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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61화 (161/249)

#161화

“부회장님. 징계받겠습니다.”

“괜찮다니까 왜 그래?”

정순이 나간 직후 황실장이 집무실로 찾아와 부담스러울 정도로 사과했다.

“경호팀한테 단단히 말해두었어야 했는데 미처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황실장 말대로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어. 그리고 황실장이 징계를 받으면 내 일은? 누가 처리하나.”

“부회장님….”

황실장을 위로하기 위해 건넨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태선물산 사장의 경미하거나 반복적인 업무는 황실장이 대신하고 있었다.

대체자야, 찾으면 있겠지만 내가 신뢰하고 그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황실장밖에 없었다.

“차실장한테 지시할 게 있어. 받아 적어.”

“네!”

“송파구 외곽부터 성남 근교까지 이어진 땅에 개발 제한이 해제된다고 흘리고 다니는 사람이 누구인지, 근거가 무엇인지. 그리고 서정순 개인재산도 완전히 다 털어 오라고 전해. 우선 이 정도로 하고 보고하라고 해.”

“알겠습니다.”

정순을 상대로 사기 치려는 대범한 놈이 누구인지는 관심 없었지만, 태선가를 상대로 사기 치려는 놈은 확실하게 잡아넣을 생각이었다.

물론 정순의 재산을 싹 다 발가벗겨 먹은 뒤에.

***

정순은 강빈의 로펌이라는 ‘앤 무어’의 한국 지사를 다녀오는 길이었다.

한국인 한 명, 미국인 세 명으로 이루어진 팀과 정순의 개인 변호사가 조율해 순례의 상속 지분을 모두 강빈에게 양도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물론 내년 말까지 300억 원을 갚지 못한다는 가정하에.

미국 법인이라 한국 법에 관련해서는 무지할 줄 알았는데, 한국대학교 법학과를 나온 정순의 변호사가 쩔쩔맬 정도로 힘들어했다.

조금이라도 법의 허점을 노리려 했는데 그마저도 실패했다.

정순은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후….”

이제 돈은 생겼지만, 이번 땅 투자에 모든 것을 걸었다.

내년 말까지라는 타이트한 기간 제한까지 생긴 상황.

정순은 자기도 모르게 떨리고 있는 왼손을 붙잡았다.

평생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살아왔기에, 돈이 없는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인지, 최근엔 현실이 마치 꿈속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정순이 차창에 고개를 기대고 나지막이 말했다.

“좀만 천천히 가자.”

“네. 사장님.”

“그놈의 사장 소리 좀 그만하고. 언제 내려놓은 자리야? 그냥….”

별생각 없이 수행 기사에게 꺼낸 얘기가 턱하고 막혔다.

자신을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러고 보니 태선호텔에서 물러난 뒤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순은 생각하지 않았다.

애써 피해온 것일지도.

정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

“사모님이라고 불러.”

“알겠습니다.”

차는 느리게, 서울 도심을 달려 나갔다.

정순이 집에 도착한 시간은 조금 늦은 저녁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정순이 손에 들고 있는 여름용 자켓을 손에 받으며 말했다.

“오셨어요. 식사는 어떻게 하시겠어요?”

“가족들은?”

아주머니는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다들 식사 중이세요. 조금 늦게 오셔서 약속이 있다고 생각하셨나 봐요.”

“내 것도 같이 차려줘.”

“네. 앉아 계시면 바로 준비해드릴게요.”

아주머니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주방에 들어갔다.

정순은 신고 있던 구두를 얌전히 벗어 정리하고 식당으로 들어갔다.

원기가 젓가락에 들려있던 다금바리 회를 내려놓고 말했다.

“돈은…?”

“아내보고 처음 한다는 소리가 ‘돈은’? 미쳤나 봐.”

“미, 미안해. 사안이 사안이잖아.”

원기가 머쓱한지 머리를 긁적였고 정순이 그 모습을 흘겼다.

수경과 수애는 정순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수저를 내려놓았다.

