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아버지는.”
“우선 병원에서는 퇴원하셨다네요. 당분간 저택에서 안정을 취하신대요.”
준만은 내색하지 않았으나, 내심 진태가 걱정되는 듯 작게 한숨을 불었다.
새해 시작도 전에 병원 신세를 지던 진태가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곧장 찾아가려고 했으나, 진태가 이를 거절했다.
평소에 그렇게 아끼던 남순의 방문도 거절했다고 하니, 지금 상태가 영 안 좋은 것 같다.
“그보다 물산에는 어쩐 일이냐? 요새는 출근도 잘 안 하더니.”
“호텔 일이 바빠요. 판교에 지을 호텔도 제가 설계도 참여한 거라 계속 시찰해야 되고요. 박사장님 와서 일은 좀 줄었지만요.”
태선건설의 사장, 현욱이 마카오 타워 시공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왔다.
한 사람의 복귀가 중요하다기보다, 마카오로 빠졌던 태선 건설의 인력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는 게 컸다.
우리건설의 인원만으로도 충분히 준공이 가능했지만, 문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껏 없었던 형태의 건물디자인과 설계 때문에 아직도 준공일이 예정되지 않았다.
현욱을 비롯해 태선건설의 설계사가 나간다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이다.
“오늘은 왜 왔어, 그럼. 바빠 죽겠다면서.”
“아버지. 그래도 사장인데 가끔씩은 얼굴 비춰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왕이면 조금 더 비추라는 말이다. 그래도 사장이니까.”
“알겠어요.”
“아, 참. 월드컵경기장은 가 봤어?”
“....”
내가 직접 월드컵경기장의 시공권을 따왔지만, 정작 준공식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
“그럴 줄 알았다. 아무튼 안전진단 평가에서도 거의 만점 받았고. 이거.”
준만이 사진 몇 장을 내게 건넸다.
“제가 생각했던 서울월드컵경기장이랑은 조금 다른데요?”
준만이 종이로 내 어깨를 치려고 하자 몸을 뒤로 뺐다.
“서울이 아니라 일본이다, 이놈아. 둘 다 네가 따온 거나 다름없는데 어째 관심이 없냐.”
“아.”
사이타마스타디움은 전생이나, 현생이나 가본 적이 없을 뿐더러,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시공사가 태선으로 바뀌었으니 조금 바뀐 줄 알았다.
“그래도 잘 지어졌네요. 지진이 났던 곳이라 걱정했는데.”
“쯧. 따온 뒤에는 아예 관심을 껐지? 지진 공법까지 외국 거 수입해서 지은 거야. 일본에서 추가 시공비를 지급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았고.”
준만은 흡족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나저나 요새 밝아지신 것 같습니다.”
“그래. 이 나이 먹고 이제야 일을 하는 기분이 들어. 몸이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아, 맞다. 아침에 어머니가 집에 일찍 들어오라는데요.”
“크흠.”
“농담입니다.”
“이 자식이!”
다시 한번 날아든 종이 뭉치를 가볍게 피했다.
강현재로서는 하지 않았을 농담이었다.
젊어진 몸으로 살아온 지도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노쇠한 정신도 이 육체에 익숙해진 것일까.
준만의 방을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영균이 다가왔다.
평소 같으면 그대로 서 있다가 내 뒤를 따라올 터였다.
“무슨 일 있어?”
“저번에 지시하셨던 서영만 부회장님 비서 조사 끝냈습니다. 원하실 때 보고드리겠습니다.”
“지금.”
“예. 이름 정명한. 나이 43세. 사는 곳은 서울 관악구 법정…”
“자세한 건 필요 없고 내가 알아야 될 것만 말해줘.”
영균은 머릿속에서 나름 필터링을 거치는 듯 뜸을 들였다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3년 전 비서에서 상무로 갑작스레 인사발령이 났습니다. 전무 이상급부터 회장님의 승인이 필요하니 상무까지만 올린 것 같습니다. 방금 의견은 제 추측이니 무시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하는 일은 상무와 동떨어져 있습니다. 그때도 보셨다시피 여전히 비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자동차 수리까지 직접 맡기러 갔습니다.”
“큰아버지가 부리는 사람이 몇 명인데 그걸 상무가 가?”
“어딘가 잡혀 사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건 경찰 관계자한테 들은 정보입니다만….”
목소리를 줄이다가 결국 멈춘 영균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영균에게 보고를 듣고 있던 곳은 준만의 집무실 밖에 있는 복도였다.
“방에서 듣지.”
방에서 이어진 영균의 보고를 간단하게 말하면 이랬다.
