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정순은 양털 모자를 쓰고 구찌 문양이 새겨진 머플러를 두르고 선글라스까지 끼고서 카페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태선호텔의 운영이사, 영실은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금방 풀고 콧소리를 냈다.
“사장님. 제가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정순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는 자리에 앉았다.
영실의 옆에 앉아 있던 태선호텔의 상무, 오배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서정순 사장님이 복귀하기만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언제 돌아오시는 겁니까?”
정순의 측근, 영실과 배훈조차 정순이 태선호텔에서 쫓겨난 내막을 알지 못했다.
반평생 태선호텔을 다니며 정순의 줄만 부여잡고 있던 그들이었다.
아직, 정순이 돌아올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있었다.
정순은 갑갑했는지 머플러를 살짝 풀고는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 이번 일만 해결되면 돌아갈 수 있을 거야. 너희도 입조심하고 자리 지키고.”
“지금 태선호텔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들으셨어요?”
영실의 말에 정순의 표정이 굳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자신이 운영해오던 태선호텔의 내실을 모른다는 무지를 드러내기는 싫었지만, 알고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말해 봐.”
“그게…”
영실은 현재 태선호텔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가감 없이 전달했다.
강빈이 새로 부회장으로 취임하고, 고진석이라는 전문경영인을 데려와 태선호텔의 전반적인 경영을 맡기고 있다는 것.
그리고.
“태선호텔 판교점도 지을 거라고 합니다. 장충동에 있는 본 건물보다도 훨씬 고급으로요.”
정순은 머플러를 입가로 올리고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렇게나 자신이 바라던 태선호텔의 고급화.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늘 진태에게 요구해왔지만 거절당했다.
자신을 태선가에서 내쫓기게 만든 장본인, 강빈이 제 자리를 이어받은 것도 열받아 죽겠는데 부임하자마자 자신의 숙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진행한다니.
이 사실을 알고 있을 영실은 정순의 눈치도 보지 않고 나불거렸다.
태선호텔의 사장 자리에 있을 때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힘을 잃은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다.
“외부인을 데려다 쓴다는 건 무슨 소리야? 영실이 네가 맡는 게 아니고?”
영실은 운영이사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던 측근이었다.
정순의 첫째 딸인 수경이 태선호텔을 물려받는 것은 내정되어 있었지만, 분점을 낼 경우 총책임자로 영실을 보내기로 했으니까.
영실이 볼멘소리를 내며 말했다.
“서강빈 부회장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태선호텔은 제 맘대로 할 거래요. 회장님 허락도 받았다나. 저를 어찌나 고깝게 쳐다보던지. 사장님이 빨리 복귀해주세요.”
“회장님 허락이라니? 아버지가 강빈이를 밀어주고 있다는 말이야?”
“어머, 모르셨어요? 지금 태선호텔은 이사회도 무시하고 부회장님 결정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하… 아무튼 앞으로도 서강빈 주시하고 자리 지키고 있어. 또 연락할게.”
영실과 배훈은 영 믿음직하지 않다는 눈빛을 잠깐 내보이다가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
길고 추웠던 겨울이 지나가고 2001년의 봄이 시작되었다.
차를 타고 길가에 핀 벚꽃들을 보며 태선물산으로 출근하는 길이었다.
한 남자가 벤치에 앉아 흩날리는 벚꽃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 임기사. 잠깐 멈춰 봐.”
내 말을 들은 임기사가 부드럽게 길가 한쪽에 멈춰 섰다.
“왜 그러십니까?”
“아는 사람이어서. 연락할 테니까 근처에서 대기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차를 갓길에 계속 세워둘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임기사를 먼저 보냈다.
임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더 묻지 않고 차를 움직였다.
나는 남자의 옆에 앉아 고개를 돌리지 않고 말했다.
“여기서 뭐 하세요. 큰아버지.”
동만이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무감정한 목소리.
“네가 여기 왜 있냐.”
