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신화는 잘 쓰이고 있습니까.”
나는 제법 유창하다고 생각하며 뱉은 중국말인데, 마윈이 큭큭대며 웃었다.
준희를 보며 물었다.
“발음이 조금 이상했냐?”
“아, 아뇨. 자연스러웠습니다.”
“...?”
의아함을 묻어두고 마윈을 바라보자, 마윈이 겨우 웃음을 참으며 대답했다.
“네. 서 대표님의 투자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획 중인 사업은 어떤 것입니까?”
마윈이 지금 구상하고 있을 사업은 아마 타오바오.
일종의 B2B 사이트로, 미국에 아마존닷컴이 있다면 중국에는 타오바오가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파급력을 가지게 될 사업이다.
예상대로 마윈은 타오바오를 구상하고 있었고, 어떤 사업인지에 대해 설명했다.
나는 설명을 다 들은 뒤에 말했다.
“수익모델은 어떻게 잡았습니까?”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일정 부분 수수료를 거둘 생각입니다. 그리고 결제 대행업체와 대금결제 시스템을 만들고 부가서비스에 대한 수수료도 받을 생각이고요.”
전생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었다.
만약 알리바바가 중국 B2B 시장을 독과점한다면 상관없겠지만, 문제는 B2C 사이트로 유명한 이베이가 B2B 시장 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베이의 진출까지 2년도 남지 않은 상황, 알리바바는 초기에 과한 수수료 정책으로 난항을 겪은 바가 있다.
물론 중국인들이 자국 기업을 더 선호하고, 대금이 중국 안에서 결제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베이보다 낮은 수수료로 인해 알리바바가 앞서 나가기 시작하지만 문제는 그 기간에 있다.
나는 이 기간을 줄일 생각이었다.
“좋은 사업 아이템인 건 분명합니다. 다만, 사업 초기에는 이용자 유치가 수익보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마윈이 말을 꺼내기 망설이며 내 눈치를 보았다.
나는 이후의 대화를 위한 통역을 준희에게 부탁하며 한국말로 말했다.
“투자금에 대한 부담감 때문입니까? 지금도 수익이 나지 않아서?”
“....”
지금의 알리바바는 들어오는 수익을 모두 재투자로 돌리고 있는 실정이었다.
투자자인 내가 그렇게 하라 지시하기도 했고, 경영 자체에 관심을 안 두고 있으니 가능한 상황.
그러나 그 기간이 벌써 2년 가까이 되어가자 마윈은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전생에서도 이와 같은 문제였나.’
그럼 생각보다 간단하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간단한 회화 정도는 할 수 있었기에, 마윈을 보며 중국어로 말했다.
“지금 당장 수익을 내지 않으셔도 됩니다. 적자가 나더라도 투자자인 제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정말 그래도 되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인 뒤 준희에게 다시 통역을 부탁했다.
“예. 그리고 적자가 계속된다면 당당하게 말하세요. 추가 투자가 필요하다고. 마윈 회장님이 원하는 조건에 맞춰드리겠습니다.”
준희에게 내 말을 전해 들은 마윈이 눈을 크게 뜨며 반짝였다.
“대표님의 투자에 만족할만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더욱이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약 1년 뒤, 알리바바의 등록 회원은 전 세계 200여 개국의 180만 명 이상이 될 것이다.
거래액은 어림잡아 73억 달러 규모.
한화로 약 10조 원에 달하는 규모에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가속도를 붙일 것이다.
게다가 그 시점이 줄어든다면, 어디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 나조차 예측되지 않았다.
***
2001년도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은 두 가지였다.
9.11 테러와 엔론 파산.
엔론은 미국의 유명 경제지인 ‘포춘지’에서 수년간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극찬받을 정도로 촉망받는 기업이었다.
심지어 2000년도에는 일하기 좋은 100대 회사에 꼽히기도 했으니까.
휴스턴에 보기만 해도 입이 벌어지는 호화로운 60층 본사 건물은 물론, 총 직원의 수가 약 2만 명에 달했다.
