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뭐지?’
눈앞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자를 보며 몇 분째 머릿속을 떠돌고 있는 말이다.
한쪽 눈썹을 추켜 올리며 황실장을 쳐다봤다.
“그게… 정말 막무가내로….”
“황실장 탓하는 게 아니고… 하. 차실장은 언제 온다고 했지?”
“아마 내일 오실 겁니다.”
“알겠어. 나가 봐.”
황실장이 허리를 꾸벅 숙이고 나갔다.
한 번도 휴가를 낸 적이 없던 영균이 부친상을 당해 일주일간 휴가를 내보냈다.
그런 일을 당한 사람을 탓할 수도 없고.
다른 경호원들이 늘 대기하고 있었지만, 영균을 제외하고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제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강빈아. 너 고모 앞에서 너무 대놓고 멸시 주는 거 아니니?”
대화하면서 멸시라는 말을 들을 줄이야.
고상하다고 해야 될지 모르겠지만 이 상황이 너무나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저희가 이럴 사이는 아니잖아요. 여긴 무슨 일입니까.”
“가족 사업. 네가 전에 하고 싶다고 했잖니.”
“설마 택배 때 일을 말하시는 거예요?”
“응.”
GB택배를 처음 시작할 때, 정순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태선호텔과 GB택배의 협업을 제안했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했었지.
내 입에서도 아니고 설마 정순의 입에서 그 얘기가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다.
“고모가 원래 이렇게 뻔뻔한 사람이던가요?”
“어머, 얘 좀 봐. 돈 앞에서 안 굽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니? 나도 너 찾아오는 거 달갑지만은 않아.”
“나를 죽이려고 한 사람을 앞에 둔 당사자만 하겠습니까?”
“이미 지나간 일, 들쑤시려고 온 거 아니니까 괜한 소리 하지 마.”
정도를 넘은 뻔뻔함에 혀를 내둘렀다.
진태는 그래도 혈육이라고 딱히 손 보지 않은 듯한데, 나까지 그럴 거라고 생각한 걸까.
“할 얘기 없습니다. 가보세요.”
“얘기는 들어 보지? 너한테도 손해 볼 것 없는 얘기야.”
어색하게 웃음을 짓고 있는 정순을 빤히 쳐다봤다.
얘기를 들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제 정순은 힘도, 권력도 잃었으니 여차하면 내 뜻대로 움직일 수 있을 테니까.
“말해 보시죠.”
정순이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토지주택공사 알지? 거기 직원한테 들은 정보가 있거든.”
“신도시라도 하나 낸답니까?”
“비슷해. 아니 맞다고 봐야지. 어때. 솔깃하지?”
정순은 내가 ‘신도시’라는 말을 듣고 넘어갈 줄 알았던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지역이 어디입니까.”
“그것까지 말해줄 수는 없지. 우선 한다고 확답 먼저 듣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정순을 멍하게 쳐다봤다.
동탄, 검단, 양주 등 제2기 신도시로 예정된 곳 중 알짜배기는 이미 다 골라서 사둔 상태였다.
정순이 이 사실을 알겠냐마는, 어차피 땅 투자로 벌어들이는 돈은 한정적이고 내 대부분의 수입원은 기업투자에 있었다.
바로 내쫓을까 고민도 되었지만, 우선 얘기를 들어 보기로 했다.
‘혹시 모르지. 노정환 같은 사기꾼한테 엮였을지.’
나는 표정을 풀고 고개를 내밀며 말했다.
“할지는 모르겠지만 정보료로 2억 원 드리겠습니다. 이제 말해 보세요.”
“2, 2억…?”
정순이 갖고 나간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미 영균의 조사로 알고 있었다.
갖고 있는 부동산까지 많아야 150억 원, 100억 원 이하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고 있지만 확실한 건 2억 원도 지금 정순에겐 필요한 돈이라는 것.
정순은 초조한 기색을 보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돈부터 먼저 보내. 그러고 말할게.”
“제 목 따려고 한 사람한테 뭘 믿고 먼저 줍니까? 그리고 저는 약속 함부로 안 합니다.”
