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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62화 (162/249)

#162화

“서강빈 대표님? 부회장님?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GB로서 투자하는 것이니 대표라고 하시죠. 하하. 저는 이제 김민섭 대표님이라고 해야겠네요.”

민섭이 빙긋 웃으며 자연스레 손을 내밀었고, 나도 민섭의 악수를 받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민섭이 창업한 델타플러스에 대해서는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마지막 기억이 반년 전쯤 민섭이 창업했다는 메일을 보내왔던 것 같다.

전생대로라면 민섭의 ‘델타플러스’가 창업된 것은 투자금을 받은 이후이기 때문에 의문은 느꼈지만.

어쨌든 마지막 만남에서, 민섭이 나의 투자를 받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도 하고, 아직 델타플러스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선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에 큰 관심은 두지 않았다.

민섭이 말했다.

“서 대표님이 주고 가신 2950달러가 저한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를 겁니다.”

“금액까지 정확히 외우고 다닌 겁니까…?”

“저를 리프레쉬하게 만든 게 다름 아닌 그 돈인데 어떻게 잊겠습니까? 이거 보시죠.”

민섭이 품 안에서 코팅된 1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보였다.

“마지막에 남은 1달러는 늘 품에 안고 다니고 있습니다. 힘들 때마다 이 지폐 한 장을 보면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돈으로 민섭씨처럼 생각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전부한테 투자를 하고 싶네요.”

나에게 있어 2900달러는 어쩔 때는 한 끼 식사비용만 못한 돈이다.

그런 돈으로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화할 수 있다니.

하긴, 나도 힘들었던 시절 누군가 나에게 덥석 돈을 쥐여줬다면 이런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민섭에게 소파에 손짓하고 나도 앉으며 말했다.

“하고 있던 일정만 마무리하고 찾아오신다더니, 일이 꽤 늦어졌나 봅니다.”

“아뇨. 바이오팩토리에서 연수를 끝낸 건 벌써 반년 전입니다. 제가 늦은 이유는…. 여기 있습니다.”

민섭이 서류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평범한 형식의 사업계획서였다.

놀랄 것도 없이 델타플러스가 2년 뒤쯤 낼 복제약에 대한 초안이라고 생각하고 서류를 읽어나갔다.

그리고 드러나는 내용에 내 눈이 점점 크게 떠졌다.

“생물학적 제네릭 의약품을 중점으로 하신다고요…? 그 정도 수준까지 가능하신 겁니까?”

생물학적 제네릭 의약품은 다른 여타 복제약과는 조금 성질이 다르다.

생물학적 의약품은 인간, 동물, 미생물로부터 유래된 이 제품은 바이러스와 유전자, 혈액, 항체, 백신, 독소와 항독소 등 수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생물학적 의약품이 복제약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복잡한 제조 요건을 충족해야 될 뿐만 아니라, 정확한 구성을 정의해야 한다.

쉽지 않은 과정인데다가, 성공할 확률도 극히 낮아서 대부분의 복제약 제조 기업들은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민섭은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말했다.

“네. 사업계획서에 보시는 바와 같이 동물세포 배양기술과 인간 숙주세포 생산을 필두로 해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앞서나갈 생각입니다.”

“아직 저한테 투자도 안 받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동물세포 배양기술은 특허까지…. 어떻게 가능한 겁니까?”

내가 아는 민섭의 미래는 자신과 동료들의 자본금 130억과 투자금 470억 원을 갖추었을 때야 비로소 진가를 발휘했었다.

때문에 전생대로라면 지금 내고 있는 성과는 평범하거나 기대 이하여야 했다.

민섭이 다시 코팅된 지폐를 꺼내어 흔들며 말했다.

“제가 말했잖아요. 이 지폐 한 장을 보고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서 대표님은 그날 저에게 돈을 주신 게 아니라 믿음을 주셨습니다.”

“투자 확정을 짓지도 않은 그 날에요…?”

“네. 세계적으로 성공한 투자자가 날 눈여겨보고 있다. 이 상황이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인지 아십니까? 그 날 이후 동료들까지 미국에 불러 밤새워 공부했고,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복제약 관련 전문가와 연구진들을 섭외했습니다. 창업도 필요에 의해 한 거구요.”

성공한 투자자라는 게 당사자여서 그런지 민섭의 말이 전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확실한 건 민섭이 계획하고 있는 일이 성공을 한다면, 최소 5년 이상은 앞서가게 되는 것이고, 실패하게 되더라도 좋은 경험이 될 것이라는 거다.

그리고 지금 민섭의 자신감을 보아 지금 당장은 실패하게 되더라도 포기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민섭이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전에 말씀하신 투자, 해주실 수 있습니까?”

“투자하겠습니다.”

본래 투자 제안을 받을 때 한 번은 거절할 생각이었다.

나에게 유리한 조건이란, 상대방이 아쉬울 때 생기는 거니까.

그러나 민섭처럼 단순하고 솔직하게 들이대는 사람은 그런 협상적인 능력보다, 신뢰가 필요하다.

민섭은 벌떡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는 이어서 말했다.

“전에 말씀드렸던 수익모델은 전반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언제 수익이 날지 모르고, 추가 투자금을 요구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5년이라는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 수익모델을 구축하고 민섭 씨가 지금 계획하고 있는 일들 진행 가능하겠습니까?”

의약 관련 업체에 5년이란 길지 않은 시간이다.

그리고 민섭이 계획하고 있는 일과 수익모델이 전생과는 크게 틀어진 상황에서, 그 이상의 시간은 서로에게 좋을 것 없었다.