촌철살인으로 유명한 금융 애널리스트, 대니얼 스코토가 보고서에서 엔론에 대한 평가를 박하게 주었지만 그 당시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만큼이나 엔론의 빚과 손실이 치밀하게 장막 뒤에서 숨어 있었던 것이다.
자산과 이익 수치는 대부분 부풀려져 있던 것이며, 애초에 없던 사업을 허위로 만들어내기까지 했다.
‘껍데기 회사’.
대니얼 스코토가 엔론을 보며 지칭했던 말이다.
엔론의 수익이 모두 가장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은 엔론사 내부에도 고위 임원급 말고는 없었다.
회계법인의 감사조차 로비를 통해 해결해왔지만, 욕심이 과했다.
국가 차원의 조사에서 5억 달러의 부실을 감췄던 ‘랩터’라는 유령회사의 정체가 드러났고, 이는 엔론을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데 충분했다.
그 뒤에 밝혀지길, 엔론과 다른 공모자들이 부당하게 벌어들인 돈만 100억 달러 이상.
노후 자금으로 엔론 사의 주식을 갖고 있던 직원들도 이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다.
커다란 사건들이 지나가고 찾아온 2002년.
진태의 건강 악화로 새해 조찬은 생략되었다.
전생대로라면, 원래 진태가 죽었을 해이기에 불안감이 증폭되었지만, 간단한 면회도 거부되었다.
간간이 채규로부터 걱정할 것 없다는 연락을 받았으나 불안한 마음은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이 시기가 무사히 지나가길 온갖 신들한테 비는 수밖에.
새해를 맞아 나를 찾아온 첫 손님은 정말 예상치도 못한 사람이었다.
“큰아버지가 여긴 무슨 일입니까.”
영만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우고는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어이, 조카! 큰아빠가 보고 싶어서 왔지.”
“갑자기요?”
“....”
솔직히 영만과 마주하고 있기 거북했다.
태선물산은 준만이, 태선백화점은 내가 차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영만은 견제대상도 아니었기에 눈치 볼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겉과 속이 다른 그의 이면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으니, 또 어떤 꿍꿍이를 갖고 나를 찾은 것일 터.
“저 바쁩니다.”
“새해가 시작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리 바빠? 잠깐 얘기 좀 하자는 거야. 하하.”
“하….”
한숨을 깊게 내쉬고 접대용 소파로 움직였다.
영만은 이미 소파에 앉아 배를 출렁이고 있었다.
비서 중 한 명이 집무실에 들어와 차를 내려놓고 다시 나갔다.
영만은 차를 코앞까지 가져가 향을 맡고는 말했다.
“좋은 차구나.”
“마트에서 파는 겁니다.”
사실 중국에서 공수해 온 최고급 황차지만 굳이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동만은 머쓱한지 머리를 한 번 쓱 만지고는 말을 이었다.
“강빈. 네가 어려웠을 때 내가 홈쇼핑에 광고 줬던 거 기억나냐?”
영만의 태선보험을 행복홈쇼핑 채널에서 광고했던 일.
나에게 충분히 이득이 된 일이었지만, 영만에게 더 큰 이득으로 돌아갔던 일이다.
그때도 그렇게 생색을 내더니 여지껏 똑같은 생각을 품은 모양이다.
“기억나죠. 추가계약 해달라고 그렇게 화를 내셨다고 행복홈쇼핑 홍사장이 말했던 기억이 있네요.”
“흠흠. 많이 바쁜가 보구나.”
“아까도 말씀드렸잖아요.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영만이 부드럽게 입가에 호선을 그으며 말했다.
“우리가 한배를 타는 게 어떠냐.”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주세요.”
이 멍청한 작자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나 들어나 보기로 했다.
“음… 금융과 호텔이 합치면 전자 하나 못 이기겠냐?”
“같은 태선에서 이겨 먹겠다는 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나랑 너랑 전자 지분 갖고 있는 거 합쳐서 우리 걸로 만들자고.”
