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원기가 운전하는 차가 거칠게 공터에 멈춰 섰다.
이곳까지 오는데 비포장도로여서 타이어에는 흙이 진득하게 묻어 있었다.
눈앞에는 녹조가 껴 있는 강가가 있었고, 시야의 끝에 가야 아파트 단지들이 겨우 걸려 있었다.
정순의 표정이 자연스레 구겨졌다.
“여기가 풀린다고?”
“여기까지 와서 이럴래? 괜히 소개해 준 사람 민망하게 하지 말고 처신 잘해.”
원기는 정순을 향해 딱딱하게 대답한 뒤 몸을 돌렸다.
이곳을 찾은 사람들은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공터 곳곳에 대여섯 명의 무리들이 자리 잡고 신명 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원기가 그 사람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저 봐. 냄새 맡고 온 사람들.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이 한 몫 단단히 잡게 되는 거야. 그러니까 당신도 이상한 생각하지 말고 나만 잘 따라와.”
“...알았어.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까.’
정순은 한여름 햇빛이 구름에 가려지고,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썩 괜찮았다.
공터를 1분여 정도 가로지르자 현철의 얼굴이 보였다.
원기는 종종걸음으로 앞서 나가고, 정순은 여유를 보이는 걸음걸이로 걸어갔다.
원기가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걸었고, 현철이 고개를 옆으로 내밀며 정순에게 말했다.
“형수님! 저 현철입니다. 하하. 기억나시죠?”
정순이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요. 집에 자주 놀러 오시지 그러셨어요.”
“형수님이 워낙 바쁘셔야죠. 아! 소개를 안 해드렸네.”
현철이 두 손으로 옆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를 떠받는 듯한 제스쳐를 했다.
중년의 남자는 얼굴은 꽤 나이가 들어 보였지만 풍성하고 검은 머리 때문인지 전체적인 밸런스는 제 나이처럼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기는 이미 알고 있는 눈치인지 간단하게 묵례를 주고받았다.
“이 과장님. 앞에 계신 분은 태선호텔 서정순 사장님. 서정순 사장님. 이쪽은 이금선 과장입니다.”
과장이라는 말에 정순의 이마가 한 차례 꿈틀거렸다.
‘이사급도 아니고 과장? 나를 상대하는데?’
거기에 정순이 듣기로 현철은 정순이 이제 태선호텔에서 쫓겨났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일부러 저렇게 소개한다는 것에 이마에 주름이 잡혔다.
정순은 당장이라도 돌아갈까 고민하다가, 애써 태연한 기색을 내보이며 말했다.
“이 과장님? 반가워요.”
“네. 서정순 사장님. 최판사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하. 한 번 쭉 둘러보세요. 여기부터 저어기 보이시죠?”
금선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평야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어림잡아 수십만 평을 될 것 같은 크기.
“여기가 전부 제 관할구역이에요. 개발 제한 풀리면 여기 다리 하나 놓일 거고, 저쪽에는 도로가 주욱 뚫릴 거고. 하하. 큰 데서 일하셨던 분이니까 그림이 그려지시죠?”
“아하하…. 네.”
정순이 한쪽 입꼬리만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원기가 정순의 옆에 바짝 붙어서 작게 말했다.
“어때? 이과장 말처럼 다리랑 도로 내면 강남도 금방이야. 인프라도 괜찮고.”
정순도 옆에 있는 금선과 현철의 눈치를 보며 소곤소곤 얘기했다.
“여기 습지여서 건축도 힘들 거고, 도로도 뚫으려면 대공사 해야 되는데 정말 허가가 나겠어? 그리고 그렇게 좋은 땅이면 저 사람들은…”
원기가 정순을 옆으로 살짝 밀며 목소리를 크게 냈다.
“이 과장님. 저희 집 사람이 워낙 의심이 많아서요. 하하. 이곳이 왜 개발되고, 저희한테 소개시켜 주신 이유를 한 번 더 말해주실래요?”
