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2002년 12월, 대선에서 노무현이 한나라당의 강력한 대통령 당선 후보였던 이회창을 꺾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전생과 다른 게 있다면 기존을 상회하는 55프로의 득표율로 꺾었다는 것이다.
큰 줄기는 바뀌지 않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생긴 이유에 나도 포함이 되어있었다.
‘천회장 아들이 출마할지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천일그룹의 회장, 두완은 내가 제시하고, 진태가 밀어주었던 남북경협사업으로 인해 결국 국민들의 지지를 한 몸에 받았다.
기업가치로 보면 태선의 상대가 안 되지만, 사람들이 국민 기업을 말할 때 천일이냐, 태선이냐로 나뉘게 될 정도였으니까.
정책의 입안이나 집행과정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무엇이냐?
중앙부처의 주요 정책당국자들에게 물으면 백이면 백, ‘국민정서’라고 답할 것이다.
법과 제도가 옳다 하더라도 국민정서가 허용하지 않으면 실행되기 힘들다.
두완은 제 손의 그런 힘을 거머쥐었고, 이는 그의 아들 경식의 대통령 출마까지 이어지게 된다.
결국 경식이 당선되는 일은 없었지만, 노무현과의 단일화를 통해 한 자리를 약속받았을 것이다.
두완과의 관계를 끈끈이 한 나로서는 나쁠 것 없는 소식이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잠시 뒤, 영균이 들어왔다.
“정상무한테 온 이번 달 보고가 왔습니다.”
“특이사항은?”
“보험사에서 새로 개발하고 있는 상품이 있지만, 아직 상품화가 끝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구청표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스윗머니’가 지점을 늘린다고 합니다.”
“하하. 더미 회사가 지점을 늘린다고?”
명한은 10억 원의 계약금과 함께 완전히 내 쪽으로 넘어왔다.
전화를 통해 의사를 밝히고 다음 날, 명한은 멍투성이의 얼굴로 나타나 곧장 영만이 벌이고 있는 일들에 대해 낱낱이 까발렸다.
‘구 사장’이라 불리는 점조직의 수장과 영만의 관계까지도 말이다.
구 사장이 운영하고 있는 유령회사, 스윗머니는 엄연히 대부업법과 채권추심법, 상법 등 온갖 위법행위를 당당하게 저지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이 정황들을 갖고 고발을 한다면 그를 무너뜨릴 수 있겠지만, 문제는….
“그 날 이후로 회장님과 대면한 적은?”
“그 날 이후, 서영만 사장님이 회장님 저택을 방문한 적은 없습니다.”
진태가 영만의 이런 불법적인 활동에 대해서 묵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명한의 진술에 따르면 영만이 진태의 저택에 방문한 직후, 스윗머니의 본격적인 활동을 지시했다고 한다.
협박 문자와 연락은 물론 직접 사람을 보내 폭행까지 저지른다는 스윗머니의 악행에 대해서 언론사는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는 상황.
오히려 최근엔 직원이 행복한 직장에 태선카드가 꼽혔다는 기사가 나올 지경이었다.
진태가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영만을 방치하는 이유로 생각나는 것은 딱 하나다.
‘할아버지도 서영만을 퇴출시키려는 걸까.’
지금 당장은 태선카드의 대금 회수율이 높고, 큰 이득을 가져다주고 있어도 크게 본다면 태선그룹 전체의 수익에는 반하는 일이다.
진태가 이를 모를 리는 없을 터, 영만의 책을 잡기 위해 묵인하고 있는 게 아닐까, 라는 게 내 추측이었다.
확실한 것은 아직 없으니 나도 보고만 있을 수밖에.
“일단 차실장도 너무 섣부르게 움직이지 말고 지켜보기만 해. 관련 정황이나 증거는 계속 수집하고.”
“예. 알겠습니다.”
“나가봐. 황실장 들어오라고 하고.”
영균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곧이어 황실장이 한 손에 서류철을 들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이제는 배가 조금 불러 거동이 불편해 보였다.
