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빈.”
잠결에 어떤 소리가 들려 눈을 살짝 떴다가 다시 감았다.
“서강빈!”
익숙한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였다.
눈앞에는 진태가 눈을 부릅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오랜만입니다.”
“이놈이… 여기가 네 집 안방인 줄 아냐? 언질도 없이 말이야.”
“어차피 오늘 보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할아버지 뵙고 싶어 일찍 온 손주한테 하실 말은 아니죠.”
“점점 더 뻔뻔해지는구나.”
오랜만에 본 진태의 얼굴은 많이 변해 있었다.
얼굴에 자리 잡은 주름이 전에 비해 훨씬 깊어졌고, 눈이 얇고 어딘가 무력해 보였다.
이전 생에서 진태의 사인(死因)이었던 고혈압이 아니더라도, 나이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제가 전에 보낸 건 다 드셨어요?”
“꽃으로 만들었다던 빨간 거 말이냐? 아무 맛도 안 나는데 향은 독특하더구나.”
“마음에 드셨나 보네요.”
만약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엄한 소리를 내었을 것이다.
진태에게 얼마 전 보냈던 것은 사프란의 암술대를 건조시켜 만든 향신료였다.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싸다고 잘 알려진 이 향신료는, 단 1그램을 만드는데 500개의 암술대를 건조시켜야 할 정도로 생산량이 적었다.
한국 내에서 괜찮은 품질은 구하기가 힘들었고, 스페인에 직접 사람을 보내 구해온 최상급 사프란이었다.
진태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가 언젠데 이제 온 게냐.”
“한 달밖에 안 됐습니다. 태선물산과 태선백화점을 동시에 경영하는 게 쉬운 일 아니라는 것 잘 아시잖아요.”
“젊은 놈이 엄살은. 그보다 입 돌아가기 좋은 이곳에서 잠은 왜 자고 있었어.”
“어제 잠을 못 잤거든요. 그보다 이 흔들의자, 엄청 편하네요? 여기에 앉자마자 잠이 들었어요.”
진태가 헛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래서 오늘 왜 보자고 한 게냐.”
“DMC 시공 맡았던 우리건설이 구제금융 신청 냈던 건 아실 겁니다. 그곳을 GB로 인수하려고 해요.”
“태선에도 건설이 있는데 굳이 말이냐?”
“태선 건설은 지금 맡은 시공만 두 개입니다. 공사대금 들어오려면 올해는 지나야 되는데, 그때는 늦어요. 일단 GB로 인수하고 나중에 합칠 겁니다.”
“말은 이쁘게 하는구나. 나중에 태선에 내놓는 대가로 지분 먹으려는 걸 누가 모를 줄 알아? 네놈이 대가 없이 움직이는 걸 나는 본 적이 없다.”
속내를 들켜 뜨끔했지만 태연한 척 굴었다.
“우리건설만 인수하면 DMC 시공도 얻는 건데 손해 볼 게 없습니다. 저도 놀고있는 자본을 써야 하구요. 여러모로 득이 되는 일입니다.”
“나한테 그 얘기를 꺼내는 이유가 성회장 때문이냐? 그 여자 성격이 워낙 까탈스럽고 불같아야지.”
나는 고개를 저었다.
확실히 우리건설의 실질적인 주인이자 우리그룹의 회장, 성인아는 세간에 알려진 정보도 적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부분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인아는 우리건설 인수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외환위기 때부터 이어져 온 우리그룹의 위기를 우리건설을 매각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 우리건설의 의사결정은 모두 채권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얼마 전에 통보받은 바로, 채권단의 결정에 의해 인수를 거부한다는 답변을 받았다.
“성회장은 어차피 인수하려 들 겁니다. 우리건설뿐만 아니라 지켜야 할 곳들이 많으니까요. 게다가 부도위기에 처한 건설사를 제값 주고 사겠다는데 마다하겠습니까? 문제는 채권단입니다. 리버은행이 현재 채권단의 선두에서 인수를 반대하고 있어요. 할아버지가 잘 알고 계시는 곳 아닙니까?”
