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채권단 인원 전부 받아들였습니다. 보상금은 98억 원입니다.”
완수의 보고를 들은 재만은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얼마 전 강빈이 우리건설을 인수하려 한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회사도 아닌 리버은행의 행장에게.
행장은 처음에 GB인베스트먼트가 우리건설을 인수하려던 것을 마치 자랑처럼 떠들었다.
‘부회장님의 조카분이 애물단지였던 우리건설을 인수한다고 합니다!’
그때 자신이 뭐라고 했었는지 기억하기 위해 재만은 기억을 되새김질했다.
화를 내었던가, 욕설을 내뱉었던가 고민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강빈이 하고자 하는 일을 막았다는 것이었다.
우리건설을 GB인베스트먼트가 인수하고 추후 태선건설과 합병이라도 진행한다면 강빈의 재만을 뛰어넘을 터였다.
98억 원으로 자신을 위협하는 강빈의 성과를 막았다면 싸게 먹혔다.
재만은 저절로 올라가는 입꼬리를 그대로 두고 말했다.
“날인은 다 받았나?”
“네. 각서까지 받아냈습니다.”
“지행장한테 성회장한테 바로 통보하라고 지시해.”
재만의 들뜬 목소리를 들은 완수도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완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재만은 팔베개를 하고 의자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처리할 일들이 많았지만, 잠시간은 이 승리감에 도취되고 싶었기에.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휴대전화가 울렸다.
“누구야… 쯧.”
무시할까 싶다가도 휴대전화의 번호를 확인했다.
발신자는 이채규 실장이었지만 진태에게 걸려온 전화나 다름없었다.
재만은 자세를 바로 하고 핸드폰 폴더를 연 뒤 통화버튼을 눌렀다.
“예. 이실장님.”
“서재만 부회장님. 간만에 연락드리는군요.”
“하하. 저도, 이실장님도 워낙 바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단순한 안부는 아닐 테고… 무슨 일입니까?”
“오늘 회장님댁에 방문하실 수 있습니까?”
“예? 전달받은 사안은 없는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기별도 없이 이렇게 갑작스러운 호출이라니….
재만은 곰곰 생각에 잠겼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채규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회장님이 전화로 할 이야기는 아니라고 하시는군요.”
“...알겠습니다. 오늘 몇 시에 가면 됩니까?”
“바로 오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재만은 손목시계를 들어 올려 시간을 확인했다.
1시 47분. 태선전자의 독일 시장 진출을 앞두고 총회의가 진행되기까지 10분이 조금 넘게 남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만약, 만약의 경우 진태가 자신을 부르는 이유가 승계와 관련된 것이라면.
재만이 휴대폰을 잠시 떨어뜨리고 한숨을 깊게 내쉰 뒤 말했다.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재만이 전화를 끊고 80층이 넘어가는 태선전자 밖으로 나오기까지 오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재만을 비롯한 고위 임원들만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넥타이를 바로 맨 재만은 입구 바로 앞에 서 있는 검은색 세단에 몸을 실었다.
차를 타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진태가 호출한 이유에 대한 고민이 재만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2001년, 태선전자는 다시 한번 성장을 거듭했다.
세계 각국의 지사를 추가 건설했고, 반도체 시장 안에서의 입지는 이제 그 누구도 무시할 수 없었다.
가장 큰 성과는 중국에서 진행한 이동통신사업.
생각지도 못한 이 사업이 지금 태선전자 전체 매출의 10프로나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물론 걸리는 것은 있다.
계약이 초기 5년간은 1년 동안 갱신해야 하고, 태선물산에게 수익 지분을 줘야 하는 것에 더불어 이 성과가 강빈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찜찜하긴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중국에서 이동통신뿐만 아니라 태선전자제품의 전체 매출 상승을 불러왔다.
사업권을 가져온 것은 물산이지만, 수익을 내고 결과로 내보인 것은 전자.
재만이 알고 있는 진태라면, 이 공의 대부분은 재만의 몫이었다.
서재 앞에는 채규가 서 있었다.
재만을 본 채규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빨리 오셨군요. 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회장님이… 흐흐. 알겠습니다.”
진태가 기다린다라.
재만은 슬며시 올라가는 입꼬리를 다시 내리고 헛기침을 내뱉은 뒤에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
진태는 서재 가장 안쪽에 있는 테이블에서, 금테안경을 눌러쓴 채 눈앞의 서류를 훑고 있었다.
“아버지. 저를 찾으셨다고요.”
“왔냐. 앉아라.”
진태는 대답하면서도 재만의 얼굴을 보지 않고 서류를 마저 훑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야 늘상 있던 일이었기에, 재만은 개의치 않고 진태의 맞은편에 놓인 가죽 의자에 앉았다.
진태가 서류를 읽고 있는 동안 재만은 진태의 얼굴을 눈여겨보았다.
진태는 그동안 관리를 철저히 해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는지 얼굴과 셔츠 아래로 드러난 손목에서 검버섯이 피어있었다.
머리에는 윤기가 흘렀지만, 영양제로 인한 것일 터.
진태가 서류를 내려놓자 재만은 말을 꺼냈다.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십니다.”
“헛소리. 그러는 너는 얼마나 건강하길래 쓸데없는 일을 하고 다니는 게냐?”
“예?”
진태의 날이 서 있는 말에 재만이 몸을 움찔하며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하던 중 불현듯 이곳에 오기 전에 들었던 보고가 떠올랐다.
이어지는 진태의 말은 그의 불안이 사실임을 밝혔다.
“네가 우리건설 채권단을 소집했다며.”
