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투, 투자요?”
“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민섭에게 GB인베트스트먼트의 명함을 내밀었다.
민섭은 명함을 들고 진품인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양, 이리저리 돌려가며 살펴보았다.
옆에 앉아서 준희와 떠들고 있는 에릭을 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혹시 서강빈 대표님입니까?”
“맞습니다.”
“....”
언론에 나가기를 꺼렸기 때문에 내 얼굴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예나와 진행했던 인터뷰에 내 얼굴이 실리긴 했지만, 그때보다 훨씬 머리를 짧게 잘랐기 때문에 인상이 달랐다.
민섭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대표님의 명성은 한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모를 수가 없겠죠. 경제지에 매일 같이 나오는 이름이니까요. 투자 방법에 대해서는 전혀 들은 게 없습니다만… 방금 처음 본 저한테 손을 내미신 이유가 뭡니까?”
민섭은 투자 얘기가 나오자 긴장을 했는지 말이 많아졌다.
민섭을 보며 덤덤하게 얘기했다.
“초기자본금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십니까?”
“저와 제 팀원들이 모은 돈을 뺀다면… 300억 원은 필요합니다.”
전생에서 그가 실제로 받았던 투자금은 470억 원.
투자를 받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일부러 낮춰 부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를 할 거면 확실하게 해야지.
“한화를 말씀하신 것 보니 한국에서 창업할 생각인가 봅니다.”
“맞습니다. 배울 만한 건 다 배웠고, 연구원도 영입했으니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초기 비즈니스모델은 다 구상된 겁니까?”
“네. 출시할 복제약에 대해서는 이미 정했습니다. 대표님이 들으셔도 알만한 것들이죠. 한국에 있는 팀원들이 지금도 복제약 연구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투자만 받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겠네요.”
민섭이 눈을 반짝이며 빠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지금 한국에서 바이오산업과 복제약 시장은 황무지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특허가 줄줄이 만료될 때고요. 이 시장에 관심을 갖고 있는 기업은 아직까지 저희 말고 못 봤습니다.”
민섭의 말을 들으며 과거 그가 진행했던 인터뷰가 떠올랐다.
하면 된다는 도전 정신과 모든 것을 걸면 뭐든 된다는 믿음으로 처음 발을 내딛게 되었다고.
민섭을 보며 말했다.
“한국 돌아오시면 연락하세요. 투자 얘기는 그때 마저 하는 것으로 하죠.”
“알겠습니다. 이곳 일정만 소화하고 바로 돌아가겠습니다.”
“천천히 하세요.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니까요. 경쟁자가 없는 사업 아닙니까.”
“하하… 투자회사에서 쫓겨나기만 했지, 투자해주겠다고 한 사람은 서강빈 대표님이 처음이거든요. 괜히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그런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것을 삼켰다.
델타플러스에 독점으로 투자할 사람은 내가 될 터이니 상관없겠지.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아!”
문득 민섭이 커피값도 못 대고 쫓겨날 뻔했던 아까의 상황이 떠올랐다.
지갑 안에 있던 지폐를 모두 꺼내 민섭에게 건넸다.
“이건 투자와 전혀 상관없는 거니까 편하게 받으시죠.”
“예? 이렇게 큰돈을….”
민섭에게 건넨 돈은 대략 이천 달러가 조금 넘을 것이다.
수백억 투자에 비하면 푼 돈이지만, 지금 당장의 푼돈이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저도 배곯아봐서 그게 얼마나 서러운지 압니다. 한식은 비싸서 드시지도 못했을 텐데, 제대로 식사하세요.”
증권가에 자리 잡기 전까지 혼자 월세와 학비를 대기 위해 굶는 일은 허다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무언가를 열정적으로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을지 모르겠네요.”
“좋은 약을 싸게 내놓는 게 은혜를 갚는 거겠죠. 민섭 씨가 하시는 일을 응원하겠습니다.”
복제약이 시중에 많이 풀릴수록, 많은 환자들이 싼값에 약을 이용할 수 있다.
수익을 떠나 델타플러스의 투자자로서 좋은 기업가의 이미지를 다질 수 있는 기회다.
싱긋 웃고 있는 나를 보며 민섭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그럼 한국에서 뵙겠습니다.”
“아, 예! 들어가세요.”
도넛 하나를 입에 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릭과 준희도 내가 일어난 것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차에 타기 전 에릭이 나한테 물었다.
“자선사업가라도 하시려는 건 아니죠? 아까 보니까 투자할 만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요.”
“에릭. 굶으면서 일해본 적 있어?”
“네? 지난 여름에 배가 나와서 끼니를 거른 적은 많아요.”
“... 됐다. 아무튼 밥값까지 아껴가며 자기 회사를 살리려고 하는 사람이야. 저런 열정이면 못할 게 뭐가 있겠냐.”
“음….”
미간을 찌푸리며 고민에 잠겨있는 에릭을 뒤로하고 차에 올라탔다.
***
민섭은 여전히 창가에 앉아 도넛을 먹고 있었다.
근 일주일간 제대로 먹은 것이 없어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위에서 거부를 하는지, 속이 메스꺼웠다.
커피를 벌컥 들이켜고 다시 도넛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먹을 게 있다면 최대한 많이 먹어두자는 게 어느덧 그의 신조가 되었다.
그러다가 아까 강빈이 놓고 간 지폐 더미가 보였다.
회사를 관두지 않았다면, 별 감흥도 없었을 돈.
적은 돈이었지만 지금 생활에는 큰 도움이 될 터였다.
‘게다가 500억 원의 투자금이라니… 대체 뭘 보고 그런 제안을 한 걸까.’
