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싸한 정적이 이어졌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재만은 굳은 표정으로 그대로 자리에 앉았고 나는 주변의 시선들을 즐기며 여유롭게 진태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태는 입가에 웃음을 지우고 다음으로 말해 보라는 듯 영만을 향해 턱짓했다.
영만이 목을 한 번 가다듬고 말하기 시작했다.
“태선보험은 이번 분기도 역시나 업계 1위를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 분기 순이익은 생명, 손해 두 기업을 합쳐 2800억 원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미국의 이라크 공격 가능성이 계속해서 대두되고 있고, 국제 유가 불안 등 불확실한 요인이 상존하고 있는 게 그 이유들 중 하나입니다. 내년의 전망 또한 매우 밝게 보고 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영만아.”
“예…?”
공식선상에서 제 이름을 불리자, 영만이 눈을 꿈뻑였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너도 이제 부회장 아니냐.”
“맞습니다.”
“네가 맡은 게 보험. 끝이야?”
“아닙니다…..”
“태선카드 실적은 왜 그 모양이야? 정부 규제 풀리고 날개 달았다며.”
외환위기 이전에 신용카드 발급은 매년 20~30퍼센트의 증세를 보였다가, 신용카드 부실이 표면화된 올해는 10퍼센트 정도로 주저앉았다.
영만의 경영책임이라기보다 사회적인 문제였으나, 이 자리는 결과로 평가받는 자리.
영만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진태가 말을 이었다.
“왜 대답을 못 해?”
“지금까지 현금서비스 금액이 10조 원이 넘습니다. 그거 다 받아내면….”
“받을 수는 있고?”
신용카드 대란이 터지기 전인 작년만 해도 신용카드의 연체율은 2퍼센트 전후였다.
겨우 다달이 카드 대금을 물어왔던 사람들이 이미 쌓여있는 빚더미를 감당하지 못하고 파산하기 시작하여 올해 연체율이 벌써 10퍼센트를 넘겨 태선카드는 적자를 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
“그래. 다 받아낸다 치자. 그럼 서준만 부회장이 넘긴 증권사는 왜 그렇게 된 거야? 매년 1조 원은 가뿐히 넘겨서 물어온 회사가 네가 맡은 뒤로 순익이 반의반 토막 난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나와 준만이 완전히 손을 떼고 영만에게 넘어간 태선증권사.
애초에 성과 자체가 나의 고문을 통해서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이전과 같은 성과가 나오기란 불가능했다.
거기에 미국증시 영향으로 인해, 태선증권사뿐만 아니라 한국 증권 시장 전체가 힘든 상황이다.
영만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는 갔지만, 이 자리는 결과로 보여주는 자리.
영만은 입을 씰룩거리다가 곧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진태가 아까와는 완전히 상반되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부회장 자리 주면서 했던 말은 다들 기억할 게다. 자리에 맞는 성과를 내보이라고. 아무래도 너한테는 그 자리가 많이 벅찬 것 같구나.”
“회장님! 다음 분기에는 성과를 내오겠습니다!”
“보험은 시대를 잘 탔으니까 내버려 두고. 증권사랑 카드는… 윤 전무, 공 부사장!”
“네!”
진태가 주목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다.
영만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지만, 표정은 늘상 짓는 장난스러운 표정이라 괴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 부사장이 증권사 맡고, 윤 전무가 카드 가져가. 다음 분기까지 성과 안 내오면 다시 갈아엎을 테니까 현재에 집중하고.”
“알겠습니다!”
영만이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려는 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회장님. 저 자신 있습니다. 올해까지 반드시 성과 가져오겠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부회장 자리 준 지 1년하고도 반이 지났어. 너는 오히려 기업을 망치고 있고. 한 번 더 기회를 줬다가 폭삭 주저앉으면 그게 무슨 망신이냐?”
“...카드는, 카드는 자신 있습니다. 사업계획서 바로 올리고 실천하겠습니다.”
“에잉, 혓바닥이 길어. 말은 누가 못해?”
