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2001년 9월 11일.
이슬람의 근본주의 세력인 오사마 빈 라덴과 무장 조직, 알카에다가 벌인 테러 사건이 일어난다.
소방관, 경찰관, 응급구조사 등 순직한 사람만 412명, 건물이 붕괴하며 뿜어져 나온 유독성 분진으로 암 발생자가 5700여 명, 건강이 악화된 사람은 7만 명이 넘었고 사망자만 약 3000여 명에 달했다.
테러가 일어난 지역은 뉴욕증권거래소와 나스닥 시장이 있는 월가를 비롯해 온갖 금융기업이 모여 있는 행정구였다.
테러 직후 미국 정부는 1주일 동안 주식 시장을 잠갔으며,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던 미국 시장의 폭락이 예상되자 한국도 무너져 내렸다.
종목의 약 90프로가 하한가를 달했고, 종목의 98프로가 하락했다.
한국에 이어 일본이 무너지고, 이에 따라 아시아 전체의 증시가 무너졌다.
유럽 증시마저 무너지고 혹자는 이를 ‘도미노 증시’라 불렀다.
그 사건이 일어나기까지 불과 두 달도 남지 않았다.
내가 막을 수 있을까, 고민을 해보았지만 결국 포기했다.
우발적인 테러가 아니라 처음부터 계획된 일.
이 사실을 알릴 방법도 없거니와, 근거로 제시할 만한 것도 없다.
게다가 전 세계의 증시를 변동시킬 이 테러에 내가 손을 댄다면, 앞으로 일어날 주식 시장의 변동은 예측 불가능할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수익을 피해자들에게 나누는 것뿐이다.
잠시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고 준희가 물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지금 GB가 미국증시에 투자하고 있는 금액이 어느 정도 되지?”
“43억 달러 정도 됩니다.”
에릭이 대답했다.
“추가 투자는 당분간 진행하지 마.”
“이제 겨우 호황인데 투자를 멈추라고요?”
에릭은 이유도 묻지 않고 받아적고 있었지만, 준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리고 GB가 보유하고 있는 주식들 전부 최대한 매도해. 현재 주가의 80프로까지는 넘겨도 좋아.”
GB가 매수한 규모인 43억 달러는 한화로 5조 원이 넘어가는 금액.
이만한 금액이 한 번에 빠져나간다면, 월가도 흔들릴 수 있는 정도였다.
준희는 입을 벌리고 멍하니 서 있었고, 에릭은 내 말을 적기 바빴다.
메모를 끝낸 에릭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개인투자자까지 알아볼까요? 저희 규모의 투자금을 한 번에 빼내면 폭락까지 이어질 수 있어요.”
“네가 알아서 처리해도 좋아. 그리고 매도한 금액 중 8억 달러는 한국으로 뺄 거야.”
“한국으로요? 좋은 투자처를 찾으셨나요.”
“호텔을 지으려고.”
“호, 호텔을 짓는데 8억 달러나요?”
준희가 놀란 표정을 지을 만했다.
현시점으로 8억 달러는 약 1조 원에 육박하는 금액이었으니까.
그리고 이 시공비는 고스란히 태선가의 내 지분으로 변모할 것이다.
아까 카페에서 내 목표를 들었던 에릭은 이해한다는 듯 입꼬리만 올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호텔만 짓는 건 아니고. 건설사 하나를 인수해야 되거든.”
준희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에릭이 나를 보며 물었다.
“매도하고 남은 자본은 어떻게 할까요? 그냥 놀리기에는 너무 큰 금액입니다.”
“내가 말한 대로 70프로 이하 가격에 매도해야 되는 주식은 내버려 둬. 그럼 크게 노는 돈은 없을 거야.”
월가 안에서 GB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테러를 두 달 앞두고 갑작스럽게 모든 주식을 빼낸다면, 테러와 관련이 있다고 의심을 살 수도 있다.
어느 정도의 손해는 기꺼이 감수할 생각이다.
“그리고 준희야. 너랑은 조만간 마카오에 다시 가야겠다.”