강빈이 투자만 했다 하면 성공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서술해야 할, 경제지에서 강빈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믿기지 못할 신화처럼 써 댔으니까.
그러나 멀리서 본 것과, 자신이 직접 연관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강빈의 명함을 받았을 때는, 자신이 그렇게도 좋아했던 가수, 조진모를 직접 마주했을 때보다 심장이 떨렸다.
다른 사람에게는 성공을 확신한다, 자신한다 말하고 다녔지만 스스로는 늘 지금 하고 있는 게 맞을까 의심하곤 했다.
“아직 확정된 건 아니니까….”
강빈이 놓고 간 달러들은 말 그대로, 그의 호의였을 뿐 투자의 결정은 아니다.
바이오팩토리에서 남은 연수 기간은 2개월.
민섭은 그 안에 최대한 사업계획서를 철저히 짜야겠다고 다짐했다.
***
미국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온 지 한 달.
그날이 찾아왔다.
창밖에서는 여우비가 내리고 있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해 뒤척이는 동안 어느새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침대 옆의 서랍에 놓인 리모컨을 들어 TV를 켰다.
뉴스채널도 아니고, 기존 뉴스를 진행할 시간이 아님에도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과 그가 이끄는 무장 단체 알 카에다가 일으킨 테러 사건입니다. 현장에 나가 있는 김지훈 특파원과 연결하겠습니다. 김지훈 특파원.”
“네. 이곳은 뉴욕 맨해튼입니다. 제 뒤로 보이는 연기는 제1 세계무역센터와 제2 세계무역센터에서 나오고 있는 연기입니다. 이곳뿐만 아니라 워싱턴 D.C.의 국방부 청사 건물인 펜타곤이 테러에 의해 붕괴되었습니다. 현지 시각 오전 8시 46분부터 오후 5시경까지 일어난 상황입니다. 현재 확인된 사상자만 800여 명, 실종자 1000여 명에 이릅니다. 이에 부시 대통령은…”
참담한 심경으로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스스로 몇 번이고 되뇌었던 생각이 다시 올라왔다.
정말 막지 못했을까.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네. 서강빈입니다.”
“대표님. 뉴스 보셨어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봤어.”
“지금 미국증시가 멈췄어요. 예정은 4일이지만, 이런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구요. 오늘 열릴 한국 시장은 완전히 폭락일 거예요. 일단 GB는 대표님 지시대로 주식들 처분했으니까 피해는 거의 없습니다. 대표님.”
그 어느 때보다 에릭의 ‘대표님’이라는 말이 차갑게 들렸다.
“말해.”
“이것까지 예상하신 건 아니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으나, 마음을 다잡고 말했다.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
“일단 GB 이름으로 피해단체에 5억 달러 기부해.”
“5, 5억이요? 왜 그렇게까지 하세요.”
“늘 공격적으로 투자해 오던 GB인베스트먼트는 테러 불과 한 달 전까지 매도만 했어. 월가는 물론, 미국 정부에서 우리를 곱게 볼까? 5억 달러면 푼돈이지. 그 정도는 투자한다고 생각해.”
“알겠습니다. 이 정도 규모의 기부면 재단을 하나 만들까요?”
“법인까지 내려면 늦으니까 바로 진행해. 빠를수록 좋아.”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오늘은 자기 글렀군.”
자리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갔다.
가족들은 아직 자고 있는지, 빗소리를 제외하고 거실은 적막했다.
열려있던 창문을 닫으려다가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시야 멀리,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샤워를 하고 나갈 채비를 하는 사이 어느덧 비가 멈췄다.
기지개를 한 번 펴고는 밖으로 나갔다.
임기사가 미리 차를 가져와 대기하고 있었다.
임기사는 뒷좌석의 문을 열고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몇 년 동안 이 시간에 호출하신 적은 없었잖아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은 무슨. 그냥 일찍 눈이 떠졌어. 가지.”
“네. 태선물산으로 가면 될까요?”
“아니. 할아버지 저택으로.”
“알겠습니다.”
원래는 오후에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조금 일찍 가기로 했다.
진태의 저택 앞에는 이번에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아까 전화했던 걸 생각하면 이번에 새로 들어온 집사일 것이다.
1년 전쯤에도 한 번 바뀌었던 것 같은데.
진태의 까탈스러운 표정이 생각나 살짝 웃음이 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을 모시게 된 집사, 김웅철입니다.”
“서강빈입니다. 앞으로도 회장님 잘 부탁드려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저택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것과 같이 서재에는 아무도 없었다.
늘 진태가 있었던 걸 생각하면 조금은 어색한 감이 있었으나, 묘하게 마음이 편했다.
진태가 나갈 때면 열어둔다는 천장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물기가 아주 조금 남아 있는 곳들을 보아, 아마 아까 비가 왔을 때 저택에서 일하는 사람이 닫았을 것이다.
온실 안으로 들어가자 적당한 서늘한 기운이 기분 좋게 몸을 감쌌다.
늘 이곳을 아무렇지 않게 걸어갔을 진태를 떠올리며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진태와 자주 앉아서 담소를 나누던 테이블과 의자가 잘 정돈되어 놓여있었다.
옆에는 이번에 새로 가져다 놓았는지, 흔들의자가 눈에 띄었다.
불현듯 동심이 생겨서 흔들의자에 앉았다.
위에는 곱게 짜인 담요도 있어 몸에 덮었다.
얇았음에도, 충분히 따뜻함이 느껴졌다.
어깨까지 덮은 따스함과 얼굴 위를 스치는 서늘한 바람이 어우러졌다.
“잘 생각은 없었는데….”
몸이 노곤해짐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