“부회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황비서도. 몇 개월 차라고 했지?”
“이제 28주 되었습니다.”
“한 달만 더 일하고 1년은 쉬다가 와.”
“출산 한 달 전까지는 일할 생각입니다.”
“쉬다 와. 아무리 일이 중요하다지만 애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
“....”
“...필요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2000년대 이후 출산율 급락으로 인해 OECD 국가에서 육아휴직 등 출산장려 정책을 펼치고는 있으나, 아직까지 사회적인 인식은 따라오지 못하고 있었다.
태선그룹이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는 상황.
전 직원을 상대로 내 고집을 펼칠 수는 없었으나, 내 직속으로 있는 사람은 다르다.
특히 황실장과는 앞으로 계속 일해나갈 생각이었으니, 이런 부분은 확실하게 보장해주어야 한다.
“무리하지 말고. 황실장은 내가 그리는 미래에 꼭 필요한 사람이야.”
“....”
“GB에서는 보고서 올라왔어?”
“네. 간소화해서 작성한 보고서입니다.”
황비서가 나에게 서류철을 내밀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인 사스-코로나 바이러스(SARS-CoV)
이 바이러스에 감염되는 질병을 국립보건원에서는 ‘사스’로 지칭했다.
전 세계에 걸쳐 약 8000여 명이 감염되었으며, 치사율이 무려 10퍼센트나 되던 재앙에 가까운 전염병이었다.
사스는 2003년에 세계적으로 유행하며 그 이름이 알려졌지만, 최초 발병 시기는 2002년 11월에서 12월 사이로 추정된다.
지금이 12월 말일을 향해 가고 있었으니 이미 감염자가 나왔겠지만, 한국은 물론 중국 언론에서도 크게 다루고 있지 않았다.
감염자도 적을 뿐더러 아직 이 바이러스 자체에 대해 밝혀진 게 없기 때문이다.
내가 GB엔터테이먼트에 지시한 내용은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에 대한 정보였다.
내가 서류를 읽고 있자 황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브리핑 시작할까요?”
“아니. 나머지는 에릭한테 전화하면서 듣지. 나가 봐.”
“네. 그리고….”
“할 말 있어?”
황실장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뭐가?”
“저를 부회장님의 사람으로 써주셔서요.”
“황실장이 일을 잘해서 쓰는 거지, 선심 써서 쓰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은 안 가져도 돼.”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지금처럼만 해.”
황실장이 빙긋 웃고는 허리 숙여 인사하고 나갔다.
나도 옅게 미소를 짓고 휴대폰을 들었다.
정확히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에릭이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정말 오랜만에 연락하신 것 같은데요?”
“늘 그렇듯 많이 바쁘다. 너는 어때?”
“정신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몸이 두 개여도 모자랄 지경이에요.”
“그럴 만도 하지. 워싱턴이랑 뉴욕은 설립했다고 들었고, 유럽 쪽은 어때?”
GB의 연수익률은 회계처리를 끝내고도 무려 20프로가 넘었다.
이전의 수십 배의 이득을 보던 때와 수익률만 놓고 봤을 때는 비교할 수 없었지만, 움직이는 금액을 볼 때, 역사상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정도다.
그럼에도 만족하지 않고 GB인베스트먼트는 작은 투자회사에서 중견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에 있었다.
미국 안에서도 워싱턴, 뉴욕 지사를 만들었으며 유럽, 중국, 홍콩, 대만, 일본에도 지사를 만들 계획이다.
내 개인 투자를 위한 회사임에는 변함없지만, 금액이 커진 만큼 각 현지의 정보 조사와 시세 변동을 상세히 알기 위함이었다.
“일단 독일 프랑크푸르트에 지사를 세울 계획이에요. 유럽연합의 중앙은행 본점이 독일에 있기도 하고, 출자 비중이 제일 높으니까요.”
유럽중앙은행은 유로화의 발권은행이자 유로존에 있는 국가들의 경제정책을 책임지는 곳이다.