“...알겠어. 송파구 외곽 쪽에 개발 제한이 풀린대. 부분적으로 되는 게 아니라 전부가.”
나는 손깍지를 끼고 정순이 이어서 할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끝입니까?”
“응? 뭐가 더 필요해.”
“그게 2억 원짜리 정보라고 생각하세요?”
“무, 무슨. 개발 제한이 풀렸다니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돈 벌기가 참 쉽다고 생각하시나 봐요. 고모는.”
정순이 말하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진작에 알고 있었다.
정순이 말하고 있는 곳은 강남 3구 중 하나인 송파구와 경기 성남시를 낀 위례 신도시.
문제는 시간이었다.
정순은 지금 막 해제된 것처럼 굴었지만, 그린벨트를 해제 검토에 들어가는 게 2005년이었다.
해제가 아니고 검토 시작이.
지지부진했던 신도시 개발은 늦춰지다가 결국 2008년에 들어서야 착공에 들어간다.
첫 입주는 2013년이었지만, 개발 기간으로 잡혀 있는 기간은 2017년까지.
땅값이 10배로 뛰든, 100배로 뛰든 그 돈으로 다른 사업에 투자하는 게 낫지, 나한테는 메리트가 없는 사업이다.
어쨌든 정순의 표정을 보니 지금 사기를 당하기 직전이라는 것은 알 것 같았다.
저 정도 반응이라면 개발 제한 해제 발표가 올해, 늦어도 내년이면 될 줄 알았겠지.
“저는 왜 찾아오신 겁니까?”
“그… 같이 사업해보자고 온 거지. 나는 정보를 물어오고, 너는 돈을 대주고.”
“뭐, 그렇다고 칩시다. 수익 배분은 어떻게 할 건데요.”
“지금 은행 금리가 얼마나 되지?”
“4.25프로입니다.”
“대출 상환까지 매년 그거의 2배 줄게. 너 어차피 돈도 많은데 둘 곳도 없을 거 아냐. 고모한테 잠깐 투자한다 생각하고…”
“60프로.”
“응?”
“작년에 GB가 벌어들인 돈입니다. 80억 달러를 움직여서 40억 달러를 넘게 벌어들였습니다. 아, 기부한 몇억 달러는 빼고 말씀드린 겁니다.”
GB인베스트먼트가 작년 한 해 벌어들인 돈만 한화로 따져 6조 원을 넘어섰다.
이는 태선전자의 전체 순익인 6조 1백억 원과 맞먹을 정도다.
심지어 태선전자의 순익은 태선반도체의 활약과 중국의 이동통신사업권 독점에 힘입어 이백 프로 가까이 늘어난 금액이다.
재작년과는 비할 바도 되지 못했다.
정순도 대충 계산이 되었는지 입을 뻐끔거리다가 겨우 말을 뱉었다.
“네 작은 투자회사 하나가 내는 수익이 태선전자와 비슷하다고…?”
“정확히 말하면 제 지분 100프로의 회사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푼돈 받아 가면서 고모랑 일할 필요 없다는 얘기예요.”
“푸, 푼돈이라니 내가 얼마를 부를 줄 알고?”
“끽해야 100억, 200억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이자를 연 8프로 쳐주겠다고요? 하하…. 진짜 저를 호구로 아시는 겁니까?”
여유롭게 말하기 시작해 순식간에 정색하는 나를 보며 정순이 고개를 숙였다.
“부탁을 하세요.”
“응…?”
“같잖은 제안 들고 와서 협업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차라리 부탁을 하시라고요. 그게 더 현실성 있으니까.”
“너…!”
정순은 순간 화를 참지 못하고 한소리를 하려 했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였다가, 몸을 떨다가 들어 올린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지만 어디서도 적대감은 느낄 수 없을 만큼 비굴했다.
“고모 한 번만 도와주면 안 되겠어?”
“무릎이라도 꿇으면 생각해 보겠습니다.”
