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영만이 떨리기 시작한 아랫입술을 피가 밸 정도로 깨문 뒤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깡패라니. 채권 추심을 위한 전화 상담원 충원은 국가에서도 장려하고 있습니다.”
“허허. 참 곱게도 말하는구나. 그래서, 네가 쓰는 사람들이 빚 갚으라고 어르고 달래기라도 한다더냐?”
영만이 카드빚을 해결하기 위해 내민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표면상으로는 평범한 전화 상담원 충원이었다.
그러나 채권 추심, 즉 빚 독촉이 그렇게 순탄하게 진행될 리 없었다.
구 사장 산하의 조직원들이 채무자들에게 추심하는 과정에서 협박, 폭력을 비롯해 온갖 불법적인 일들이 벌어질 것이다.
진태도 지금은 언뜻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태선에 이득이 된다고 판단이 되면 태도를 뒤집을 것이라고 영만은 확신했다.
“태선이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피를 봤습니까. 회장님. 이건 카드가 살기 위해서 필요한 일입니다.”
“그래. 결과가 좋으면 과정이야 무슨 상관이겠냐? 그런데 이건 결국 태선의 발목을 붙잡는 일이다.”
“채권 추심을 진행할 회사는 법인도 내지 않았습니다. 태선과는 관계없는 일로 만들겠습니다.”
“태선카드 빚을 갚으라고 겁박하는데 태선과는 관계없는 일로 만든다? 네가 한 말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믿어 주십시오. 만약 일이 잘못된다 하더라도 저 하나로 끝낼 문제입니다.”
진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네가 같잖은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건 알고 있었다. 구 뭐시기는 한국에서 알아주는 깡패 새끼더구나.”
“...저는 기업의 이익만을 바라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네가 야망 있고 놈이라는 건 알고 있다.”
“제가 다 책임지고 진행하겠습니다. 지금 밀린 대금이 얼마인지 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밀린 대금만 16조 원이라는 것을 진태가 모를 리 없다.
거기에 계속 불어나고 있는 연체 수수료까지 합한다면 태선카드는 전자, 물산을 잇는 태선의 메인 사업체 중 하나가 되기 부족하지 않을 정도다.
진태가 영만을 빤히 쳐다보다가 툭, 말을 뱉었다.
“할 거면 확실하게 진행해. 그리고 일 잘못되면 목 떨어지는 건 태선이 아니라 너 하나가 될 게다.”
“감사합니다!”
허락이 떨어졌다.
영만이 진태를 바라보며 허리를 숙였다.
영만은 진태가 허락한 이유가 자신이 신뢰받아서가 아닌, 오로지 태선의 이득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진태의 저택을 빠져나온 영만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가장 큰 걱정거리였던 진태의 허락까지 구했으니, 이제 막힘없이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가는 일만 남았다.
차에 올라탄 영만이 명한을 향해 말했다.
“지시했어?”
“예. 구 사장한테 전달했고 지금 바로 진행 중일 겁니다.”
“그래. 돈 안 갚던 빚쟁이 새끼들 다 뒤졌어. 이제야 속이 좀 풀리네.”
영만이 품 안에 손을 넣고 더듬거리다가 말했다.
“담배 있냐?”
“예. 신호 걸리면 드리겠습니다.”
“내가 기다려야 되냐?”
“죄송합니다….”
“그놈의 죄송하다는 말은 대체 언제까지 할래? 한심한 새끼.”
영만때문에 명한은 자신이 피우지도 않는 담배를 늘 챙기고 다녔다.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기까지 명한은 운전석을 흔드는 발길질을 견뎌야 했다.
영만이 담배를 받아 입에 문 채 말했다.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 뭐라고 했지?”
“야인시대가 최고 잘 나갑니다.”
“방송국 연락해서 드라마 사이에 광고 넣어. 다른 방송사도 알아보고.”
“그… 소비 조장한다고 전에도 잘리지 않았습니까.”