민섭이 잠시 나를 바라보고는 대답했다.

“무조건 되게 하겠습니다. 서 대표님이 저에게 주신 믿음. 어떻게 해서든 갚고 싶습니다.”

이처럼 눈이 반짝이던 사람이 있던가.

서강빈의 삶까지 합친다면 60년은 넘게 살아온 나에 비하면 한참은 어린 나이.

어쩌면 전생의 그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생의 델타플러스는 과연 연간 수백조 원 규모의 복제약 시장에서 얼마만큼의 파이를 차지할 수 있을까.

“전에 제가 얼마 투자한다고 말씀드렸죠.”

“500억 원…. 투자해주시겠다고 했습니다. 혹시 낮추셔도 저는…”

“아까 믿음을 갚고 싶다고 하셨죠. 열 배를 투자할 테니 열 배의 성과로 보여주실 수 있겠습니까?”

“여, 열 배라면….”

“오천억 원 투자하겠습니다. 수익 지분은 델타플러스가 절반, 제가 절반 가져가겠습니다.”

수익 지분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절반이 아니라 90프로를 가져가고 경영권까지 내 마음대로 흔든다 해도 이 정도의 금액은 내가 손해다.

그럼에도 이 계약을 진행하는 까닭은 나의 작은 기대다.

민섭이 고개를 숙이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렇게 1분쯤 흘렀을까.

고개를 든 민섭의 눈은 붉게 충혈되었지만 아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생기를 띠었다.

“결과로 증명하겠습니다.”

***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 어김없이 임원 회의가 열렸지만, 오늘만큼은 분위기가 달랐다.

그간 건강 악화로 인해 임원 회의는 물론, 혈육들의 방문까지 거절했던 진태가 참석하기로 예정되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진태를 보지 못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기 때문에, 진태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걱정되었다.

채규의 말에 따르면 빠르게 건강이 호전되어 지금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고는 하나,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내 옆에 앉아 있는 준만은 말없이 이사회실 정문을 바라보고 있었고, 진태의 혈육을 포함한 태선그룹의 임원들은 침묵을 지켰다.

여유 있는 발소리가 문 너머로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저번에 한 번 본 적이 있는 단풍나무 지팡이가 먼저 보이고 드러난 진태의 얼굴.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고는, 진태에게 달려갈 뻔한 충동을 겨우 참았다.

주름은 이제 더 이상 깊어질 수 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깊었으며, 검버섯이 늘진 않았으나 색이 더 진해졌다.

늘 독기를 품은 듯 날카로운 눈빛은 힘을 잃고 평범했다.

그래도 진태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지팡이는 장식이라는 듯 태연하게 걸어왔다.

다들 말없이 진태를 보고 있는 가운데….

“뭣들 해! 회장보고도 자리에 앉아 있는 놈들은 뭐야?”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진태의 우렁찬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전원이 벌떡 일어나 진태에게 허리를 숙였다.

나는 진태의 얼굴을 조금 더, 눈에 담고자 허리를 펴고 있었는데 진태와 눈이 마주쳤다.

진태가 실웃음을 짓고는 눈짓 한 번을 주고 자리로 걸어갔다.

순식간에 더 늙어버린 얼굴과 다르게 행동 하나하나는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진태를 보며 조금은 안심되었다.

진태는 느긋하게 걸어가 상석에 앉고는 마이크도 쓰지 않고 말했다.

“나 없는 동안 내 회사를 운영하느라 고생들 많았어.”

진태의 서두에 재만의 이마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진태의 말은 명백하게, 아직도 자신의 회사를 우리에게 빌려주는 것임을 암시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정순이 퇴출되는 과정에서 사용한 방법은, 진태가 마음먹기에 따라 재만조차 언제든지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을 내놓고 물러나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진태가 말을 이었다.

“내가 이 자리에 없었을 뿐이지, 뭘 하는지 보고는 다 듣고 있었네. 아주 제멋대로들이더구만. 서재만 부회장! 너 먼저 얘기해봐.”

재만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회장님이 자리에 나타나지 않았던 기간 태선전자는 매출이 26프로, 영업이익은 7퍼에서 15프로로 두 배가 넘게 상승했습니다. 저희 태선전자 창사 이래 최대의 상승 폭입니다.”

재만의 말은 간단했지만, 그 내용은 모두를 압도하기에 충분했다.

태선전자 크기의 기업에서 저 정도의 영업이익률 증가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까.

내가 준만을 바라보며 옅게 웃음을 짓자, 준만도 나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전자가 그만한 영업이익을 거둘 수 있었던 까닭은, 중국의 이동통신사업권도 한몫을 했다.

독점사업권을 통해 면세에 가까운 혜택을 받았고, 거의 독과점하다시피 진출한 사업이기 때문에 영업이익률은 하늘을 찌른다.

그리고 이 이득에 태선전자가 몸을 맡기는 순간이 바로 내가 재만의 목을 움켜쥐는 순간이다.

재만은 영업이익 상승에 주요했던 이동통신 사업권에 대한 얘기는 쏙 빼놓고, 태선반도체에 대한 성과와 태선전자 자체 비전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이상입니다.”

재만의 말이 끝나자 진태가 흥미로운 미소를 띠며 말했다.

“다들 박수.”

임원들 전체가 재만을 향해 열화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전에 나에게 박수를 쳤을 때보다 훨씬 더 거센 호응이었다.

범준은 특히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며 과장되게 박수를 치기도 했다.

재만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태연한 척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진 진태의 말에 재만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

“재밌구나. 누구를 향한 박수인지는 본인들은 알고 알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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