“차를 타고 가다가 큰아버지 보여서요. 요즘은 뭐 하고 지내세요?”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동만의 말이 이어졌다.
“다 잃었어. 이제 미련 같은 건 없다.”
동만이 가족들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까지 했는지, 진태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다.
진태도 그의 사정을 딱하게 여기긴 했으나, 죄는 덮지 않았다.
경주와는 정략결혼도 아니었고 오로지 그의 고집으로 선택했던 여자다.
“큰아버지가 이렇게 무기력한 모습으로 있는 걸 할아버지가 알게 되면 뭐라고 하겠어요. 일어나셔야죠.”
“아버지를 볼 낯이 없어. 이제 더 일할 생각도 없고. 이렇게 지내다가 가는 게 속죄하는 길일 거다.”
나는 고개를 돌려 동만의 얼굴을 마주했다.
아직도 풍채는 비대했지만 안면은 수척했고 옅은 다크서클이 눈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큰아버지. 뭐든 그래도 포기하지 마시고 시작하세요. 건강한 모습으로 지내시는 게 그나마 할아버지께 속죄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동만을 동정할 생각은 없었으나, 병실에서 동만을 바라봤던 진태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잊혀지지 않았다.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동만에게 수표 한 장을 건넸다.
“이게 뭐냐?”
“보시는 대로 수표입니다.”
준만에게 건넨 수표에 적힌 금액은 20억 원.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늘 지갑 안에 들고 다녔던 수표다.
나에게도, 준만에게도 큰돈은 아니겠지만 그의 동력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내밀었다.
동만이 한쪽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야, 내가 돈이 없어서 이러고 있는 것 같냐?”
“이 돈을 다 쓰실 때까지만 사업하세요. 그 이후에 어떻게 할지 결정하시고요.”
계열사 하나를 내주거나, 회사 하나를 사줄 수도 있지만 그의 힘으로 일어섰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동만은 일순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더니 수표를 받았다.
그리고 툭, 내뱉었다.
“갚으마.”
“정 갚고 싶으시면 이자까지 붙여서 주세요.”
“하참. 알았다.”
동만은 수표를 잠깐 내려다보고는 품 안에 넣었다.
그에게 베푸는 처음이자 마지막 호의다.
태선가의 한 축을 담당했던 그가 이렇게까지 무너지는 것을 보며 느끼는 게 많았다.
미래를 알고 있다 한들, 나로 인한 간극은 점점 커져 가고 있었고, 어떻게 변화할지 모른다.
그러니 단 하루도, 한 시간도 허투루 써서는 안 된다.
***
내가 부회장에 취임하고 진석을 데려오며 태선호텔의 경영구조는 완전히 바뀌었다.
기존에도 정순, 한 명의 입김이 세긴 하지만 모든 일을 그녀의 마음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면, 이젠 내 한 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었다.
직원들은 기존 그대로, 추가 인원만 뽑았지만 임원진들은 갈아엎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회의에서 내게 반발했던 이영실 운영이사는, 이후에 장부에 손을 댄 것이 밝혀져 이사보다 한 단계 낮은 이사대우로 지급이 하향 조정되었다.
태선호텔에서 어느 정도 체계화를 끝내고, 태선물산 안에서 믿을만한 임원들에게 내 일을 분담시키는 데 봄이 다 지나갔다.
개인투자를 할 시간도 없을 만큼 바쁜 시간이었다.
에릭에게 꾸준히 기업 리스트와 투자 규모에 대해 메일을 보낸 것이 끝이었다.
‘이제야 여유가 조금 생겼어.’
나는 지금 시애틀행 전용기에 몸을 싣고 있다.
미국에 가는 이유는 두 가지.
이제 곧 닥쳐올 911테러로 인한 미국증시의 변동과 크게 이득을 볼 수 있는 투자처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델타플러스.
전생에서 한국의 바이오기업이었던 곳으로 내년에 창업될 것이다.
