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원기는 들끓는 마음을 겨우 진정시키고 있었다.
“그린벨트라….”
정순이 태선가에서 쫓겨나며 겨우 빼돌린 돈이 100억.
그 돈을 최소 수천억에서 조 단위로도 불릴 수 있는 게 땅 개발이었다.
원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정순과 딸들을 거실로 불러 앉게 했다.
소파 한쪽에 앉아 게슴츠레 웃고 있는 원기를 보며 정순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신,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
“있지. 좋은 일.”
원기가 가족들을 찬찬히 살피고 말을 이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도 있는 일.”
“뭔데 그래. 말을 해야 우리가 알아듣지.”
정순의 재촉에 원기가 현철에게 들었던 설명을 고스란히 전했다.
얘기를 다 들은 뒤 반색하는 딸들과 달리 정순은 일순 굳은 표정을 지었다.
원기는 정순의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들뜬 목소리였다.
“빨라도 내년에 확정된다고 했어. 지금이야 껌값이겠지만 좀만 있어 봐. 정부 승인 떨어지고 기사 나면 천정부지로 오를 테니까. 수애, 너 아직 신문사 몇 개 잡고 있지?”
“네. 저번 일로 대형은 완전 물 건너갔지만 중소 쪽은 아직도 연락하고 있는 데 많아요.”
“그래. 관계 유지 잘하고 있어. 그리고 당신은…”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결정하면 안 돼?”
정순의 말에 원기는 올라가 있던 입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정순의 몸을 자신에게 돌리고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여보. 연줄로 잡은 마지막 기회야. 태선가라고 들러붙던 사람들이 다 떠나갔다고. 이런 기회가 다시 또 올 거 같아?”
“당신은 모르겠지만 나는 수천억, 조 단위의 사업이 엎어지는 것도 눈앞에서 봤던 사람이야. 조금은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는 거야.”
“하!”
원기가 헛웃음을 짓다가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이 모양이야? 그 잘난 신중함 때문에?”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내가 혼자 잘 되려고 그랬어?”
“당신 마음대로 하다가 우리 집안 망하게 생겼어. 그러니까 이제 내 말대로 해.”
정순은 불안한 표정으로 원기를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
빠르게 봄이 지나가고 2002년 5월 31일, 드디어 한일월드컵이 개최되었다.
TV에서는 김대중의 개막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월드컵을 국운 융성의 원동력으로 승화시키겠습니다. 축구 경기를 통해 세계인은 인종과 문화, 이념과 종교를 초월해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인류의 공동번영을…”
따분한 표정으로 개막사를 지켜보는 준만에게 말했다.
“오늘은 경기 보러 안 가세요?”
개막식을 했던 오늘, 태선건설이 지은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월드컵 첫 예선 경기가 펼쳐진다.
“프랑스가 당연히 이기겠지. 뻔한 경기는 재미없다.”
“혹시 모르죠. 세네갈이 이길지.”
“허허. 길 가던 개가 웃겠다.”
세네갈 쇼크.
오늘 열릴 이 경기를 두고 불리게 될 말이었다.
프랑스는 자국에서 열렸던 지난 월드컵에서 우승했을 뿐만 아니라, 유로 2000, 2001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도 브라질과 일본을 꺾으며 현재 명실상부 랭킹 1위의 자리에 있다.
세네갈은 지역 예선도 겨우 통과한데다가 본선 진출한 나라 중 중국 다음으로 낮은 순위에 있었다.
결과는 0대1로 전반 선제골 이후에 골문을 틀어막은 세네갈의 승리다.
물론 프랑스 국가대표의 상징과도 같은 지단이 부상 때문에 이탈했으나, 전력의 격차는 전문가들의 비유를 빌려, 다 큰 성인과 어린아이의 수준이었다.
오랜만에 뜨거웠던 한일월드컵이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아버지. 후회 안 하실 테니까 보러 가시죠. 저 촉 하나는 기가 막힌다는 거 아시잖아요.”
“네가 사업을 잘하지, 축구를 잘해? 조기축구회도 나오라니까 안 나왔으면서.”
“아버지가 공을 몰면 자동문이 열린다는 그 모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저는 그런 취미 없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회사 직원들, 상사라고 봐주는 거 없어. 얼마 전에도…”
“설마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접대 축구를 받는 사람들이 그렇듯, 준만은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아무튼 아버지 자리는 늘 마련되어 있는 거 아시죠? 마음 바뀌면 가보세요.”
“그래. 저녁 먹기도 좋아 보이더구나.”
태선에서 건설한 서울월드컵경기장에는 VIP 라운지가 따로 마련되었다.
일반 좌석들과 달리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고 한적한 분위기와 고급 식당을 연상케 하는 내부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식사나 주류는 물론 간단한 기념품까지 준비되어 있다.
보통 초청을 받거나 값비싼 티켓 값을 지불해야 했지만, 월드컵 기간 내에는 태선기획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태선가 사람들은 기약 없이 찾아가도 자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 참. 마케팅 효과는 어떠냐? 대부분 네 말대로 진행했잖냐.”
“심 사장님 말을 간단하게 바꿔 말하면 태선이 주지도 않을 돈으로 생색낸다네요.”
“뭐? 하하. 심 사장이 그렇게 말했을 리는 없고, 뜻은 알겠네. 하긴 한국이 승리할 때마다 사은품을 준다는데 누가 믿겠냐?”
나는 이번 태선그룹의 마케팅의 모토를 한국팀의 승리로 잡았다.
태선통신에는 한국이 첫 승리에 넣은 1골당 1만 명에게 디지털캠코더나 MP3를 지급하겠다고 내세웠고, 태선전자는 월드컵 공식 모델 제품들을 한국 팀이 승리할 때마다 가격의 10프로를 인하하겠다고 약속했다.
