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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잃고 재벌로 시작하기-148화 (148/249)

#148화

태선물산의 전 사장실이자 현 부회장실.

최근 들어 출근을 하고 이곳에 들르는 일이 잦았다.

이전에는 업무상 목적으로 들렸지만, 최근에는 별다른 목적 없이도 출근하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옮겨졌다.

내가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자 준만이 피식 웃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벽을 허물어 버릴까? 얼굴 보고 일하면 좋잖아.”

“...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밑에 사람들이 들으면 당장 실행합니다.”

준만의 집무실과 내 집무실은 바로 옆방이었기 때문에 나온 농담이었다.

최근 아무리 편한 사이라지만 일과 내내 얼굴을 보고 싶진 않았다.

준만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태선호텔 취임식은 했어? 임원 회의가 열렸다는 건 들렸는데 취임식은 어째 들려오는 소식이 없네.”

“임원 회의도 열 겸 같이 간단하게 했습니다.”

“이런… 그렇게 땡처리하는 놈이 어딨어? 진석이 형님은 그걸 또 용인하고?”

“이제 제 말이라면 월북이라도 할 기세던데요.”

판교에 간 이후 어째 진석이 나를 보는 표정이 종교를 믿는 사람 특유의 그것과 비슷했다.

“하긴, 누가 7년 전에 판교 신도시 개발을 예측하고 땅을 사 놔? 너 아니면 누구도 몰랐을 거다.”

“운이 좋았죠.”

“운은 무슨. 어떤 우연이 열 번이 넘게 통해? 사업하는 족족 홈런을 쳐대면서. 그냥 네가 난 거지.”

준만이 나를 보며 코웃음을 치고는 말을 이었다.

“아무튼 판교에 드디어 건물을 올린다면서. 작년 허가 떨어진 것 때문에 그런 거지?”

“고사장님한테 들으셨나 보네요. 맞습니다. 총 5만 평 부지에 호텔과 휴양 시설을 올리려고요.”

“허, 시공사는 알아봤고? 그 규모의 시공 맡으려면 어지간한 데는 안 될 거다.”

“아직이요. 자본과 계획은 갖고 있으니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아니면 시기를 조금 늦춰. 올해 말이면 마카오도, 사이타마도 정리되니까 여유는 충분해.”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말씀드릴게요.”

전생에서 일어났던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되면, 태선건설을 찾으면 된다.

이전처럼 올인할 필요가 없으니, 모든 변수를 고려하면서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태선건설을 좀 더 키워보는 건 어떨까요?”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긴 하다. 지금만 해도 국내 업무는 멈춰 있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이참에 다른 건설사를 인수하면 어떨까 합니다.”

준만이 한 손으로 턱을 쓰다듬고는 말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지금은 인수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2000년도 들어서서 저금리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너도나도 융자를 내고 집을 사고 있어. 아파트 매매값만 1년 새 10프로가 넘게 뛰었단 말이지. 인수를 하더라도 웃돈을 주고 사야 될 거야.”

준만의 말대로 작년 기준 서울 아파트의 평당가는 1월 기준 5백 79만 원 선이었지만 연말에는 6백 55만 원 정도로 크게 뛰었다.

광역시와 부산, 신도시의 인상률도 그에 만만치 않다.

그리고 내 기억대로라면 올해는 더 하면 더 했지, 그보다 덜 오르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재건축 바람까지 거세게 불어오고 있으니 건설사 측에서는 이보다 활황세는 찾기 힘들 것이다.

“적당한 값에 넘겨받으면 아버지도 오케이라는 거죠?”

“지금 시기에 정가만 쳐도 무조건 오케이지. 어디 아는 데라도 있는 거야?”

“아직은 두고 보는데, 곧 나올 것 같은 데가 있습니다. 때가 되면 제가 물어올게요.”

“또 네 감이 그리 말하는 거야? 허허. 알았다.”

준만도 더는 묻지 않겠다는 듯 넘어갔다.

“물산도 아버지가 부임하시고 나서 쭉 성장세네요. 이 정도면 소질이 있던 거 아닙니까?”