리버은행은 진태가 장기간 이용하는 은행 중 한 곳으로 태선전자와 전속계약을 맺기도 하였다.
그 리버은행이 우리건설에 빚을 내주며 채권단 자율협약을 맺었다.
쉽게 말해 돈을 빌려주는 대신, 기업 활동이나 재정 문제에 대해 우선권을 얻었다는 말이다.
진태가 고개를 까닥이고 말했다.
“GB의 인수에 찬성하시라, 그 말만 해달라는 소리 아니냐?”
“맞습니다. 어려운 부탁이라면…”
“예끼! 말 한 마디가 뭐가 어렵다고 그리 절절 매? 늘 당당하게 받을 거 받아 가던 놈이.”
“이번엔 제가 한 게 없지 않습니까. 저는 사업할 때 늘 기브 앤 테이크를 중요시합니다.”
“흠. 그럼 나도 받아 갈 게 있지.”
“할아버지가요?”
진태가 평소에 나한테 요구했던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대가로 무엇을 말할지 예상이 안 됐다.
차라리 돈과 관련된 문제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다른 기업까지 나에게 떠맡긴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지금도 겨우 시간을 내어 개인 투자를 하고 있는데….
“너 판교에 호텔 하나 짓겠다며.”
“네.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최고급 호텔을 지을 겁니다.”
“개관하고 첫 하루를 내게 줘라.”
“... 그날은 이미 예약된 손님이 있습니다.”
준만과 영혜를 첫 손님을 받겠다고 약속했다.
농담처럼 나왔던 말이었지만, 지킬 생각이었다.
하지만 진태도 물러날 기색이 아니었다.
“나보다 우선시 되는 사람이 있다? 그게 대체 누구냐?”
“할아버지의 막내 아드님입니다.”
“이런…. 내 준만이한테 한번 말해보마.”
“...그렇게까지 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그때 네 인맥 좀 넓혀야 될 거 아니냐. 정부쪽이랑 재계 윗대가리들 싹 다 불러 모아야지. 그것도 명분이 있어야 되는 일이다.”
개관식조차 사업에 관련해 진행시킬 생각을 하다니.
단순히 가족에게 베푸는 날로 쓰겠다는 내 생각이 얕았다.
아직도 진태에게 배울 것은 많이 남아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말씀대로 진행하겠습니다.”
준만과 영혜를 위해 루프탑 파티장을 어느 정도 꾸며 둘 생각이었으나, 진태의 인맥들이 모두 온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어느 때보다 성대한 파티장을 꾸밀 것이다.
***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 우리건설 채권단 회의가 열렸다.
우리건설의 주식을 보유하지 않은 태선전자에서 회의가 열린 까닭은 간단했다.
우리건설 매출의 40프로 이상을 태선전자가 책임지고 있었으니까.
재만의 손길이 리버은행에서 시작해 우리건설까지 미치는 것이다.
리버은행의 행장, 지창석과 이민혜 부행장을 비롯해 우리건설의 개인투자자들까지 열댓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였다.
연락받은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위치할 때야 태선전자의 전무이사, 지완수가 자리에 나타났다.
“지행장님, 이부행장님, 그리고… 처음 뵙는 분들도 많군요. 반갑습니다. 태선전자의 전무이사 지완수입니다.”
“저… 부회장님은 바쁘신 겁니까? 얼굴이라도 한 번 직접 뵙고 싶었는데요….”
“그렇게 한가한 분이 아닙니다. 하하.”
“그, 그렇죠. 하하. 찾아뵙고 싶었다고 말씀만 전해주세요.”
“그거야 뭐 어렵겠습니까?”
어딜 가든 대접받을 창석이 연신 고개를 굽혀가며 청승을 떨었다.
옆에 서 있던 민혜도 완수의 눈치를 보고 있는 반면, 개인투자자들은 언짢은 표정으로 완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로서는 우리건설의 지분을 갖기는커녕 우리건설과 전혀 상관없는 태선전자의 이사회실에서 채권단 회의를 갖는 것이 납득되지 않았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완수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악수를 청했다.
“여러분들을 위한 자리인데 그런 표정을 지으실 필요 있겠습니까?”
