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명한은 태선전자의 최상층 화장실에서 만난 기묘한 인연을 잊지 못했다.
순식간에 멱살을 쥐고 집어던질 것 같은 인상이었지만, 말투는 정갈했으며 행동거지가 정중했다.
그런 사람이 모시는 사람이라면 필시 보통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휴일이 찾아왔고 명한은 영균과 만나기로 한 카페에 30분 먼저 도착해있었다.
명한의 앞에 놓인 종이에는 잡다한 낙서들이 가득 차 있었다.
영균이 무슨 일을 제안할지, 어떤 사람의 밑에서 일하는지조차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영만의 뒤처리를 해주는 사람을 써 조사를 해볼까, 생각해봤지만 금세 접었다.
그들은 영만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이지, 명한이 함부로 썼다가 영만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리고 정확히 약속했던 시간의 1분 전에 영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명한이 손을 들어 자신의 위치를 밝혔다.
“여기…!”
영균은 명한의 작은 목소리를 겨우 듣고는 명한의 앞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리고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명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이제 말씀해주시죠. 저에게 일자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지금 일 만족하십니까?”
“그, 그거랑 제 질문이랑 무슨 상관입니까. 질문에 먼저 대답부터 해주시죠.”
“상관이 있습니다. 지금 정상무님이 일하시는 것과 관련이 있는 아르바이트거든요.”
“아, 아르바이트….”
명한이 머리를 짚고 의자에 몸을 기댔다.
상무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수난을 견뎌왔는가.
오르고 나서 영만의 행패가 더 심해지긴 했지만, ‘상무’라는 자리는 결국 자신을 참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명한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잠시 잊고 두 손으로 책상을 짚으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다.
“이보세요. 제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위에 어떤 분이 계신지는 몰라도 저 태선보험 상무입니다.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니란 말입니다.”
“자리에 만족하시는 겁니까, 임금에 만족하시는 겁니까?”
“예?”
“제가 모시는 분은 마음만 먹으면 당신을 어디 보험사든 이사 자리에 앉힐 수 있고, 당신이 받고 있는 연봉 1억 천이백만 원의 열 배를 일시불로 드릴 수 있습니다. 원하시는 게 뭡니까?”
“...?”
갑작스런 영균의 제안에 명한은 일순 벙찐 표정을 지었다.
조건에 대한 설명도 없이 대뜸 대가 언급이라니.
“저보고 지금 사람이라도 죽이라는 겁니까…?”
“죽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 그럴 필요야 있겠습니까?”
“장난이 과하십니다. 못 들은 얘기로 하고 가겠습니다.”
명한이 영균을 차갑게 노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균은 그런 명한을 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서영만 부회장님의 수족과도 같은 분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
명한이 멈춰 서고, 영균이 이어서 말했다.
“당신 상사가 어떤 일을 계획하는지만 저에게 보고하면 됩니다. 대가는 지금 정상무님이 받고 있는 연봉의 10배. 일시불로 드리겠습니다.”
그제서야 명한은 영균의 위에 누가 있는지 알 것 같았다.
태선가 내부의 피 말리는 승계 싸움.
진태의 혈육들 중 한 명이 영균을 부리고 있을 것이다.
명한 입장에서는 고민할 가치도 없는 제안이었지만 걸리는 게 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 서부회장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저에게 뒷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고래 싸움에 등 터질 바에 차라리 현재에 만족하면서 살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알겠습니다. 생각이 바뀌시면 오늘처럼 연락 주시면 됩니다.”
명한은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영균이 전에 주었던 명함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서둘러 카페를 나왔다.
아까부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휴대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지만, 역시나였다.
‘여지없는 개새끼’.
명한은 거칠게 욕설을 내뱉고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예. 부회장님. 좋은 주말입니… 예. 당장 가겠습니다. 예… 죄송합니다. 예. 에잇!”
전화를 끊자마자 명한이 휴대폰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태선전자의 핸드폰은 워낙에 단단해서 모서리에 흠집이 날 뿐 망가지지도 않았다.
명한은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몸을 돌려 자신이 나온 카페를 쳐다봤다.
한쪽 구석에서 영균이 커피를 홀짝이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곧 연락 올 겁니다.”
“어떻게 확신하지?”
“카페를 나가자마자 전화를 받고는 결국 뒤돌아보더군요. 어차피 이득을 위해 서영만 사장님 곁에 있던 사람입니다. 더 큰 이득을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영균이 뒷짐을 진 채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볼펜을 달그락거리며 다음 계획을 종이 위에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작년부터 늘어난 신용불량자와 더불어 대두되고 있는 신용카드의 위험성.
이는 전생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외환위기 이후 민간 소비는 급격히 줄어들었고, 기업들의 투자는 실종되었다.
국가 경제 성적표라 부를 수 있는 GDP 지표도 개판인 상황.
이에 정부에서는 경기부양을 위해 1999년 5월, 신용카드 현금서비스의 한도를 폐지하게 된다.
한도가 사라지고, 카드빚 돌려막기가 성행하게 되면서, GDP는 급격한 상승세를 보였으나, 미여관옥.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상은 빚더미에 쌓인 사람들이 채워 넣은 실적이었다.
정신을 못 차린 카드사들은 ‘아버지는 말하셨지, 인생을 즐겨라’와 같은 광고를 송출하며 위험한 소비를 더욱 조장했다.
1999년 약 50조 원에 이르던 카드사의 현금 대출은 올해 벌써 300조 원을 넘어가고 있다.