정순은 이미 의욕을 상실했는지 그 자리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나와 진태를 죽이려고 한 뒤, 단 한 번도 나에게 용서를 빈 적이 없던 사람이다.
참으로 가증스러우면서도 한심했다.
그 모습을 보며 한 마디 더 쏘아붙이려다, 참고 다른 말을 건넸다.
“얼마가 필요한 겁니까.”
“...300억 원이면 될 거야. 그 이상은 안 바랄게.”
“욕심이 과하네요. 신도시에 그만한 돈을 쓰고도 사람들 이목이 안 몰릴 것 같습니까?”
“다 방법이 있어.”
보나 마나 차명으로 돌려서 하려는 심산이겠지.
제대로 된 사기꾼한테 걸린 모양인데 한심할 따름이었다.
차라리 문경주는 노경환을 이용하기라도 했지,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란 정순은 자기가 사기를 직접 당하고 있었다.
“뭐, 그건 알아서 하시고 상환은 언제 할 수 있습니까?”
“5, 5년만 주면 내가…”
“내년 말까지로 하시죠.”
“그건….”
“대신 내년 말까지 상환하신다면 이자는 받지 않겠습니다.”
“뭐?”
정순이 눈을 치켜올렸다.
내년 말일까지 정순이 말한 이자대로 받는다면 정순은 20억 원이 넘는 이자를 내야 한다.
그 금액을 모두 절감해준다는 말이었기에 정순은 사실인지 재차 물었다.
“예, 뭐. 대신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 제 도움은 물론 저희 집안사람한테 손 벌릴 생각하지 마세요.”
“그, 그럼! 당연하지. 고맙다. 강빈아.”
“성공은 확신하시는 거죠?”
“그러니까 내가 너까지 찾아온 거 아니겠냐. 자존심까지 다 버리고!”
정순을 보며 조소를 흘리고 말을 이었다.
“그만큼 확신하시니 저도 조건을 걸어야겠습니다. 담보로 고모가 이번에 산 땅과 할머니한테 받을 지분을 잡겠습니다.”
정순은 고민하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내년 말일까지 갚기만 하면 된다는 거 아니야?”
“네. 2003년 12월 31일까지. 상속과 관련된 문제는 오늘 여기서 계약서 작성하시고, 300억 원은 전부 땅 사는 데만 온전히 써야 합니다.”
“물론이지. 너 설마 나를 의심하는 거니?”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고모를 어떻게 믿어요? 제가 빌려드릴 300억 원도 현금으로 지급할 게 아니라 제 사람을 보내서 대신 땅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진행할 겁니다.”
“....”
지금은 힘이 없어 저자세를 보이고 있는 정순이지만, 돈이 생기면 언제 어떻게 돌아설지 모르는 인물이다.
땅을 매입하는 과정 하나하나에 참여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웬만한 사람은 정순의 앞에서 기가 죽으나, 단 한 사람, 이 일과 어울리는 사람이 있었다.
“차영균 실장 연락처입니다. 땅 매입하시기로 한 날 같이 가시면 됩니다.”
“강빈아. 내 자존심이 있지. 어떻게 다른 사람을 끌고 가….”
“자존심은 아까 무릎 꿇으면서 버린 거 아닙니까? 이제 와서 찾을 자존심은 대체 누구 겁니까?”
“나나 너처럼 재벌에서 나고 긴 사람들이랑 다른 놈들이랑 같아?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재벌로 살아온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나도 이제 어느 정도는 재벌의 생각이라는 것을 할 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정순의 말도 조금은 이해가 갔지만 내가 편의를 봐줘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기서 더 제 호의를 바라지 마세요. 저도 참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하. 알겠다.”
정순에게 명함을 내밀었다.
“제 로펌입니다. 제가 담보로 받을 상속 관련해서 처리하세요.”
“그래.”
정순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제힘으로는 내년까지 300억 원을 갚을 수 없다.
그리고 헐값이 되어버릴 위례 땅도 나에게 담보로 잡혀 있으니 팔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쥐어짜낸 돈마저 잃어버린다면 정순이 어떤 생각을 할지 심히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