금선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정순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뭐, 호텔 일을 한다고 해서 건축이나 재개발 쪽을 잘 아는 건 아니니까요. 하하. 서정순 사장님. 습지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네? 건축할 때 안 좋다는 건 알고 있는데요.”
정순은 은근히 무시 받는 느낌이 들어 불쾌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선의 말이 이어졌다.
“습지는 물이 흐르다가 고인 곳입니다.”
“그걸 누가 몰라요?”
“강가 근처에 자리 잡아 홍수를 방지하기도 하고, 지하수량 조달에 쓰이기도 하죠. 뭐 그뿐인가요? 제대로 조성만 하면 그곳이 관광단지가 되거든요. 지금도 대중들한테 인식이 나쁠 뿐, 윗분들은 어떻게든 써먹을지 고민하고 있는 실정이에요. 아! 이곳에 지어질 아파트인데 한 번 보시죠.”
금선이 정순을 향해 사진 한 장을 건넸다.
사진 안에는 아파트의 초안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파트 입구에 자리 잡은 연못과 근처에 조성된 울창한 숲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었다.
정순이 사진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원기의 감탄사가 들렸다.
“이야. 저도 이 사진은 처음 보는데 제가 살고 싶을 지경인데요?”
“하하. 사는 게 뭡니까. 여기 한몫 단단히 챙겨가시면 건물째로 가져가실 텐데요.”
정순은 사진을 보고도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금선을 흘기며 말했다.
“그렇게 좋은 땅이면 다 사가시지, 저희한테는 왜 넘겨요?”
“아이고. 내가 이래서 재벌집 사람들을 좋아한다니까요. 좋은 땅이면 다 사 간다는 그 마인드! 저는 부러울 따름입니다. 하하. 저야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넣은 지 오래입니다. 물론 주택공사 직원이 뒷공작을 펼쳤다고 기사가 나게 할 수는 없으니 차명을 썼겠죠? 하하.”
금선은 불법적인 일을 저질렀다고 밝히는 데 망설이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이라면, 여기서 거부감을 느꼈어야 할 테지만 정순은 그 반대로 생각했다.
스스로의 약점을 노출했다는 건, 그만큼 이 사업에 자신감이 있다는 말이라고.
정순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잘못 생각했나 보네요. 저야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사람이다 보니까, 가끔 이런 착각을 하곤 한답니다. 호호.”
“이해합니다. 외모도 출중하신데 돈까지 넘쳐나시니 뭐든 뜻대로 되지 않았겠습니까?”
“어머, 이과장님 사람 보시는 눈도 좋으시네. 그럼 이거… 확실한 거죠?”
금선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사장님. 이 세상에 확실한 투자라는 게 어디 있겠냐마는 이번만은 이금선,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약속드리겠습니다. 사장님은 큰돈 만지고, 저는 중간에서 수수료로 짤짤이 챙기고.”
“좋아요. 처음 보는 데 이렇게 마음에 든 사람은 없는데. 원기 씨. 어떻게 이런 사람을 찾았어?”
“어? 어. 나야 뭐…. 당신이 좋으면 좋은 거지. 하하.”
방금 전까지만 해도 꼬치꼬치 캐물으려던 태도는 사라지고 완전히 바뀐 정순의 모습에 오히려 원기가 당황스러웠다.
정순이 금선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땅. 다 사려면 얼마 필요해요?”
금선이 입에 대놓고 미소를 걸고 말했다.
“역시 대기업 사장님이셨던 시절이 어디 안 가네요. 저도 마음만 같아서는 다 드리고 싶지만, 아쉽게도 선계약한 고객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저기 보이시죠?”
금선이 손가락으로 대여섯 명의 무리들을 가리켰다.
“소수이긴 한데,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하이에나처럼 몰려든다니까요. 그리고 아직 계약은 안 했지만 VIP이 언제 변심할지 모르니 남겨둔 곳도 있고요.”