투자자 중 가장 주름이 깊은 한 남자가 나서서 말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리버은행에서 진행하기로 한 회의입니다. 회의 당일에 와서 바뀐 장소를 통보하다니요. 이런 경우가 도대체 어디 있습니까?”
창석이 진정하라는 듯 두 팔을 흔들고는 말했다.
“왜 그러십니까. 하하. 저희 의견만 잘 조율되면 다 괜찮은 것 아닙니까?”
“결정해도 관계자끼리 정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저희는 지금도 마음 졸이고 있는 거 모르세요?”
리버은행이 부도 위기에 처한 우리건설을 구제금융 한 지가 벌써 1년이 다 되어갔다.
우리건설의 기존 투자자들은 리버은행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며, 제대로 된 경영도 하지 않고 있는 우리건설이 불안할 따름이었다.
주가는 미친 듯이 내려가 제값을 받기에는 글렀다.
기존 주가의 절반만 되어도 곧장 팔아치울 생각이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때문에 GB가 인수한다고 의견을 밝혔을 때는, 환호성을 질렀었다.
망해가던 기업도 GB를 거치면 되살아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잠시, 리버은행의 행장, 창석은 우리건설을 인수시킬 생각은 없다고 확언했다.
완수가 얼굴을 투자자에게 불쑥 내밀며 말했다.
“지금 우리건설이 어디에 팔려갈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투자자가 당황하며 대답했다.
“G, GB인베스트먼트잖아요.”
“거기가 어디 나라 기업인지는 알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게 무슨 말입니까? 거기 대표가 우리나라…”
“미국 기업입니다. 법인도 미국이고, 직원들도 대표 한 명 빼면 싹 다 미국사람이고요. 우리건설을 해외기업에 넘길 생각입니까?”
“이, 일단 수익만 낸다면…”
“허!”
완수가 혀를 차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건설이 DMC시공을 맡고 있는 건 알고 있을 겁니다. 국가사업이죠. 그걸 지금 미국에다가 갖다 팔라는 말과 뭐가 다릅니까?”
투자자들 중 매부리코를 하고 풍채가 좋은 한 중년의 남자가 나섰다.
“우리도 돈은 받아야 될 거 아니요. 뭐 여기가 애국하는 자리라도 된다는 겁니까?”
본색을 드러낸 투자자에게 완수가 비웃음을 흘리고는 말했다.
“여러분들 의견 잘 알겠습니다. 결국 회사의 안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수익이 중요하다는 거군요.”
“....”
완수의 말에 투자자들은 말을 잃었고, 행장은 조용히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고 있었다.
완수가 이어서 말했다.
“부회장님 말씀이시니 잘 들으세요. 여러분들이 갖고 계신 우리건설 지분 1프로당 5억 원씩 지급하겠습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요? 1프로면 적어도 50억 원은 받는 가격인데.”
“언제 적 주가를 말하시는 건지…? 지금은 높게 쳐줘야 24억 원을 겨우 받을 거 아닙니까? 그리고 말은 끝까지 들으셔야죠. 지분을 가져오겠다는 게 아닙니다. GB에만 안 넘기는 대가로 5억 원을 드린다는 거지.”
완수의 말을 듣고 얼굴에 힘껏 힘을 주고 있던 투자자들이 사르르 표정을 풀었다.
우리건설의 주가 1프로는 완수의 말 그대로 높게 받아 봤자 24억 원을 겨우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팔릴 경우다.
부도 위기에 구제금융까지 받은 우리건설의 주식을 그 돈을 주며 살 정신 나간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부동산 열풍으로 건설업계는 호황이었다.
DMC시공이 확정되었을 때 천정부지로 올랐었던 우리건설의 주가가 이렇게 내리막길을 탈지 누가 알았겠는가.
침을 꿀꺽 삼킨 중년의 투자자가 말을 이었다.
“그, 그 조건만 지키면 된다는 겁니까?”
“그럼요. 여러분들은 인수반대표에 지장만 찍으시고, 애국! 만 하면 되는 겁니다. 별다른 조건은 필요 없어요.”
투자자들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