“마카오 타워 말씀하시는 거죠? 언제든 갈 수 있게 짐가방 싸놓겠습니다.”
“하하. 일주일 전에는 말해줄 테니까 그럴 필요는 없고. 알고만 있으라고.”
“알겠습니다!”
준희의 통역 능력도 필요했지만, 시간이 필요한 계약 관련 일에는 다시 한번 맡겨볼 생각이었다.
에릭과 비슷한 수준은 못 되더라도, 에릭의 밑에서 일을 배운지 벌써 1년 가까이 되었으니 기대가 되었다.
“그럼 식사하러 가지.”
“제가 괜찮은 한식당 알아봤습니다. 남부에 있는 곳인데 차 타고 20분이면…”
“오늘은 도넛이 먹고 싶어.”
“대표님이요?”
내가 완전히 한식파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에릭이 미심쩍은 눈빛을 보내왔다.
물론 도넛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김민섭을 만나기 위함이었지만 이를 설명할 수는 없으니 그저 어깨만 한 번 으쓱했다.
준희가 눈치 없이 나섰다.
“제가 사 오겠습니다!”
“아니야. 산책도 할 겸 같이 가지.”
둘의 어깨를 동시에 토닥인 뒤 건물 밖으로 나왔다.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시애틀 인근의 한 던킨도너츠였다.
에릭이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GB 맞은편에도 있는 던킨을 먹으러 굳이 여기까지 온다고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먹고 싶었어.”
민섭이 지금 시기에 방문할 바이오팩토리와 가장 가까운 던킨도너츠가 이곳이었다.
그가 정말 이곳을 올지는 알 수 없었지만 밑져봐야 본전 아닌가.
에릭의 시선을 무시하고 준희와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 쪽에서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돈은 드리겠습니다. 컵도 새로운 걸로…”
“이게 대체 몇 번 째야! 꺼져. 다신 오지 마.”
영어만으로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지만,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는 남자는 분명히 한국인이었다.
바이오팩토리 근처 던킨도너츠 안에 있는 돈 없는 한국인.
이 모든 경우가 맞아떨어진다면, 저 남자는 틀림없는 김민섭일 것이다.
내가 읽었던 인터뷰에서는 친절한 직원이 새 컵으로 바꾸어주었다고 나왔던 것 같은데.
기억이 잘못된 건지, 인터뷰가 각본처럼 짜인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보였다.
이맘때면 민섭이 명동 사채시장에서 신체 포기 각서까지 써가며 돈을 빌렸을 시기일 것이다.
그렇게 빌려 쓴 사채는 세계 각국의 바이오기업들을 찾아다니며 탕진했고.
그와 다른 팀원들이 모은 130억 원은 사업자금이니 건드릴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바이오기업의 미래 회장이 겨우 커피 한 잔에 절절매고 있다니.
종업원과 민섭 사이에 서서 지폐 열 장을 내밀었다.
열 명의 프랭클린이 종이 안에서 직원을 지그시 바라봤다.
“뭐, 뭡니까?”
“그동안 이 친구가 먹은 커피와 도넛에 대한 대금입니다. 그리고… 도넛도 10개만 포장해주세요.”
“도넛값으로 천 달러를 주신다고요?”
종업원은 의문형의 말과 다르게 어느새 지폐를 빠르게 앞치마 앞에 붙은 주머니 속으로 넣으며 말을 이었다.
“헤헤. 어떤 도넛으로 드릴까요?”
민섭에게 물었다.
“어떤 도넛 좋아하십니까?”
“예? 대체…”
“기본으로 주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이 들뜬 표정을 하고서 집게를 들고 도넛이 전시된 곳으로 걸어갔다.
민섭이 어리둥절하며 말했다.
“제게 커피와 도넛을 왜 사주시는 거죠? 게다가 저 돈이면 매장에 있는 도넛을 다 살 수 있는 돈일 텐데요.”
“타지에서는 같은 한국인끼리 돕고 살아야죠. 작은 호의이니 신경 쓰시지 않아도 됩니다.”
민섭이 나를 보더니 한국어로 말했다.
