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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54화 (154/249)

#154화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까지만 해도 재계 순위 9위였던 우리기업은 위기를 이겨내지 못하고 현재 재계 28위까지 떨어진 상태였다.

복합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가장 컸던 것은 우리건설의 부채.

우리건설은 베이징 항만건설의 실적으로 DMC 사업을 받아내긴 했지만, 정작 공사대금 회수 지연으로 적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우리그룹 측에서 적절한 타이밍에 계열분리를 하지 못했더라면, 그룹 전체가 부도 위기에 처했을지도 모른다.

우리그룹 계열사들의 지주회사이자, 몇 년 전까지 최대 조선해양기업이었던 우리조선해양.

성인아 회장을 만나기 위해 경상남도 거제에 도착했다.

진석이 거제의 푸른 바다를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날씨 끝내주네요. 그보다 성 회장님은 왜 거제에서 보잡니까? 떡하니 서울사무소도 있던데.”

“그거 언제 적 얘기입니까? 사정 어려워지고 처분한 지 오래예요. 거제 온다고 직원들도 꽤나 이탈했다던데.”

2년 전 우리조선해양은 서울 중동에서 거제로 이전을 강행했다.

기업의 조선소가 거제에 있던 이유가 큰 것 같았다.

서울의 본사 건물을 매각한 돈으로 한 번의 위기는 막았겠지만, 문제는 직원들의 이탈이었다.

해양플랜트 설계 부문 소속의 연구원들과 조달부서의 직원들이 포함되어 본사 인력의 약 40프로가 사직서를 제출했다.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게 부담이 되었을지, 혹은 회사의 어려워진 사정 때문에 더 나은 선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내 얘기를 들은 진석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십 년은 넘게 키운 사람들일 텐데. 성회장 입장에서는 뼈아프게 됐구만.”

진석의 말대로 돈이야, 어디서든 유치하고 끌어올 수 있다지만 키워낸 인재들의 이탈은 회사의 미래를 잃은 것과 다름없다.

결정에 납득은 가면서도 아쉬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차를 타고 우리조선해양으로 향했다.

한국에서 2번째로 크다고 알려진 거제도안에서 우리조선해양의 조선소는 옥포동과 장승포동에 걸쳐 있었다.

워낙 조선소의 크기가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진석은 이 정도 규모의 조선소는 처음 보는지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런 진석을 보며 코웃음을 치고 말했다.

“태선의 조선소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시려고.”

“예? 이것보다 큽니까?”

“두 배는 될 겁니다.”

우리조선해양이야 한국에서 먹힌다지만, 태선중공업이 맡은 조선은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이런 태선중공업과 태선건설을 자회사로 둔 태선물산이 괜히 태선전자와 맞먹는다는 게 아니었다.

진석과 떠들어대는 사이 어느새 도착했는지 차가 멈춰 섰다.

우리조선해양의 본사는 조선소를 가로질러 바다와 마주하고 있었다.

프론트에서 직원이 나와 우리를 인아의 집무실 앞으로 안내했다.

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창문도 모두 열려있어 시원한 바닷바람이 방 안을 맴돌았다.

테이블에는 노년의 여자가 앉아 있었다.

염색을 했는지 얼굴에 자리한 주름과 달리 머리는 검은색으로 윤기가 넘쳐흘렀다.

인아가 안경 사이로 날카로운 눈으로 우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셨군요. 소파에 앉아 계세요.”

간단한 통성명조차 없이 앉으라니, 진석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저희가 누군지는 아십니까?”

“네.”

“....”

인아가 시선을 다시 제 앞에 놓인 서류로 올리고, 진석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한 뒤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나도 진석 옆에 털썩 앉자 진석이 말했다.

“저 여자는 우리건설을 팔아치울 생각 아니었습니까? 사주겠다는 사람이 부회장님밖에 없을 텐데 왜 저런 태도를 보일까요.”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재계 9위였던 그룹의 회장입니다. 자존심 문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제값이라도 받기 위한 텃세일 수도 있겠죠.”