독일, 프랑스뿐만 아니라 스페인, 네덜란드, 벨기에 등 유로화를 쓰는 각국의 중앙은행들이 출자금을 내서 설립했다.
그중 가장 많은 출자 비중을 갖고 있는 곳이 독일연방은행, 그다음이 프랑스 은행이다.
유럽을 대표하는 증권가도 형성되어 있을 뿐더러, 2008년에 찾아올 금융위기에 세워질 EFSF(유럽재정안정기금)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날 곳이기 때문에 유럽에 지사를 세우기 최적화된 곳이다.
“잘 결정했다. GB의 정보망을 꾸리는 곳이니까 다른 국가들도 네가 판단해서 정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제약회사 관련 정보도 보고드렸는데 보셨나요?”
GB의 직원들과 에릭이 추리고 추린 제약사들이 총 8곳이었다.
황실장이 간소화를 했을 텐데도 꽤 많은 정보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지금 보고 있어.”
“상단에 있을수록 투자우선순위가 높게 배치했어요.”
“화이자가 1순위네. 이유는?”
“화이자가 5년 전에 고지혈증 치료제를 발매하고 의약품 매출이 크게 올랐었는데요. 이번에 연구개발 부문에 그 매출로 본 수익의 대부분인 50억 달러를 쏟아부었어요. 그리고 마침 대표님이 제약회사를 알아보라고 했고요.”
에릭의 말에 실웃음이 나왔다.
그러니까 지금, 에릭이 말하고 있는 바는 화이자 자체의 투자가치가 아니라, 제약회사를 조사하라는 내 말과 화이자가 연구개발에 돈을 쏟아부었다는 것이 맞물렸다는 게 근거라는 소리였다.
나를 온전히 신뢰하는 것도 좋지만, 에릭도 나름의 소신이 필요해 보였다.
“연구개발이 실패하면?”
“실패할 기업이면 대표님이 투자를 하지 않으니까 문제없죠. 1순위로 화이자를 뽑은 이유는 변수가 제일 크기 때문이에요. 연구개발이 실패한다면 하락하겠지만, 저희가 언제 그런 걱정을 했나요?”
“에릭. 나는 신이 아니야.”
“우연도 겹치면 필연이래요. 수백 번을 투자하면서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면, 신기에 쓰였든, 정말 뭐가 있든 간에 대표님은 투자에 관해선 신이에요.”
에릭의 말마따나, 이미 투자가 성공할 것을 알기 때문에 더 설득하는 것도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을 하며 일에 차질을 불러오는 것보다, 이런 전적인 신뢰가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두 번째는 스위스의 노바티스… 세 번째는 미국의 머크. 여기 다 시총은 비슷하지?”
“네. 둘 다 이천억 달러 규모의 기업들입니다. 노바티스는 항악성종양치료제인 글리백으로 2억 프랑, 한화로 2000억 원 이상의 매출을 달성했고, 머크는 수용체 길항제, 조콜을 개발하면서 의약품 매출액 1위를 달성한 곳이고요. 그 외에도 로슈, 스미클라인 등 요지는 비슷합니다.”
사스 발발 이후 의약품업체의 주가가 상상 이상으로 폭등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어떤 기업의 어느 정도 수준으로 상승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사스의 수혜주로 급등할 기업들은 주가변동성이 크고, 일시적 테마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이득을 보기 위해서는 사스가 아직 표면 위로 떠오르기 전인 지금이 기회다.
지금 주가에서 떨어진다 한들 낙폭은 크지 않고, 오른다면 단기간에 볼 수 있는 최대의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지금 GB의 투자 가능 금액이 어느 정도지?”
“보유하고 있는 현금은 80억 달러 정도 되고요. 올해 안에, 늦어도 내년 초에 정리 끝나는 것까지 합한다면 110억 달러 규모는 가능해요.”
“전부 다 써도 상관없어. 네가 추려 온 이 제약회사들 주식들, 싹 다 긁어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