“카드 안 되면 캐피탈도 내놓겠습니다.”
영만의 말의 금융 쪽 임원들이 화들짝 놀라 영만을 바라보았다.
태선캐피탈이라면 태선보험을 제외하고 영만의 계열사들 중 가장 큰 기업이다.
태선카드보다 큰 것을 내려놓겠다는 말에 진태가 헛웃음을 지었다.
“허허. 그래. 그 정도 배포는 되어야 제 것을 지키겠다고 할 수 있지. 한 번 보여봐라.”
영만이 진태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럼 윤 전무는 일단 대기. 그리고… 서남순 부회장은 여전하더구나. 늘 순항하긴 하는데… 욕심은 없는 게야?”
진태의 말에도 남순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저는 이 자리에 만족합니다.”
“그래. 매출은 또 올랐더구나. 욕심이 과한 것보다는 훨씬 좋지.”
남순은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승계 싸움은 완전히 포기한 모양이었다.
성과 자체도 순탄할 뿐, 눈에 크게 띄는 것은 없었는지 브리핑은 짧게 끝났다.
다음으로 지목된 준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태선 건설이 지은 월드컵경기장이 전파를 탄 뒤 해외의 발주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금리 시대와 맞물려, 이제 한국 아파트 건설에 힘쓰려고 했던 당초 계획과 달리 해외 건설에 집중해야 할 판국입니다. 다만.”
“다만?”
“회장님께서 허락해주신다면 태선 건설의 규모를 늘리고 국내와 해외, 두 마리 토끼를 잡아보고 싶습니다.”
준만의 호기로운 말에 진태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네가 어떤 성과를 내왔는지는 다 알고 있다. 마카오로 물꼬 튼 뒤에 해외 물자 계약도 많이 해냈는데, 말도 안 꺼내는구나.”
나야 물산에서도 일하고 있으니 알고 있었지만, 준만의 성취는 날이 갈수록 밝게 빛나고 있었다.
마카오 타워 시공을 통해 해외 물자 기업들과 계약을 따내기도 하고, 여기선 언급되지 않은 태선중공업은 전기추진 LNG선과, 쇄빙유조선을 개발하는 등의 성과로 세계 조선업 시장에서 날뛰고 있었다.
준만은 이러한 성과들을 짧게 말하고 끝내자, 진태는 더할 나위 없이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부회장들 중 브리핑을 하지 않은 사람은….
“서강빈 부회장이 이제 얘기해봐.”
나도 준만처럼 성과에 대해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아직 태선호텔이 이룬 성과랄 게 별로 없었다.
그렇다고 진행되고 있는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걸릴 것도 없어 태연하게 말했다.
“태선호텔 판교점이 완공되기까지 1년도 채 안 남았습니다. 아시아는 물론 세계에서 가장 호화로운 호텔이 건설된다는 소식은 따로 홍보하지 않고도 전 세계 각지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태선건설과 협업해 서울 각지에 짓고 있는 비즈니스 호텔 중 세 곳이 개관했고, 올해 안으로 8곳 모두 완공 후 개관까지 진행될 예정입니다.”
진석이 첫 만남에서 포부를 밝혔던 대로, 우선 서울에 11곳의 비즈니스호텔이 올해 안으로 개관될 예정이었고, 그 이후에 광역시와 서울 인근에 계속해서 지어질 예정이었다.
진태는 그쯤이면 됐다는 듯 턱짓하고는 말했다.
“태선호텔은 기대하고 있는 바가 커. 스케일이 예전에 비하면 몇 배로 커졌으니까 추가지원금이 필요… 없겠지?”
진태는 도움을 주려 했다가, 이내 도움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피식 웃었다.
나도 딱히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어 보였다.
이제 나에게 추가지원금 명목의 수십, 수백억 원은 푼 돈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진태와 나의 묘한 기류를 눈치챈 따가운 시선들이 느껴졌지만, 나와 진태 모두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나도 다른 사람을 신경 쓰며 눈치 볼 위치의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회장님이 기대하신 것 이상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상입니다.”