그 진태조차 까탈스럽고 불같다고 한 사람이 성인아였다.

쉽지만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아의 시선이 간간이 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지만, 정작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기싸움이라도 하려는 것 같지만 나는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며칠 전 채규에게 연락받은 바로는 채권단이 인수 반대를 철회했다.

오늘 인아와 미팅을 진행하는 이유는 인수과정에서 있을 절차에 대해서이지, 인수 자체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직원이 가져다준 커피를 홀짝이며 진석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에게 다가온 인아는 종이 뭉치를 내게 내밀며 자리에 앉았다.

“일이 바빠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죄송합니다.”

“이해합니다. 저희도 워낙 바쁜 사람들이거든요.”

우리 또한 한가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먼저 저쪽에서 텃세를 부린 마당에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뼈있는 말에 인아가 잠깐 움찔하고는 말했다.

“그보다 서 회장님과 아주 각별한 사이인 것 같은데요.”

“각별하죠. 제가 손자거든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만….”

벙찐 표정을 짓고 있는 인아를 무시하고 가장 위에 놓인 종이를 들어 올리자 인아가 이어서 말했다.

“삼 일 전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는 채권단 전원의 인수 반대 통보서가 날아오더니 늦은 저녁에는 인수에 찬성한다는 내용의 통보서가 날아오더군요. 채권단이 한두 명도 아니고,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는 건 가장 윗사람의 지시라는 얘기겠죠.”

“제가 할아버지께 부탁드린 일입니다.”

“예상은 했습니다.”

태연한 척 대화를 이어나갔지만, 인아의 말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채권단 전원이 인수를 반대했다고?

그럴만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다.

리버은행의 최대고객인 태선전자의 수장이자, 어떻게든 내 성과를 막으려는 사람.

생각보다 더 큰 빚을 진태에게 진 것 같다.

인아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말했다.

“이제 인수는 돌이킬 수 없겠죠. 이미 몇 번이고 다짐한 일이니 괜찮습니다. 다만 조건 하나를 덧붙여도 되겠습니까.”

“우선 들어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진태라는 뒷배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도, 인아는 텃세를 부렸다.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내걸고 싶은 조건이 무엇인지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앞으로 최소 2년 동안은 우리건설의 인력감축을 비롯해 구조조정은 안 하겠다는 조항을 넣어주세요.”

“그건 힘들 것 같습니다.”

안 되는 건 딱 잘라 말해야 한다.

공사에 직접적으로 관계된 인력은 남겨야 하겠지만, 윗대가리들은 싹 다 바꿀 생각이었다.

DMC 사업까지 받았으면서 기업을 부도 위기에 처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으니까.

공사대금 회수 지연이라는 명목상의 이유가 있었지만, 경영 문제일 확률이 높았다.

그보다 이제 와서 제 직원을 챙기려는 인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의중을 떠보듯 말을 뱉었다.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그룹에서 이미 내친 기업이잖아요.”

“... 우리건설은 저희 그룹 시작부터 함께했던 기업입니다. 임원진들 중 상당수가 시작부터 함께했고요.”

“그러니까 같이 갈 수 없다는 겁니다. 이미 틀린 결과를 내놓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미 내쳤던 기업의 임원들을 이제 와서 챙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고개를 젖히고 인아가 할 말을 기다렸다.

잠시 주름진 눈을 감은 인아가 다시 말을 이었다.

“계열 분리하기 전에 우리건설의 자금이 저희 그룹으로 융통되었습니다.”

“허.”

진석이 낮은 탄식을 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인아의 말은 우리건설이 부도하게 된 이유가 공사대금 회수 지연 때문이 아닌, 같은 그룹의 돌려막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계열분리를 통해 건설은 죽이고, 그룹은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나는 입가에 대놓고 조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건설의 임원진들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겠죠. 입막음에 대한 조건으로 자리라도 보장해준 겁니까?”

