 카드로 돈을 빌려 쓰는 현금서비스였다.
현금서비스의 금리는 연 30프로 정도로 은행 대출보다 높았지만, 담보가 없고 신용등급이 낮아도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사람들의 무책임한 소비를 불렀다.
작년만 해도 카드 이용금액 중 60프로 이상이 현금서비스였지만, 이에 대한 대책은 없었다.
때문에 카드사의 평균 연체율은 26프로를 넘어섰다.
그것도 태선카드의 카드 연체율이 압도적으로 낮았기 때문에 가능한 수치였다.
태선카드를 제외한 다른 카드사의 연체율은 평균 30프로 정도로, 손익분기점을 넘어 기업도산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에 비해 태선카드의 연체율은 9퍼센트 정도로, 현금서비스의 폭리를 취하며 나날이 기업을 불려 나가는 중이었다.
줄줄이 도산되는 카드사들 사이에서 태선카드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협박과 폭행으로 이루어진 불법 채권추심 때문이다.
그러나 어제자로 표면화된 카드대란 문제에도, 태선카드의 이러한 점은 언급되지 않았다.
그때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가 눈에 들어왔다.
TV에서는 모자이크 처리도 되지 않은 노인과 아이의 얼굴이 송출되고 있었다.
“오늘 오전 5시 30분경. 부평구의 모 아파트 6층에서 75세 방함경 씨와 5세 방자인 군이 지면으로 추락해 사망했습니다. …방 씨는 지난해 하나뿐인 아들 부부를 잃고 방 군을 홀로 키웠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생활고를 이기지 못한 방 씨가 마주한 것은 신용카드의 현금서비스였습니다. 경찰은 채권 추심 과정에서 불법적인 행위는 없었는지…”
기업명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모자이크 처리된 로고가 송출되고 있었다.
피해자의 얼굴도 그대로 노출되는 마당에 불법 채권 추심 의심을 받는 카드사가 그대로 송출되는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삼색원의 가운데에 영어로 기업명과 우측에 카드라고 적혀져 있는 저 로고는.
“누가 봐도 태선카드잖아.”
영만은 결국 선을 넘었고, ‘태선’이라는 이름도 더 이상 영만의 사업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전생에서도 이맘때 카드 대란으로 인한 자살 건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그중에 도를 넘은 채권 추심은 없었다.
영만이 이 위기를 넘길 수 있을까?
아니, 내가 이 일을 그냥 넘기지 않을 것이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황실장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정명한 상무가 부회장님을 찾아왔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황실장이 굳은 얼굴로 뒤돌아보자, 명한이 어물거리며 들어왔다.
명한의 얼굴은 눈에 띄게 초췌해져 있었으며 며칠간 면도도 안 했는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라 있었다.
“부회장님…. 뉴스는 보셨습니까?”
“방금 봤습니다.”
“이제 태선카드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 정상무가 하는 질문은 죄책감 때문입니까, 제 잇속을 채우기 위함입니까?’
명한이 갈라지는 듯한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람이 죽었습니다. 오늘 뉴스에서 처음 다룬 거지, 그동안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그래서요?”
차갑게 말을 뱉자 명한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제 와서 위선이라도 떨려는 겁니까? 서영만 사장의 지시를 받고 움직여왔던 게 당신입니다. 문자로 주변 인물을 찾아가겠다 겁박하고, 직접 찾아가서 폭행하고 강제로 날인까지 찍었다고 말한 게 당신이라고요. 이제 와서 억울하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보기 안 좋습니다.”
명한은 고개를 떨군 채 몸을 떨었다.
내가 했던 말은 명한을 향해 뱉은 말이었지만, 나를 향한 것이기도 했다.
영만이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막을 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번 일로 영만이 완전히 쓰러지길 바랐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마쳤다.
“10억 더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했던 일에 책임지세요.”
“어떻게…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겠습니까?”
“당신이 치밀한 사람이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저한테 가져오진 않았지만 서영만 사장의 지시와 구 사장과의 관계, 불법적인 일에 연관되어 있는 자료들.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
명한은 한참 동안 땅을 바라보더니 이내 기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맞습니다. 다 갖고 있어요. 지시 사항에 대한 녹음본과 구 사장과의 거래내역, 대포폰으로 보낸 문자들까지 다 제가 갖고 있습니다.”
“자료들은 차실장한테 넘기고. 제가 필요할 때 당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증언하세요.”
“그걸로… 제가 한 일이 덮어질까요?”
“정상무님. 당신이 했던 말 되돌려드릴까요? 사람이 죽었어요. 혼자 애 키워보겠다고 신용카드 대출까지 받았다던 한 할아버지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이게 끝이 아니라면서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죽게 될 겁니다. 평생.”
명한의 눈을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아가세요. 당신이 했던 일을 잊으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나 또한 명한과 다를 것 없는 비겁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미 무수히 많은 사람들에게 돌아갔을 부를 빼앗았고,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었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보다, 나를 위한 복수가 더 우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