“태선전자에겐 그럴만한 능력도, 명분도 있습니다.”
“그래. 내가 써먹기 위해 잘 차려놓은 밥상에 네가 숟가락을 올렸지. 리버은행을 고작 이딴 일에 써먹어?”
그제야 재만은 진태에게 채권단 소집을 알린 사람이 누군지 깨달았다.
리버은행의 행장, 지창석.
“...지행장이 아버지께 보고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입니까?”
“지금 지행장 말하는 거냐, 아니면 그놈 아비 말하는 게냐?”
재만은 몸이 얼어붙는 듯한 싸한 느낌이 들었다.
지창석의 아버지라면, 전대 리버은행의 행장이다.
그리고 이 말은, 진태는 단 한 번도 리버은행의 실권을 놓친 적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에게 태선전자를 물려준 이후에도.
“저를 신뢰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나는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럼 이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강빈이 그놈 때문 아니냐는 말입니다.”
진태가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고 말했다.
“태선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너와 강빈이가 반대되는 입장이어도 똑같았을 게다. 우리건설은 GB가 갖고 가는 오는 게 맞아.”
“결국 태선건설과 합병 처리해서 강빈이 지분 늘려주는 꼴 아닙니까. 제가 그걸 잠자코 지켜보기만 하실 줄 알았습니까?”
진태가 인상을 한 번 찡그리고는 혀를 찼다.
“쯧, 제 욕심에 잡아먹히는 게 누군지 잘 생각해봐라. 강빈이가 마카오 가서 따온 사업. 지금 누구 손에 들려있지?”
“그건…!”
대답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질끈 깨문 재만도 변명할 거리는 있었다.
태선전자가 수익을 독차지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태선물산에게도 투자금 이상의 수익이 돌아가고 있는 상황.
거기에 더불어 재만이 생각할 때, 이 사업의 진정한 가치를 끌어낼 수 있는 기업은 태선전자밖에 없었다.
태선반도체의 신기술 개발에 힘입어 벌써 2조 원 규모가 넘어가는 사업이다.
그리고 태선전자는 그 이상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진태에게 말하는 것은 강빈의 성과를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사업권을 가져온 게 다름 아닌 강빈이니까.
진태가 부드럽게 타이르듯 말했다.
“재만아. 한국을 호령하는 태선이 세계에서는 어느 정도 위치라고 생각하냐.”
“....”
“한 손 안에 들어갈 것 같냐? 아니지, 열 손가락 안에도 못 들어가는 게 지금의 태선이다.”
“....”
“네가 지금껏 해오던 일을 깎아내리는 게 아니다. 다만, 나는 태선이 더 높은 곳에 오르길 바랄 뿐이야.”
“아버지… 저는 두렵습니다.”
재만은 말을 뱉은 직후 후회했다.
그토록 엄하던 진태가 일순 유한 모습을 보였다고 속내를 내비치다니.
그러나 같잖게 쳐다볼 줄 알았던 예상과 달리 진태는 여전히 무덤덤해 보였다.
“두려워하길 망설이지 마라. 적수가 있다는 건 좋은 거니까. 나에게도 인정받은 네가 못할 게 뭐가 있겠어?”
재만은 진태가 처음 별장에 데려갔던 일을 떠올렸다.
2위 전자기업과 격차를 완전히 벌리고, 일본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했다고 보고를 올렸던 그 날.
재만은 별장 안에 있던 안락의자에 앉아 인천 바다를 바라보며, 태선을 오롯이 자신이 거머쥐었다는 생각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재만은 결심을 끝내고 진태에게 말했다.
“무엇이 태선을 위한 일인지 잘 알겠습니다.”
“그래. 잘 생각했다.”
“다만… 이번 채권단을 설득하기 위해 지출한 비용이 꽤 큽니다. 인수 반대를 철회하는 대신 이번에 태선전자에서 인수할 회사들에 대해 승인을 내주십시오.”
재만은 품 안에 있던 봉투를 꺼내 진태에게 내밀었다.
진태는 고깝지 않은 시선으로 봉투 안에 들어있던 서류를 꺼냈다.
서류에 적혀 있을 회사들은 B2B 기업과 디자인, IT 관련 기업들과 더불어 언론사까지 있었다.
방금 진태는 달콤한 말로 재만을 회유하려 들었지만, 재만은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강빈이를 태선의 후계자로 생각하고 있다.’
진태는 리버은행을 몇 대에 걸쳐 이용하며 유대관계를 쌓아왔다.
고작 의견 하나 고집했다 해서 이 밥상이 엎어질 정도로 유약한 관계가 아니라는 말이다.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을 모습까지 취해가며 자신을 설득하려 한 까닭은 강빈이와 관련되었기 때문이겠지.
진태에게 호출당하며 챙겨왔던 이 서류 안에는 10여 개의 회사들의 이름과 기업분석이 들어있다.
그중 2개 정도는 재만의 재량으로 인수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진태의 자본과 허락이 필요했다.
원래대로라면 이 자리에서 1개 기업을 추가로 인수해달라 부탁할 심산이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GB가 우리건설을 인수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재만은 제 이득이라도 취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두 전자에 필요한 회사들입니다만, 상단에 적힌 5개 기업 정도는 회사 자본으로 인수하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재만은 진태가 거절하길 바랐다.
모두 전자에 필요한 회사라고 말은 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정말 인수해야 할 회사들을 위해 명목상으로 올려놓았을 뿐이다.
자신의 제안에 역정을 내고 우리건설 따위 신경도 안 쓰겠다고 말하기를 바랐다.
진태는 예상 인수 비용만 스윽 훑더니 말했다.
“진행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