현재 미국에 있는 김민섭이 외환위기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자신과 동료들의 자금 130억 원과 초기 투자금 470억 원으로 총 600억 원의 초기자본금으로 창업했다.
바이오기업임에도 불구하고 델타플러스의 초기 멤버 중 생물학 관련 전공자는 한 명도 없었다.
IT기업에 종사하던 민섭이 바이오산업이 유망하다고 판단해 승부수를 띄웠던 것이다.
무지했으나 의욕만은 뛰어났던 민섭은 1년간 40여 개국을 다니며 유명 바이오 연구자들을 만나 최신 동향에 대해 분석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타국이 바로 미국.
일화 중 하나로 미국의 던킨도너츠에서 매일 끼니를 때우며 같은 종이컵에 몇 날 며칠을 커피 리필을 받았다고 한다.
수백억 원의 초기자금은 있었지만, 사업에 올인하고 정작 제 끼니를 채울 돈도 없었던 것이다.
이를 불쌍하게 본 종업원이 새 컵에 리필을 해주었다고.
민섭이 다녔다던 던킨도너츠가 어디 지점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오랜 시간 머물렀다던 바이오팩토리 회사는 알고 있다.
시기도 이맘때였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시애틀에 위치한 타코마 국제공항에서 에릭과 준희가 나를 반겼다.
준희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이제 부회장님이라고 해야겠죠?”
“무슨 소리야. 너는 대표라고 불러야지.”
“아, 그런가요? 하하.”
여전히 어벙해 보이는 모습에 실웃음이 지어졌다.
겉으로는 저렇게 보여도, 중국 IT기업 투자를 진행하는 과정에 대해 보고받았을 때, 재능은 출중했다.
에릭은 아예 팔을 벌리며 나에게 다가왔다.
가볍게 포옹하자 에릭이 아쉬운 소리를 냈다.
“부회장 다시더니 GB에 너무 관심을 안 주시는 거 아니에요? 저희끼리도 수익은 내지만 대표님이 정해주시는 건 못 따라간다니까요.”
“이제 시간이 좀 날 거야. 그동안 정말 바빴거든.”
옅게 웃음을 짓는 에릭의 어깨를 툭 치고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카페라도 가지.”
에릭과 준희가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우리가 간 곳은 타코마 공항 근처에 있는 5층짜리 스타벅스 건물이었다.
준희는 주문을 하기 위해 1층에 머물렀고, 나와 에릭은 루프탑이 있는 옥상에 올라갔다.
에릭이 난간에 팔을 기대고 말했다.
“어때요? 서울에 있다가 여기 보니까 휑하죠.”
에릭의 말마따나 타코마 공항 근처는 낮은 건물들이 종종 보였지만 평야가 대부분이었다.
“좋네.”
“대표님.”
낮게 깔린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 에릭을 봤다.
에릭은 시선을 멀리하며 말했다.
“저는 대표님이 투자사를 운영하며 이득을 쌓아 올리는 게 삶의 목적처럼 보였어요.”
“그게 목적이었던 때도 있었지.”
에릭의 말을 듣고 강현재의 삶이 떠올랐다.
단순히 부를 축적하는 것이 목표였던.
“지금은 다르다는 거죠?”
“에릭. 나는 태선의 총수가 될 거야. GB는 그를 위한 초석일 뿐, 나에게 어떤 의미도 없어.”
에릭의 옆얼굴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옅게 미소를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럴 줄 알았어요. 태선물산이니, 태선호텔이니 거기의 경영자로 일하는 것보다 GB의 수익이 더 클 텐데도 관심은 그쪽에 가 있으시잖아요.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그러기 위해선 네 도움이 필요해.”
에릭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대표님이 그런 낯부끄러운 말도 하실 줄 알았어요? 하하. 어쩔 수 없네요. 끝까지 같이 가시죠. 제가 힘이 되어 드리겠습니다.”
한국대에서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천진한 표정을 짓고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