“야, 이놈아. 누굴 속이려고 들어? 가장 굵직했던 마카오고, 월드컵이고 다 네놈 작품 아니냐. 아버지 앞에서나 일부러 어깨 올리는 거지, 네 앞에서도 그래야 돼?”

“저는 살짝 의견만 첨부한 거죠. 하하. 그리고 그것 말고도 미국 에소랑 화학협업을 진행한 거나 중동 쪽 수주까지 다 아버지 부임하고 진행된 일들 아닙니까.”

“그건 그렇지. 안 그래도 굵직했던 물산이 더 커졌어.”

준만이 이빨을 내보이며 씨익 웃더니, 이내 살짝 의문스런 표정을 띠었다.

“그런데 굳이 판교에 호텔을 지을 필요가 있냐? 그 비싼 땅값만 회수하기까지 꽤나 걸릴 텐데. 거기에 시공비까지 하면 근 10년간 적자 벗어나기 힘들 거야.”

“땅값이야 푼돈을 주고 샀으니 신경 쓸 필요 없고 비싼 곳에 지었으니 태선호텔의 기업가치도 올라가지 않겠습니까. 태선호텔이 지금보다 훨씬 커져야죠.”

거기에 더해 태선건설의 연혁에도 한 줄 추가로 들어갈 말이 있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이번 태선호텔 판교점은 태선건설에서 인수한 건설사에서 시공을 맡게 될 것이다.

“그래. 네 욕심을 누가 이기겠어. 이번에도 네 생각대로 될 거다. 그보다 네가 호텔을 짓는다니 어떤 호텔일지 궁금하네. 진석이 형님도 끼어 있으니, 평범하진 않겠지?”

“당연하죠. 돈을 쏟아부을 예정이거든요.”

“네가 돈을 쏟아부어? 그럼 대체 얼마가 들어가는 거냐. 허허.”

진태의 말을 빌리자면, 내가 처음으로 빌린 회사다.

그리고 진태에게는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갚겠다고 호언장담까지 한 상황.

그 말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번 판교에 그동안 모아두었던 자금 중 일부를 풀 생각이었다.

아직도 미국에 잠들어 있는 내 자본이 한화로 약 5조 원이 넘었다.

아무리 초호화 호텔을 짓는다 한들 티가 조금 날 뿐 자본은 건재하다.

오히려 내가 갖고 있는 자본을 태선의 지분으로 바꿀 수 있으니,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온갖 부대시설과 휴양시설을 다 갖춘, 호텔 안에서만 생활해도 지장이 없는 파라다이스를 만들 겁니다.”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구나. 첫 손님은 당연히 정해져 있겠지?”

“당연히 아버지와 어머니 아니겠습니까?”

내 말에 준만은 흡족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번 호텔을 지을 계획을 짜며 떠올랐던 것은 전생의 끝자락에서 보았던 ‘고려 로얄 팰리스’였다.

투자처에게 선물 받았던 숙박권으로 단 하룻밤을 머물렀지만, 마치 왕궁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그때의 느낌이 지금도 떠올랐다.

고려 로얄 팰리스의 입구는 지하에 있었다.

주차장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천장은 화려한 금박으로 반짝거렸고, 입구는 마치 황궁으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연상시켰다.

지상 37층에 위치한 루프탑은 그런 화려함의 극치를 달렸다.

수심 150cm의 수영장은 투명한 건물 외벽과 난간으로 이어져 신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고, 크리스탈을 이용해 만든 거대한 무궁화가 한쪽에 자리 잡아 빛을 뿜어냈다.

24시간 운영되는 바의 앞에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는 의자들이 즐비해 있었고, 직원들이 늘 대기했다.

내가 지으려고 계획 중인 호텔은 적어도 고려 로얄 팰리스,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

“할아버지는 최근 어떠세요?”

수술 이후 진태의 건강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채규에게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해서 묻는 중이었다.

“하하. 걱정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일이 생기면 바로 부회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괜찮다는 채규의 말에도 안심이 되지 않았다.