나는 짧게 끝내고 자리에 앉았고, 진태도 더는 묻지 않았다.
이어서 태선택배나 태선기획처럼 어디 계열에도 속하지 않은 회사들의 브리핑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인물이 둘 있었다.
심기 불편한 얼굴로 콧김을 내뿜고 있는 영만과, 그 뒤에 서서 초조하게 발을 구르고 있는, 그의 비서, 명한.
조만간 그 둘 중 누가 됐든 큰 건 하나를 터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한이 눈을 굴리다가 이사회실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영균에게 문자를 넣었다.
***
명한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으면 숨이 막힐 것만 같아 회의실 밖을 빠져나왔다.
실무진들이야, 회의가 끝나기 전까지 화장실 가는 것 하나도 눈치를 봐야 하지만 비서진이나 경호팀들은 출입이 자유로운 편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또 어떤 지랄을 할지….’
최근 들어 영만이 명한을 폭행하는 일이 잦아졌다.
예전 같으면 서류 뭉치로 머리를 툭툭 치는 정도였다면, 최근엔 정강이를 발로 까기까지 했다.
말단 비서로 시작해 상무까지 오른 자리가 아까워서 버티고 있었지만, 이 일도 이제 못 해 먹겠다는 생각이 명한의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었다.
“후….”
명한은 화장실 안에 있던 세면대로 얼굴을 연거푸 씻고는 한숨을 내뱉었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는데 뒤에 서 있는 한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눈에 보였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정장이나, 행색을 보면 건달 같지는 않았지만, 얼굴 곳곳에 있는 칼자국이나 짙은 눈썹이 범상치 않은 인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명한은 천천히 눈을 깔고 그 사내의 곁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잠시만요.”
“...!”
명한은 침을 꿀꺽 삼킨 뒤에 천천히 고개를 돌려 비실비실 웃었다.
“하하… 무,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용무가 있습니다. 잠깐 시간 내주실 수 있습니까?”
“저, 저한테 말입니까?”
“정명한 상무님. 당신한테 있는 용무입니다.”
“아….”
명한은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벗어나 이사회실 앞을 지키고 있을 경호원들에게 가고 싶었다.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자신의 이름과 직급까지 알고 있는데,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할 말을 잃고 눈앞의 남자를 가만 쳐다보고 있는데 남자가 말했다.
“바쁘시면 그냥 가셔도 됩니다. 이 말에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괜히 눈치 보시는 것 같아 말씀드린 거예요.”
“에, 예! 그럼요. 오해는 무슨. 하하.”
명한이 머쓱하게 웃으며 영균의 곁을 지나쳤다.
그 순간, 명한의 호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내 머리맡에 모닝커피. 내가 혹시 꿈을 꾸나요-
현재 최고의 인기가수이자 배우, 장나라의 최신가요인 ‘Sweet Dream’의 가사였다.
“....”
명한은 그대로 멈춰 서서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했다.
‘여지없는 개새끼’.
명한은 자신의 앞에 앉은 사람을 신경 쓸 새도 없이 거친 말이 나왔다.
“하…. 시팔. 또 시작이네….”
회의가 끝난 뒤 영만이 갈굴 대상을 찾는 것이다.
명한은 전화를 그대로 내려놓고 고개를 돌려 남자를 찾았다.
남자는 망부석처럼 미동도 없이 가만 서 있을 뿐이었다.
“저기….”
“말씀하시죠.”
“혹시 어떤 일 때문에…?”
“일자리가 필요하실 것 같아서 찾아온 겁니다.”
태선보험의 상무 자리에 있는 자신에게 일자리를 제안한다?
명한은 이게 대체 어떤 상황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누구시길래 저를…?”
“차영균입니다. 편하게 차실장이라고 부르십시오.”
눈앞의 남자, 영균은 명한이 이미 수락이라도 한 것처럼 두터운 손을 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