영만은 상습 폭행범에 한국 내 유명 조폭과의 연관성까지 있었다.
전생에서 내가 거기까지 알지 못했던 까닭은, 영만이 승계 싸움에서 패했더라도 태선의 위상 때문일 것이다.
참으로.
“역겨운 사람이네.”
그를 태선가에서 내쫓아야 할 101가지 이유에 한 가지가 더 추가되었다.
***
재만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하고 있었다.
아직 무엇 하나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태의 건강이 갑작스럽게 악화되었다.
작년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분명 진태에게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했다.
“서정순, 서동만….”
동생들만 아니었어도…..
지금 당장은 그 둘에 대한 분노가 강빈보다 컸다.
진태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다면, 회장은 재만이 맡을 확률이 컸지만, 지분은 지금처럼 양분된 상태다.
재만은 그런 반쪽짜리 회장이 될 마음은 없었다.
다행히 퇴원까지는 했다고 하나, 언제 다시 쓰러질지 모르는 상황.
분노를 삼키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비서가 문소리까지 조심하며 열고 들어오더니 다급하게 재만에게 다가가 말했다.
“서강빈 부회장님과 서영만 부회장님이 만났습니다.”
“뭐?”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둘의 조합에 재만이 처음 느낀 감정은 당혹이었다.
일전에 강빈이 진태와 함께 진태의 별장에 간 뒤로, 강빈에게 사람을 붙였다.
강빈의 곁을 늘 지키고 있는 그 영균이란 놈 때문에 자세한 뒷조사는 하지 못했지만, 경계할만한 사람과 접촉한다면 보고해두라 이른 상태였다.
그런데 서영만이라니?
비서가 이어서 말했다.
“서강빈 부회장은 모르겠지만 서영만 부회장님은 일이 잘 안 풀린 듯했습니다. 태선물산에서 나오자마자 차가 움푹 팰 정도로 발길질을 했다고 합니다.”
재만은 생각에 잠겼다.
영만이 그토록 화를 냈다면, 강빈이 작정하고 그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말이다.
그럴 이유가 있는가.
재만조차 승계 싸움에서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영만을 적으로 만들진 않았다.
거기에 영만이 실실 쪼개며 만만하게 보이긴 했지만 자존심은 누구보다 센 사람이었다.
그런 영만이 먼저 강빈이를 찾아갔다는 것도 이해되지 않는데, 갔다가 분풀이까지 했다고?
재만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진정시키고 비서에게 말했다.
“둘이 결탁했을 가능성도 있어. 앞으로 서영만도 철저하게 감시해.”
“예. 부회장님.”
***
정순의 남편이자 현 인천지방법원의 부장판사 최원기.
그는 태선그룹에서 쫓겨났다는 풍문이 퍼지고 나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었다.
예전에는 줄을 서서 자신에게 인사하러 왔던 대법원 쪽 사람들은, 이제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먼저 연락을 한들, 무시하거나 받지 않거나 둘 중 하나였다.
처음엔 현 최연소 지방법원 부장판사로서의 자존심이 상했지만, 시간이 흘러 법원 내에서의 입지를 모두 잃어가자 이제 자리에 대한 집착만이 남았다.
태선가라는 배경으로 유리한 위치에서 시작한 줄은 알고 있었지만, 제 능력 또한 뛰어나다고 믿었던 원기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수원시 영통구 법조로의 한 주점.
원기는 설마 자신이 여기까지 찾아오게 될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었다.
그가 만나기로 한 사람은 사법연수원 후배이자 현재 수원지방법원의 부장판사 성현철.
원기보다는 조금 늦은 나이였지만, 지금 기준으로 최연소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달 정도로 수완과 집안이 좋은 사람이었다.
혼자 양주를 따라 마시고 있던 원기 앞에 현철이 나타났다.
“형. 왜 먼저 술을 마시고 있어요.”
“오랜만이다. 현철아. 그동안 잘 지냈냐?”
“저야 뭐 재판하느라 늘 바쁘죠. 그런데 형한테도 요즘 재판이 들어옵니까?”
재판은 재정합의부에서 배정해주는 것이다.
어떤 재판이 들어올지도 정하기 때문에 재정합의부가 갖고 있는 권력도 만만치 않았다.
최근 원기에게 들어오는 재판들은 누구나 피하려고 하는 까다로운 사건들, 워낙 재판이 들어오지 않아 그런 재판이라도 감지덕지하며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다.
실적이 없으면 서울 진출은 물론, 현재 자리도 겨우 유지할 판국이니까.
원기는 현철의 말에 이가 갈렸지만 티는 내지 않았다.