“다들 내 눈치 보지 말고 밥 먹어.”

정순의 말에도, 다들 아주머니가 정순 몫의 밥을 갖고 올 때까지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

정순 앞에 맨초밥과 다금바리 회, 장국과 갖가지 반찬들이 놓였다.

정순이 맨초밥에 회를 올려놓고 한입 먹자 수애가 정적을 깼다.

“말 안 할 거예요? 지금 그 일이 엄마 혼자 걸린 게 아니잖아.”

“만들었어. 그러니까 다들 밥이나 먹어. 먹고 얘기해.”

정순의 말에 원기는 한숨 놓인다는 듯 실웃음을 짓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수경도 눈치를 슥 보고는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식사 시간은 길지 않았다.

정순을 제외한 가족들은 거의 다 먹은 상태였고, 정순은 입맛이 없는지 세 입 정도를 먹다가 수저를 내려놓았다.

얘기를 시작한 건 정순이었다.

“강빈이를 만나고 왔어.”

“강빈이가 엄마를 만나줬다고요?”

수경이가 어이없다는 듯 톤을 높여가며 말하자, 정순이 노려보며 말했다.

“어머니라고 하라니까. 너 나이가 몇인데 이런 것까지 내가 지적해야 돼?”

“다, 당황해서 그렇죠. 엄마랑 수애가 강빈이를 해치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진태와 강빈이를 해치려는 계획을 짠 걸 수경은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태선가에서 쫓겨나게 된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정순이 말할 수밖에 없었던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분노와 짜증이 치밀었지만, 이제는 재기를 위해서 온 가족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수경이었다.

정순이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처음엔 내쫓으려고 하더라. 그리고 나중에 가서 말을 바꾸더니 이자도 없이 300억 원을 빌려주겠다네?”

원기가 불쑥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그게 말이 돼?”

“대신 다른 사람들한테 손 벌리지 말래. 하하하. 내가, 내가 그런 소리를 들을 줄은 살면서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그래서 대가도 없이 300억이나 빌려줬다고?”

“대가야 있지. 담보로 우리가 살 땅이랑 새엄마한테 상속받을 지분이 잡혔거든. 상황 기간은 내년 말일까지.”

정순의 얘기를 들은 원기는 싸한 기분을 느꼈다.

원기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내년 말일까지 위례 땅값이 오르는 게 아니라 오히려 떨어져서 못 갚게 되면…?”

“뭘 어떻게 다 끝나는 거지. 내가 노친네 뒤지기 전에 찾아가서 빌붙기라도 할까?

“어머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수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정순의 말을 막았다.

수애는 혼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강빈이가 멍청한 건지, 꿍꿍이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애가 타고나긴 했네. 그만한 돈을 덥석 준다고? 꺄하하. 고민할 게 뭐가 있어요? 당장 가야지.”

“수애. 너는 가만히 있어.”

원기가 수애를 한 번 째려보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지금 매입하려는 가격도 기존 시세보다 30프로는 더 친 가격이야. 거기에 수수료까지 이과장한테 주면 거기서만 100억 원이 까인다고. 시간이 빠듯할지도 모르는데 무슨 생각으로 그 조건을 받아들인 거야?”

“여보. 1년 반이야. 제한해제가 빠르면 올해고 늦어도 내년이면 나온다며. 아니 더 늦춰지더라도 발표는 나겠지. 그럼 움직이는 돈만 수백억 원일 텐데 우리가 손해 볼 일이 있겠어?”

“정순이, 너!”

원기는 벌렸던 입을 다시 오므리고 천천히 말했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가보자. 일단 성남에 있는 별장 정리하고 나도 있는 돈 끌어오고 하면 50억 원은 될 거야. 거기에 당신이 호텔 나오면서 챙겨온 100억 있지? 그거까지 전부 박자고.”

수경이 안절부절못하다가 말했다.

“그거까지 전부 다 투자하면 망했을 땐 정말 어떡하려고 그래요? 왜 그렇게까지 해요.”