“한국 사람입니까?”
“네. 시애틀에서 작게 투자회사를 하고 있습니다.”
“투자회사요?”
에릭과 준희가 내 옆에 다가왔다.
에릭이 말했다.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어! 혹시 에릭 장 아닙니까?”
“맞는데요.”
에릭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CBA 뉴스채널을 봤습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에릭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민섭이 내민 손을 잡았다.
그보다 CBA? 뉴스채널?
CBA라면 미국 최대 방송 채널로, 한국에도 개국된 곳이었다.
“에릭. 저게 무슨 말이야?”
“아 최근에 경제 패널로 한 프로그램에 나갔거든요. 거기서 보셨나 봐요.”
“...잘했다.”
에릭의 등을 토닥이고 민섭을 보며 말했다.
“민섭 씨는 무슨 일 하고 계십니까? 아, 참. 자리에 먼저 앉으시죠.”
“바쁘신 분 같은데 그래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어디 미국에서 한국인 보기가 쉽습니까.”
“여기서 차로 5분만 가면 한인타운인데요…?”
“...가시죠.”
민섭이 먼저 바다가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옆에 가서 앉으려는데, 에릭이 내 팔목을 잡고 물었다.
“대표님? 저분 때문에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아까 말했잖아. 바다가 보이는 도넛집에 오고 싶었다고.”
나도 속 터놓고 말하고 싶었지만, 설명할 근거가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다가 현재는 인지도도 없는 민섭을 어떻게 알고 이곳에 오겠는가.
에릭이 나처럼 미래를 살다 온 사람이 아닌 이상.
“대표님이 이렇게 사교성이 좋으실 줄은 몰랐네요. 처음 보는 사람과 이렇게 자리를 다 하고.”
“가지.”
민석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사이, 아까 천 달러를 받은 직원이 도넛과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민석이 커피를 한 입 마시더니 말했다.
“쫓겨날 뻔했는데, 이제는 직접 갖다주네요… 돈이 좋긴 좋군요.”
“나쁠 건 없는 거죠. 그보다 아까 하던 질문 이어서 해도 되겠습니까?”
“아, 무슨 일 하냐고 물으셨죠. 음…”
민섭은 입꼬리를 늘리다가 말을 이었다.
“바이오산업에 대해 공부하고 있습니다. 제가 창업할 기업이 이 분야거든요. 이전에 한국에서 다니던 직장은 그만두었고요. 하하. 회사를 다닐 땐 몰랐는데 대표라는 자리가 제법 무겁습니다.”
“책임감이 따르니까요. 원래 바이오와 관련된 분야에서 일하고 계셨던 겁니까?”
“아니요. 원래는 IT기업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말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바이오 산업에 대해 공부를 시작한 것은 2년도 안 됐습니다.”
“하나도 우습지 않습니다. 무지한 분야에 도전하는 정신이 대단한 거죠. 하시려는 사업은 어떤 겁니까?”
“복제약을 만들려고 합니다. 아, 복제약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보통 이름만 듣고 질겁을 하거든요.”
“네. 알고 있습니다.”
민섭이 아니었다면 복제약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과거 증권사 시절, 민섭이 창업한 델타플러스에 투자를 하기 위해 공부를 한 적이 있었다.
제네릭 의약품이라고도 불리는 복제약은 브랜드가 있는 약과 동일한 의약품이다.
브랜드 제약회사의 독점 판매 기간이 끝나고, 다른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만드는 게 복제약이다.
브랜드 의약품과 동일한 활성 성분, 동일한 성능의 약을 더 싸게 살 수 있게 만든다.
“공부하기가 쉽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무엇이든 처음이란 게 어렵지, 이후는 괜찮지 않습니까. 전문용어만 보면 어지러웠는데, 이제는 다 적응했습니다. 하하. 터키에서 바이오산업 쪽의 연구원도 영입했고요.”
“그럼에도 아직 창업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민섭이 쓸쓸한 미소를 띠었다.
창업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일 테니까.
말하지 않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민섭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투자를 받아 보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