“하…. 큰아버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스스로 자각은 하고 계신 겁니까.”
동만이 눈알을 살짝 굴리다가 고개를 내밀며 작게 말했다.
“지금 회장님이 너 이뻐하신다고 기고만장한 것 같은데, 착각하지 마라. 지금 당장 쓰러지셔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야. 지금도 전자한테는 안 되는데 회장님의 부재? 어떻게 될 것 같냐.”
“그럼 백부님이 회장 하시겠네요. 뭐가 문제입니까?’
“뭐?”
“제가 회장 자리라도 노리는 줄 아셨던 거예요?”
영만은 당연히 내가 회장 자리를 노리고 있는 줄 알았는지 눈을 끔뻑였다.
물론 그의 생각은 맞았다.
분위기 잡고 말하는 그에게 꼬장 한번 부리고 싶었을 뿐.
알게 된다 한들 상관은 없었으나, 굳이 내 쪽에서 용인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할 얘기 더 있습니까?”
“으, 응? 하하. 그냥 얼굴이나 한번 보러 온 거지. 할 얘기는 무슨. 아무튼 잘 지낸다는 거지?”
“저야 늘 잘 지냅니다.”
“그래. 연락하마! 잘 지내고 있어.”
영만은 겉으로는 침착하게 행동하는 듯 보였지만 몸을 돌리자 식은땀에 등이 젖어 있는 셔츠가 보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소파 뒤에 있던 그의 비서가 나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영만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영만이 조만간 사고를 칠 것 같으니 사람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화기를 들어 내선 번호로 연결했다.
“차실장 들어오라고 해.”
1분도 지나지 않아 내 집무실로 영균이 곧장 들어왔다.
노크를 하지 않은 이유는 어떤 상황이 일어날지 모르니 영균에게만 지시했기 때문이다.
“방금 서영만 사장이랑 들어왔던 사람, 누군지 알겠어?”
영균은 진태의 곁에서 오래 일했던 전적이 있기 때문에, 일하던 당시에도 영만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을 그 남자에 대해 알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영균이 늘상 그런 것처럼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지금부터 알아가겠습니다. 어느 정도로 알면 되겠습니까?”
“시간은 일주일. 제한은 없어.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정황만 주지 마.”
“알겠습니다.”
***
“이런 빌어먹을 건방진 새끼가.”
태선백화점을 빠져나오는 영만은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아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속내까지 밝혔건만 강빈은 끝까지 가면을 쓰고 있었다.
“뭐? 회장 자리엔 관심이 없어?”
영만은 자신의 은색 세단을 발로 쾅, 하고 쳤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가벼운 소재가 쓰인 차문이 움푹 들어갔다.
그에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사람은, 옆에 서 있던 명한이었다.
차를 원상복구시켜야 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영만의 화를 옆에서 직격으로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명한은 수년간 영만의 뒤를 닦아오며 상무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여전히 그의 수발을 드는 일을 해야만 했다.
영만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말했다.
“명한아.”
“예. 회장님.”
회장이란 말에 영만이 눈알만 돌려 주변을 살폈다가 다시 말했다.
“내가 진급을 안 시켜줬냐.”
“해줬습니다.”
“월급을 안 올렸냐.”
“...올려줬습니다.”
“부족한 게 없네?”
“그렇습니다.”
“근데 실적은 왜 안 나오는 거냐?”
“....”
명한은 억울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영만이 술집에서 사람을 패거나, 조폭을 고용해 경쟁업체의 사업계획서를 빼돌린 일의 뒤처리까지 맡은 게 명한이었다.
심지어 방금 영만이 발로 깐 차의 수리까지 맡아야 했으며 한밤중에도 그의 뒤처리를 하기 위해 집을 나와야 했다.
이 와중에 실적을 어떻게 올리라는 말인가?
그러나 이 억울함을 드러낼 수도 없었다.
영만이 내세울 것 하나 없는 명한의 유일한 동아줄이기 때문이다.
명한은 티 나지 않게 주먹을 꽉 쥔 뒤에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