‘전생과 달라질 수 있을까.’

정확한 시기는 기억 안 나지만, 진태가 죽었던 것이 이맘때였다.

“음식은 잘 드시죠? 자극적인 조미료는 피해야 합니다. 술 담배도 피해야 하고… 이실장님이 옆에서 잘 지켜봐주세요.”

“그렇지 않아도 요새 서남순 부회장님이 반찬을 갖고 오십니다. 저희 요리사들도 신경 쓰고 있고요.”

“남순 고모가 직접요? 그나마 조금 안심이네요.”

진태의 저택에서 일하는 요리사들이 최고급 호텔 출신이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과 건강식은 별개의 문제다.

남순이 갖고 온다는 음식들이 맛은 없을지라도 건강에 신경을 써서 준비했을 것이다.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네. 회장님도 부회장님 오신다고 하면 좋아할 겁니다.”

“그럼.”

전화를 끊고 태선호텔의 부회장실로 들어갔다.

미리 호출을 했기 때문에 진석이 소파 한쪽에 앉아 있었다.

“부회장님! 도대체 건설사가 나올 거라는 건 어떻게 예측하신 겁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반색하는 진석을 보며 옅게 웃음을 지었다.

“태선그룹의 정보라인을 너무 무시하는 것 아닙니까?”

“처남도 전혀 모르던데요? 그냥 부회장님이 난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정부사업인 디지털미디어시티 시공을 맡고 있는 우리건설은 어제 구제금융 신청을 냈다.

이유는 베이징 항만건설에 따른 공사대금 회수 지연으로 인한 적자 누적.

정상적인 시기에 공사대금을 받았다면, 차질없이 진행되었을 디지털미디어 시공은 이제 우리건설을 인수하는 기업에 넘겨질 것이다.

워낙 좋은 사업이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었기에, 경매가가 꽤 붙겠지만, 시공을 맡은 건설사는 장기적으로 볼 때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

현재 건설사들은 때아닌 건설붐으로 들어오는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상황.

지금 당장의 자본이 필요한 건설사 인수에 자본을 끌어다 쓸 곳은 내가 봤을 때 없었다.

내가 자금을 대줄 수 있는 태선건설을 제외하고.

“우리건설은 제가 자본을 대고 인수해올 겁니다. 고사장님은 태선호텔 판교점 설계에 심혈을 기울여주세요.”

고려 로얄 팰리스를 떠올리며 전체적인 윤곽은 잡아놓았다.

완성은 다년간의 호텔경영 경험을 갖고 있는 진석과, 태선 건설 설계도팀이 해줄 것이다.

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고급 호텔을 만들겠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다시 일 보러 가시죠. 저는 물산에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준만에게도 우리건설을 인수하겠다는 의견을 밝히고 채권단을 설득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진석도 이런 사정을 알고 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태선호텔과 태선물산…. 범인은 둘 중 한 자리도 감당 못할 텐데, 볼 때마다 놀랍네요. 몸이 한 개인 것이 아쉽겠습니다.”

“하하. 그러게요. 개인투자하기 바빴는데 자리가 자리인지라 쉽지 않네요.”

“호텔에는 신경 안 쓰이게 제가 더 노력하겠습니다. 힘드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진석의 모습을 보며 MP3, 홈쇼핑, 픽앤픽 등 내가 직접 나서 해결해주었던 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확실히 그동안 일해왔던 사람들과 다르게, 진석은 경영했던 이력이 있어서인지 내 일거리를 줄여주었다.

“고사장님.”

“예. 말씀하시죠.”

“지금 제가 앉아 있는 이 자리. 탐나지는 않으신가요.”

“네? 하하. 저보고 고용주의 자리를 넘본다는 겁니까?”

“이 자리를 넘긴다면 저는 더 높은 자리에 있겠죠.”

“그 말씀은…”

“고사장님이 확실하게 보여주신다면, 저도 확실하게 보답할 생각입니다. 저희 태선호텔을 위해서 더 힘써주세요.”

전생에는 알지 못했던 진석.

어쩌면 내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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