과거, 원기를 따르며 그의 말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들어갈 것처럼 굴었던 사람이 현철이다.
그런데 태선가라는 뒷배경을 잃고 나자 곧장 이런 태도 변화라니.
“일단 앉아서 얘기하자.”
“하… 저 시간 없으니까 하실 말만 빠르게 듣고 갈게요.”
현철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고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밑에서 쥔 원기의 주먹이 하얗게 질렸다.
현칠이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요새 골프 모임에는 왜 안 나오는 거예요?”
“....”
골프 모임은 사교클럽의 일환으로 법원 쪽 인사들뿐만 아니라,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곳 중 하나였다.
진태도 그 사교클럽에 이름은 올려두었지만, 참석은 몇 년째 하고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원기가 사교클럽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유도 진태의 소개 때문.
태선가에서 쫓겨난 상황이 되자, 진태는 자연스럽게 그의 이름을 제명시키라 지시했고, 원기가 배척당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이었다.
현철은 원기를 통해 그 사교클럽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집안과 능력을 인정받아 아직까지도 참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때, 현철의 전화가 울렸다.
현철은 번호를 확인하더니 바로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형, 잠시만요. 급한 일.”
짧은 말은 둘째치고, 급한 일이라는 말에 원기는 자연스럽게 현철의 말에 집중하게 되었다.
한 손으로 입을 가렸고, 작게 목소리를 내고 있었지만, 현철의 목소리는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중에 기억에 남는 키워드는 땅, 개발, 보상, 그린…?
“예, 예. 그럼요. 제가 늘 감사하죠. 다시 연락드릴게요.”
현철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전화를 끊었다.
원기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 있어요. VIP들만 아는.”
“VIP…? 사교클럽에서 나온 얘기야?”
“예? 뭐…. 비슷한 거죠. 형도 가입되어 있으니까 알 거 아니에요.”
“하…. 나 퇴출됐다.”
“아. 그래서 모르시는구나.”
원기는 화를 낼 생각은 뒤로 한 채 고개를 바짝 붙여 말했다.
“대체 뭔데 그렇게 조심스러워? 좋은 정보라도 있는 거야? 아까 땅 이라고 하던데…. 어디 개발이라도 된대?”
“제 마음대로 얘기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형. 형도 예전에 이런 정보 많이 들어왔을 거 아니에요.”
“현철아. 그 사교클럽 누구 덕에 들어갔는지 잊었어?”
“여기 남은 건 제 능력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때, 사례했잖아요. 이제 와서 또 대가 바라는 거예요?”
“그럼 형 얼굴이라도 봐서 한 번만 얘기해주면 안 되겠냐.”
“하….”
현철은 곤란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렇게 정적이 흐른 뒤 현철이 고개를 들었다.
“형. 이거 진짜 형만 알고 있어야 돼요.”
“응. 나 입 무거운 거 너도 알 것 아니냐. 그리고 지금 떠들어 댈 사람도 없어.”
“귀 대세요.”
옛날 같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모욕임에도 원기는 곧장 귀를 현철의 입가에 갖다 대었다.
“서울 외곽에 그린벨트가 풀린대요.”
현철의 말을 들으며 원기의 눈이 생기를 띠기 시작하며 반짝였다.
“날짜는? 날짜는 픽스됐어?”
“픽스는요. 뭐 이거저거 절차 통과만 하면 되니까 빠르면 올해, 아니면 내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누구한테 들은 거야?”
“하, 됐어요. 괜히 말했네. 의심할 거면 저 그냥 가요.”
현철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원기가 벌떡 일어나 현철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현철아. 나 최원기야. 형 알잖아. 그냥 누가 말한 건지만 말해주면 안 되겠냐?”
“한국토지공사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들은 거예요. 그 이상은 형도 같이 가면 말씀드릴게.”
한국토지공사.
국토교통부 산하의 준시장형 공기업.
사교클럽에 속한 현철이 한 말인데다가 그쪽에서 나온 말이라면 틀림없는 사실일 터였다.
재개발이라면 지갑 안에 들어있던 10만 원이 1억 원이 되어서 나온다던 그 사업 아닌가.
“형. 이거 왜 이래요!”
원기가 어찌나 세게 붙잡고 있었는지 현철이 기겁을 하며 원기의 팔을 떼어냈다.
“현철아. 나 그거 할게. 어떻게 하면 되냐.”
“하…. 누구 또 끼워서 오지 말고 형만 오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원기 형이 이런 모습을 보이네.”
“약속하마. 방법만 말해줘.”
현철이 입꼬리를 늘리며 말했다.
“간단해요. 돈 들고 찾아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