“수애야. 강빈이한테 받은 300억 원짜리 땅을 유지하려면 돈이 더 필요해. 일단 우리 돈 150억 원으로 내년 말일까지 불려서 강빈이한테 갚으면 그 땅이 고스란히 우리 게 되는 거야.”

“아버지. 지금 눈이 풀렸어. 다들 왜 그래…? 정신 좀 차려봐.”

수경 혼자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불안감에 빠졌지만, 누구도 수경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렇게 정순네 가족은 희망에 젖은 채로 총금액 450억 원어치의 위례 신도시 땅을 사게 된다.

***

장마철도 끝자락에 오자 비가 모든 힘을 다하려는 듯, 세차게 쏟아지고 있었다.

태풍 ‘루사’까지 겹쳐서 밖은 아주 난리법석이었다.

어제가 태풍의 영향이 가장 거셌는데, 강릉의 하루 강수량이 870mm를 돌파할 정도였으니,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지금은 태풍이 조금 잠잠해지기도 했고, 그나마 태선호텔이 있는 장충동은 그 영향이 덜해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몇 보였다.

빗소리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잠깐 사이 거센 빗줄기가 내 몸을 사정없이 두드렸다.

“부회장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뒤를 돌아보자 황실장이 기겁한 채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구두를 신은 상태에서도 빠르게 다가온 황비서는 거칠게 문을 닫으려 애썼지만, 바람 때문에 쉽게 문을 닫지 못했다.

“안 닫고 뭐 하는 거예요?”

황실장의 옷과 얼굴까지 비에 젖자 미안한 마음이 들어 창문을 닫았다.

황실장이 씩씩거리다가 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하…. 가끔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긴 해도 그러려니 넘어갔어요. 워낙 비범한 분이시니까! 그래도 이건 아니죠.”

“미안해. 황실장이 올 줄 몰랐어.”

“그게 아니라, 하…. 저희 남편 홀아비 만들기 싫으시면 이런 일은 자제해주세요. 이게 뭐예요?”

그러고 보니 황실장도 결혼한 지가 꽤 되었다.

황실장의 비에 젖은 얼굴이 화장이 번져 엉망이 되어있었다.

검은 정장은 비에 젖어 빗물을 뚝뚝 흘렸다.

“안 그럴게. 일단 바로 퇴근해. 감기 걸리겠다.”

“...알겠어요.”

평소라면 일찍 퇴근하라는 말에 일할 게 남아 있다며 한사코 거절했겠지만, 스스로 보기에도 일할 상태는 아닌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황실장이 나를 째릿 쳐다보고는 말했다.

“윤비서한테 옷 갖고 오라고 지시할게요.”

“아니야. 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지.”

황실장이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손님이 왔어요.”

“손님? 예정된 건 없었잖아.”

“갑자기 찾아온 분이세요. 바이오산업의 던킨 도넛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하던데요?”

“아! 김민섭씨. 조금만 기다리라고 해줘. 옷만 갈아입고 만난다고 하지.”

“네. 저는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여전히 나를 째려보고 있는 황실장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황실장 휘하의 내 개인 비서진 중 한 명인 윤비서가 깔끔하게 다림질된 옷을 들고 집무실에 들어왔다.

“부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윤시호라고 합니다.”

“아, 얼굴 보는 건 처음인가? 반가워. 처음부터 고생이 많았어.”

근처 양복점에 급하게 다녀왔는지 윤비서의 머리와 양쪽 어깨가 젖어 있었다.

“아닙니다. 또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불러주십시오.”

“그럼 밖에 있는 손님을 불러줄래?”

“알겠습니다.”

윤비서가 정갈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는 나갔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르고 호출하자 민섭이 들어왔다.

미국에서 보았던 것과 달리 얼굴에 여유로움이 묻어 있었고, 옷과 전체적인 행색도 태풍을 뚫고 온 사람답지 않게 깔끔했다.

민섭이 나를 보며 말했다.

“제가 조금 늦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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