“하… 새끼가 또 못한다네?”
영만이 거칠게 운전석을 발로 차자 명한이 운전대를 더 꽉 붙잡았다.
“잘리면! 새끼야! 심의 낮춰서 넣으면 될 거 아니야! YS도 말 바꿔서 광고 통과됐다는데 우리는 왜 안 돼? 어?”
한 마디마다 영만이 발로 차대는 통에 명한이 짧은 신음을 뱉고 나서 대답했다.
“마, 마케팅 부서에 전달하겠습니다.”
“나중에 입막음할 때 대비해서라도 광고 넣어야 되니까 일 처리 잘해.”
“예. 부회장님.”
현재 과도한 연체율과 카드 이용량에도 불구하고 영만이 광고를 더 넣으려는 이유는 언론사와의 유착 때문이었다.
불법적인 채권 추심이 일어나고 시끄러울 경우를 대비해 미리 입막음시키려는 것이다.
그 외에 오늘 저녁에도 각종 언론사 인사들과의 술자리가 잡혀 있었다.
백미러로 명한의 굳은 얼굴을 지그시 바라본 영만이 말했다.
“명한아.”
“예. 말씀하십시오.”
“내가 회장 눈치 보느라 너 상무까지만 올린 거 알고 있지?”
“저는 이 자리 만족합니다.”
“이빨까지 말고. 이번 일은 회장도 밀어주는 일이니까, 이번 일만 잘되면 눈치 안 보고 너도 올릴 수 있을 거다. 그래도 측근이라고 붙어있는데 전무는 달아야지.”
“말씀만이라도 감사드립니다.”
“내가 시발 말로만 한다 이거야?”
“그,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명한을 보며 영만이 피식 웃은 뒤 이어서 말했다.
“정상무 반응 보니까 장난도 쉽게 못 치겠어. 좀 웃고 살자. 명한아. 응?”
“예. 하하….”
영만은 볼록 튀어나온 자신의 배를 쓰다듬고는 차에 탑재된 재떨이에 담뱃불을 비볐다.
***
영만이 진태에게 허락을 받고 두 달이 지났다.
영만은 태선카드 본사 1층에 전 직원을 불러 모았다.
족히 수백 명은 될만한 직원들은 어딘지 모르게 기대감에 차 있는 눈빛들을 하고 있었다.
1층과 2층을 잇는 계단에 영만이 나타나자 직원들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영만은 인자한 미소를 띠며 팔을 들어 박수를 제지했다.
그리고 언제 설치했는지, 계단 한쪽에 있던 유선 마이크를 들고 말하기 시작했다.
“전화상담을 통한 지속적인 채무자 케어, 획기적인 상품개발을 통해 태선카드의 연체율이 10프로 안쪽으로 떨어졌습니다. 연체율 30프로를 앞두고 있는 다른 카드사들과는 반대되는 상황이지요. 이 모든 성과는 여러분들이 이루어낸 것입니다!”
다시 한번 박수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자 영만이 다시 제지하고 말했다.
“저는 노력하는 자는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S(Profit Sharing)를 각 팀별로 지급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성과급을 지급하겠다는 말에 직원들의 얼굴이 더욱 밝아지며 영만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했다.
태선보험을 비롯한 영만의 계열사들이 기업 만족도가 높은 이유는, 이렇듯 영만이 이미지 관리에 투자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직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 죽어났지만, 회사 대부분을 차지하는 임직원은 영만을 그저 존경하는 기업가로 인식하고 있었다.
영만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미소를 띠고 있다가, 한쪽 구석에 있는 한 남자를 보고 대번에 표정이 굳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속칭 ‘구 사장’이라 불리는 사내였다.
현재는 유령회사 ‘스윗머니’를 운영하며 태선카드의 빚 독촉을 도맡아 하고 있으며, 과거에는 영만의 뒤가 구린 일들을 담당했던 자.
영만은 서둘러 연설을 마친 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갔다.