“....”

“대체 무슨 권리로?”

“그들은 아직도 제 말에 힘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지금 서대표님과 대면하는 것을 봐서 그 생각은 사실일 테고요.”

“제가 오신 이유를 착각하신 모양이군요.”

“네?”

인아는 내가 거제도까지 와서 그녀를 만나는 이유가, 아직도 인수 결정에 제 의견이 중요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성회장님이 지금 저를 만날 수 있는 이유는.”

말을 한 호흡 끊고 인아의 흔들리는 눈을 바라봤다.

“갖고 계신 10프로의 지분 때문입니다. 저는 인수를 하는 조건으로 그 지분을 사려고 했습니다.”

“제, 제가 내건 조건만 받아들이신다면 제값만 받고 넘기겠습니다.”

“아니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진석에게 눈짓하자 진석도 벌떡 일어났다.

“그 사람들. 이제 제 사람들이거든요. 인력감축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성회장님이 아니라 직접 말이죠. 입막음 제대로 하시려면 그 지분 그냥 넘기세요. 아니면 당신이 쌓아 온 우리그룹이 어떻게 무너지는지 지켜보시던가.”

인아는 여전히 내가 앉아 있던 곳을 지그시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건설의 지분 10퍼센트를 제값 주고 사려면 최소 300억 원은 지급해야 한다.

나에게 별거 아닌 돈이지만, 치르지 않아도 되는 돈을 줄 생각은 없었다.

우리건설의 공사대금이 그룹으로 융통되고, 계열분리 되었다는 것이 재판으로 넘어간다면 우리그룹은 막대한 과태료와 더불어 우리건설의 투자자들에게 소송이 걸릴 것이다.

지금도 겨우 유지하고 있는 우리그룹이 그만한 돈과 시간을 감당할 여력은 없다.

인아는 망연히 앉아 있지만, 이미 결과가 정해진 일이다.

***

태선호텔의 판교점이 건설되기 시작했다.

아직 뼈대도 다 지어지지 않았지만, 드디어 공사가 시작된 것이다.

진석이 낄낄대며 웃고는 말했다.

“그때 성회장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니까요.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던가. 지금도 이해 가지 않는 게, 그때 성회장은 왜 대금을 가로챈 사실을 말한 걸까요?”

나는 옆에 서서 공사 현장을 보며 말했다.

“저를 이용한 겁니다.”

“예?”

우리건설의 공사대금을 횡령하며 살아남은 우리그룹.

인아의 눈에 시작을 함께했다던 우리건설의 임원진들은 그 사건 이후로 언젠가 제 목을 찔러도 이상하지 않을 적이 되었을 것이다.

자리를 약속했다 하더라도 언제 또 대가를 요구할지 알 수 없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성회장은 처음부터 저한테 지분 10프로를 그냥 줄 생각이었을 겁니다. 대신 저는 우리건설의 임원진들을 떠맡아야 할 의무가 생겼고요.”

“그 말은…”

“결과적으로 성회장은 불안해하던 요소가 없어졌고, 저는 대가 없이 지분을 받았으니 서로 손해 볼 것 없는 테이블이었습니다.”

인수가 결정되고, 우리건설 임원진들과는 2년 간 계약을 맺었다.

그 조건으로 인수 이전의 우리건설 안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 함구하기로 했고.

이 계약을 통해 차후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나와는 관계없는 일로 만들어 놓았다.

분명 나에게 이득이 되는 일이었으나, 끝까지 망연함을 연기하던 인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2년 뒤에 보자고….”

“예?”

“그냥 혼잣말입니다.”

주변을 엿 먹이면서 제 이득을 챙기는 사람을 눈앞에서 봤는데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심지어 내 기업이 된 사람과 연관된 사람이라면.

넓은 황야에 울려 퍼지는 기계음을 비롯한 소음을 들으며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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