실질 연체율이 무려 24프로, 신용불량자는 300만 명으로 급증했으며 현재 추세로 보아 이 상승세는 늘면 늘지, 줄어들지는 않을 것이다.
받아야 될 대금만 많을 뿐, 회수가 되질 않으니 카드사 입장에서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뒤늦게 대출 제한을 걸고 대금 회수에 나섰지만, 오히려 반발심만 키울 뿐 연체율과 신용불량자 수는 매달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전생에서 태선카드는 자회사와 태선전자로부터 5조 원의 자금을 수혈받았었지.’
이번에도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해 본다면 글쎄다.
전생이라면 영만의 계열사로 지원되었을 진태의 자본 중 상당 부분이 태선물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재만은 나와 준만을 견제하고 있는 상태에서 영만에게 거금을 지원하기는 상당히 꺼려질 것이다.
영만을 몰아내기 이보다 좋은 타이밍은 없다.
“스스로 무덤을 팔 거야. 관짝에 친히 넣어주는 건 우리겠지만. 정명한 상무 영입에 실패해도 계속 주시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부회장님. 전에 말씀드렸던 경호팀 충원 있지 않습니까.”
한 달 전쯤 영균이 경호팀을 더 차출해야 한다고 제안했던 것이 생각났다.
현재 경호팀은 소속이 태선물산으로 되어있어서 태선호텔 안에선 영균을 비롯한 몇 명의 팀원들만 대동한 상태였다.
“괜찮은 사람이 있었나?”
“예. 열 명 정도로 추렸습니다. 한 번 보시죠. 과거나 경력 부분은 완벽하게 조사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영균이 내민 서류를 보자 다들 한가락 하게 생긴 얼굴들이었다.
간간이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거나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경력을 보니 납득이 되었다.
대개가 알파그룹, GSG 등 해외 특수부대 출신이었다.
영균을 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우리 전쟁이라도 나가?”
“아무래도 제가 일을 진행하는 동안 부회장님의 안위를 챙기려면 이 정도는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딱딱하긴. 차실장은 몇 명까지 감당할 수 있겠어?”
“회장님 밑에서 오십 명까지는 제가 관리했었습니다. 숫자는 상관없습니다.”
진태가 갖고 있는 경호팀만 4개인데다가 영균은 한 팀의 수장이었으니, 진태가 얼마나 경호에 신경 쓰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차실장만 괜찮으면 여기 인원 전부 영입해. 그리고 태선물산에 있던 경호팀과는 분리해서 체계화시키지.”
“예. 알겠습니다.”
영균이 오고 나서 누군가의 위협을 걱정해본 일이 없는 것 같다.
필요한 인원과, 위험할 수 있는 싹을 미리 도려내는 것까지 영균은 치밀한 사람이었다.
진태가 영균을 나에게 주고 나서 아쉬워했던 모습이 생각나자 옅게 웃음이 나왔다.
***
“실적을 내야 한다. 실적을….”
영만은 몇 번이고 되뇌었던 그 말을 다시 한번 끄집어냈다.
진태의 부름을 받고 저택으로 찾아가는 길이었지만, 초조함에 다리를 달달 떨고 있었다.
자신의 성과를 인정받아서가 아니라 지난 임원 회의 이후의 사업계획을 들어 보기 위함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명한아. 구 사장한테 연락은 해봤냐.”
“예. 부회장님. 지금 더미 하나 차려놓았답니다. 지시 떨어지면 바로 시작 가능합니다.”
구 사장은 영만이 사기성 기업어음 발행이나 온라인 쇼핑몰에서 경품 이벤트 등을 미끼로 고객정보를 사들이는 등 각종 불법적인 일과 그 뒤처리를 맡길 때 쓰는 사람이었다.
명한이 언급한 더미는 유령회사로 정부 공문서에는 등기되지 않은 회사다.
영만이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바로 진행해.”
“...알겠습니다.”
영만이 백미러를 힐끔 바라보자, 명한이 긴장한 기색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쫄지 말고, 새끼야. 우리가 걸릴 게 뭐가 있냐? 너도 이걸로 실적 채웠다 치고, 얼마나 좋아.”
“회장님께는 말씀드리는 겁니까…?”
“선 넘을래? 네가 알아서 뭐 하려고?”
“죄, 죄송합니다.”
“너는 그냥 내가 까라면 까고, 기라면 기면 되는 거야. 알겠어?”
“예. 부회장님.”
영만이 혀를 차며 다시 시선을 차창 밖으로 돌렸다.
서재 앞에 선 영만은 크게 숨을 불어넣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안쪽 깊은 곳에 자리 잡은 진태가 멀리서부터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만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한쪽 손에 잡은 서류철을 더욱 꽉 잡았다.
“회장님. 잠은 편히 주무셨습니까?”
“본론부터 하지.”
차가운 진태의 말에 영만은 일순 입꼬리를 실룩거렸다.
“현재 연체율과 타계 방법에 관한 보고서입니다. 한 번 보시죠.”
영만이 사업계획서를 진태에게 내밀고 자리에 앉았다.
영만, 스스로는 확신도, 자신도 없었지만 진태에게 보여지는 모습은 당당해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영만은 내려가려는 고개를 붙들고 정갈한 자세로 진태를 바라봤다.
다행히 서류를 읽으며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진태의 얼굴은 밝아 보였다.
어느새 입가에 미소가 자리한 진태가 말했다.
“영만아.”
“예. 회장님.”
“우리가 사업가지, 깡패냐?”
영만은 재차 진태의 얼굴을 확인했다.
입꼬리는 분명 호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사나운 독사 같은 눈빛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