“VIP…?”
VIP라는 말에 정순이 눈살을 찌푸렸다.
금선이 화들짝 놀라며 말을 정정했다.
“아, 물론 서정순 사장님을 진작에 알고 있더라면 최고 VIP시겠지만, 저희 오늘 처음 만난 사이지 않습니까. 하하. 아무튼 뭐 송영기업 회장이라든지, 서울지검 오경복 검사라든지. 워낙 관계가 두터워서 따로 챙겨드려야 합니다.”
정순은 콧방귀를 끼고는 말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살 수 있는 건 어느 정도예요?”
“지금 서 계신 곳부터 저 오른쪽 끝까지입니다.”
금선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시선을 주욱 옮겼다.
녹지가 낀 강이 껴 있고, 전체적으로 경사가 져 있어 마음에 들진 않았으나, 그래도 전체의 절반 정도는 되는 평지였다.
정순이 원기를 보며 말했다.
“어때? 여기 다 계약해줘?”
“여, 여기를 다? 그럼 나야 좋지.”
정순네 가족의 재산은 대부분 정순이 물려받거나 사업하면서 벌어온 돈이기 때문에, 금전과 관련된 문제는 정순에게 결정권이 있었다.
그런 정순이 먼저 자신의 뜻을 밝히자 원기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원기까지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자 정순이 금선에게 말했다.
“다 살게요. 얼마예요?”
동네 슈퍼 가서 껌값을 물어보는 듯한 정순의 태도에 금선은 기가 찼지만 이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300억 원이 조금 넘습니다. 제가 힘써서 에누리 이것저것치고, 수수료로 5프로만 떼가면 딱 300억 원에 받아 가실 수 있게 준비하겠습니다.”
가격을 들은 정순의 표정이 일순 굳었다가 풀어졌다.
이딴 서울 외곽의 습지의 가격이 그 정도로 클 줄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태선호텔에서 나오며 챙겨왔던 100억 원의 조금 넘는 비자금이 재산의 전부이기 때문에 그만한 돈은 지불할 여건이 안 된다.
그러나 정순이 누구던가.
없어서 못 산 적은 있어도, 돈이 없어 못 산 적은 그녀 인생에서 결단코 단 한 번도 없었다.
원기도 정순의 사정을 알기 때문에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 사실 우리가 갖고…”
“좋아요. 300억 원이면 되는 거죠?”
“여보…?”
여유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는 정순에게 원기는 이질감을 느꼈다.
비자금 100억 원에, 성남 별장을 정리해도 300억 원의 절반도 못 미친다.
돈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고 대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감도 안 잡혔다.
금선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역시. 사장님이라면 그만한 돈도 별거 아니겠죠? 하하. 그만한 돈이면 근 1조 원은 들고 가실 텐데…. 저는 부러울 따름이네요.”
정순이 기분이 좋아졌는지 콧소리를 내며 말했다.
“이과장님은 얼마 넣으셨는데요?”
“제 재산 전부랑, 부모님 돈, 친구 돈, 대출 다 털어 넣어서 10억 원 조금 넘습니다.”
“아쉬운 금액이긴 하네요. 조금. 호호.”
금선이 정순을 위아래로 스윽 훑고는 말했다.
“그래도 제 몫도 있겠다, 수수료도 챙겼겠다. 저 같은 서민은 이 정도 돈만 챙겨도 더 안 바랍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그럼요. 개발 제한 풀리고 땅값도 주욱 오르면 제가 섭섭지 않게 챙겨드릴 테니까 이과장님도 신경 많이 써주세요.”
“네. 이제 제 최고 VIP는 서정순 사장님인 겁니다! 가문의 영광으로 모시겠습니다.”
“어머, 여보. 이 사람 말하는 것 좀 봐.”
원기는 자신의 계획대로 일이 잘 풀려가는 것 같아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지만, 한편으로는 정순이 돈을 어떻게 채워올까 의문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