집무실로 돌아온 영만은 뒤따라온 명한의 멱살을 붙잡고 말했다.
“구 사장이 여기엔 왜 찾아온 거야?”
“저, 저도 모르겠습니다.”
“관리 똑바로 안 해? 내가 신경을 써야겠어?”
구 사장이 영만, 자신과 관계되었다는 것이 알려져서 좋을 것이 없다.
진태는 알고 있겠지만, 재만을 비롯한 영만의 혈육들이 알게 된다면 어떻게든 영만과 엮여서 끌어내릴 것이다.
영만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어서, 명한은 구취까지 참아가며 겨우 대답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 확실하게 처리하겠습니다.”
“명한아. 명심해라. 구 사장 관련 일 터지면 책임질 사람은 너다.”
“...알겠습니다.”
영만이 시선을 내린 명한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거의 끊어지기 직전에야 상대방이 받았다.
지극히 기계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태선카드 실적이 크게 올랐다. 이번 분기로 올해 적자 다 메꾸고도 남을 거야.”
“예. 저도 기사 봐서 알고 있습니다. 획기적인 방침으로 고객과 상생하는 태선카드였나? 아무튼 축하드립니다.”
영만의 한쪽 입꼬리가 찢어질 듯 올라갔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건방지기 짝이 없던 조카 놈이 태도를 바꿨다.
영만은 다리를 꼬고 여유롭게 말을 이었다.
“너한테 축하도 받아 보고 나도 출세했네? 허허. 천하의 그 서강빈한테 말이야.”
“같은 태선인끼리 당연히 북돋아 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하하. 네 말이 맞다. 회장 자리에 욕심이 없다고 한 게 이제야 조금 믿겨지네.”
영만은 눈을 가늘게 뜨며 강빈의 대답을 기다렸다.
강빈이 태선을 차지하려는 야욕이 있다는 것은, 태선가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든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진태에게 태선호텔을 받은 뒤에, 공격적인 사업확장으로 서울 곳곳에 비즈니스호텔을 세운 것은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태선호텔 판교점은 준공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다.
“바쁘실 텐데 이렇게 연락주신 이유가 있으시겠죠?”
“뭐 별 건 아니고… 강빈아. 내가 전에 같이 손잡자고 했던 거 기억나냐?”
“예.”
“지금 생각은 어때? 좀 변화가 생겼나 해서.”
“저는 여전히 높은 자리엔 관심 없습니다. 다만.”
“다만?”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하하. 알았다.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전화를 끊고 영만이 씨익 웃으며 소파 턱에 팔을 걸쳤다.
“하여튼 애새끼라니까. 잘 풀린 거 보니까 금세 태도를 바꿀 거면서. 아, 소송은 어떻게 됐어?”
옆에 서 있던 명한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13건 중 대부분은 막았습니다만… 혼자 애 키우는 할아버지가 기자를 찾아간 모양입니다. LB신문사 오 사장이 아침에 연락이 왔습니다.”
“혼자 애를 키우든 개를 키우든 무슨 상관이야?”
“돈 없이 애 키우던 할아버지가 카드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안 좋은 선택을 했다. 좋은 소재거리지 않습니까.”
영만이 콧방귀를 뀌고는 말했다.
“그래서 기사를 내겠대?”
“오 사장한테는 기자 입막음하라고 확실하게 언질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자가 워낙 강경하다고 합니다.”
“구 사장한테 연락해서 조치해. 괜히 좋은 날 초상 치르지 않게.”
“예. 부회장님.”
명한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보아, 바로 구 사장한테 연락하려는 모양이었다.
***
영만과 전화를 끊고 생각에 잠겨있는데, 영균이 들어왔다.
“부회장님. 정상무한테 연락이 왔습니다.”
“방금 서영만이랑 전화했는데?”
“서영만 사장님한테 지시받고 곧장 연락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뭐래?”
“이쪽에 붙겠다고 합니다.”
나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볼펜을 달그락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