4강까지 네 번은 승리할 테니 40프로나 가격 인하를 하는 것이다.
마케팅 효과는 좋겠지만, 그 정도의 인하가 과연 전자에게 도움이 될지는 의문이었다.
재만은 임원 회의에서 기껏해야 10퍼, 20퍼 정도의 가격 인하를 예상하고 이를 수락했다.
태선그룹 자체 이미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자리매김할 테니, 전자의 손실이야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그 외에도 보험, 식품, 백화점, 마트 등 태선의 온갖 계열사들에서 한국 팀 승리와 관련된 마케팅을 펼쳤다.
태선호텔은 건설 중인 판교점의 숙박권과 해외여행 패키지를 사은품으로 정했다.
여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준만도 한국 팀에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반대로 사람들은 승리할 때마다 태선의 이름도 같이 연호하겠죠. 경기를 치르기도 전부터 태선의 승리를 응원한 거니까요.”
“그래. 기적이라도 일어나서 예선을 뚫는다면 말이다.”
***
스페인 국가대표팀의 4번째 키커, 호아킨 산체스의 슛이 막히고, 이어서 한국의 5번째 키커인 홍명보가 때린 공이 골망을 흔들었다.
“골! 골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태극전사들이 4강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세계적인 스타 한 명 없이 4강 신화를 이뤘어요! 구성원 한 명 한 명이 팀의 목표를 위해 단단하게 결속한 덕분입니다!”
흥분한 해설진들의 목소리가 VIP 라운지 한쪽에서 울려 퍼졌지만, 함성 소리 때문에 작게 들렸다.
“골! 강빈아, 골이다!”
준만은 자기 자리도 잊었는지,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내 옷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하하. 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좋아? 그런 말로 설명되는 감정이 아니야. 4강이라고! 한국이 4강!”
얼굴이 벌게진 채 대한민국을 연호하는 준만을 굳이 말리지 않았다.
VIP 라운지에 있는 모두가 기립해서 흥분한 상태였으니까.
이변 없이 전생처럼 한국은 4강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변이 없다는 말은, 4강에서 이 진격을 멈추게 될 때라는 것과 같다.
이천수의 논스톱 슛이 들어갔더라면….
아직도 차두리의 패스를 받고 이천수가 때렸던 기습적인 슛이 선명하게 기억났다.
2002년 월드컵 슈퍼 세이브 1위로 선정될 정도로 좋은 슛이었고, 좋은 선방이었다.
들떠있는 준만을 보며 피식 웃은 뒤에 라운지 밖으로 나왔다.
한여름의 쨍한 햇빛을 받으며 상암동에 위치한 공원을 걸어갔다.
1시간이나 걸어서야 북적이는 인파를 피해 한적해진 거리가 나왔다.
지금은 한일월드컵의 열기로 휩싸였지만, 불과 며칠 뒤인 6월 29일에 제2연평해전이 일어날 것이다.
최초 보고로는 전사자 넷에 부사장만 19명, 그리고 실종자가 1명이었지만.
부상자 중 한 명이 후유증으로 사망하고 실종자도 결국 사망한 채 조타실에서 발견되면서 결과적으로 6명 전사에 18명의 부상자로 집계된다.
진태의 인맥을 동원해 국방부 수뇌 측에게 경고 정도는 할 수 있겠지만, 자세한 내막을 설명할 길이 없으니 별다른 효과는 없을 것이다.
미래를 알고 있지만 비극을 앞두고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기껏해야 피해자들을 위한 기부금을 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할 수단도, 의지도 없었다.
9.11테러가 일어나고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두고 나는 다시 한번 이상한 감정에 젖어 있었다.
“하….”
한숨을 내뱉고 거리를 걸어갔다.
***
“서정순 사장님 저 이제 찾지 마세요. 그 말 하려고 왔어요.”
현 태선호텔의 이사대우이자, 정순의 최측근이었던 영실.
선글라스를 낀 영실은 흑백 시야로 영실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저 찾지 말라…악!”
정순이 영실의 파마머리를 손에 움켜쥔 채 뒤로 잡아당겼다.
“뭐? 너를 찾지 마? 이 이사. 이건 아니지. 네가 나한테 받아먹은 게 어딘데!”
카페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둘을 향해 모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 점원이 옆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이거 놓고 말해요! 아아, 아!”
정순은 고통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는 영실을 그대로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리고 있는 영실을 보며 조소를 품고 말했다.
“내가 평생 이 자리에 있을 것 같니? 한 번 재벌은 영원한 거야. 이 이사, 아니 이제 이사대우라고 했지? 네가 잘못 선택했다는 걸 꼭 알려줄게. 그때까지 목 씻고 기다려.”
찰칵!
어디선가 휴대폰에서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렸다.
정순은 주변을 두리번거린 뒤에 머플러를 다시 여민 뒤에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곧장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그거 언제까지 진행해야 된다고 했지?”
“이제야 내 말 들어주는 거냐. 하하.”
정순은 요 며칠 신경질적으로 있던 터라, 스스로 약해져 있다고 느끼고 있었다.
원기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현철이 알지? 성현철.”
“알지. 재작년인가, 우리 집에도 한 번 왔었잖아. 당신 말이라면 자다가도 달려올 기세더만.”
“으, 응. 그렇지. 날짜는 픽스 안 됐는데 곧 나온대. 조금만 기다리면 될 것 같아.”
“확실히 물어봐. 아니다, 여보.”
“응?”
“내가 직접 찾아간다고 전해.”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제 아비를 죽이기도 망설이지 않았던 정순.
다시 한번 욕심에 가득 찬 눈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